제246화
구염락이 계속해서 말했다.
“금용을 살려 둬서 미안해. 네가 금용 때문에 그렇게 큰 억울함을 겪었는데도… 심지어 오늘 금용은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뛰쳐나가서 널 오해하게 만들었어. 내 잘못이야.”
“…….”
“하지만 걱정 마. 금용이 설령 발가벗고 나섰다 해도 난 그 아이를 반드시 내보냈을 거야. 금용은 몸을 미끼로 황궁에 남으려 할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어.”
구염락의 말투가 돌연 어두워졌다.
“나도 금용이 삿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 다시는 그 애가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황송하군요.”
장서열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그녀는 금용이 싫었다. 금용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었다. 금용은 구염락과 영예와 치욕을 함께 한 정, 그리고 구염락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 마음까지 전생과 똑같았다.
장서열은 전생의 전철을 밟게 될까 두려웠다. 금용을 우습게 여기면 그 계집은 언젠가 재기하여 다시 아득바득 기어올라올 것이다.
“서열아.”
장서열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전 금용이 싫습니다. 정말 너무 싫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 아이와 과거에 쌓았다는 그 우정은 더 싫어요!”
“…….”
“네, 당신에게 금용은 단순한 계집종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그 아이가 당신을 위해 했던 모든 행동에 면죄부를 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전 그 아이가 미워요. 지금 당장 그 아이가 황궁에서 나가 버렸으면 좋겠다고요!”
미리 손을 쓰지 않았다면 금용은 결국 이번 생에서도 구염락과 가장 가까운 여인이 되었으리라. 만약 금용이 전생에서처럼 다시 구염락과 함께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귀자태후(归慈太后, 구염락 친모의 전생 칭호)와 구염락의 모자 관계보다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그래서 장서열은 금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매사 구염락을 극진히 모시던 금용은 언제나 자신이 특별한 귀비 신분임을 과시하곤 했다. 만약 금용과 대립하는 입장만 아니었다면 장서열 역시 그녀의 입지전적인 인생에 갈채를 보냈을지도 몰랐다.
장서열은 금용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도 자신과 금용 중 누가 구염락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분노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녀가 울분에 차 있자 얼른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화내지 마, 서열아. 몸을 돌봐야지. 금용이 그렇게 싫으면 지금 당장 쫓아낼게. 네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서열아. 응?”
구염락을 쳐다보던 장서열이 돌연 몸을 돌렸다.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순간 장서열의 눈에서 영문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염락이 당황했다.
“서열아,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금용이 내 시중을 든 건 그 아이의 복이었어.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서열아. 울지 마…….”
구염락이 허둥지둥 장서열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너무나 괴로웠다. 과거 수업 시간에 스승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을 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아직 인생을 사는 데 서툴렀고, 때문에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서열아…….”
아껴 주고 싶었던 사랑이 자신 때문에 울고 있었다. 물론 금용은 구염락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이는 장서열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세상 그 누구도 장서열과 비교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서열아.”
구염락은 장서열을 품 안에 꼭 가두었다. 자신 때문에 장서열이 우는 모습은 상상만큼 즐겁지 않았다. 오랫동안 바라온 일이 이루어졌다는 성취감도 없었다. 그저 가슴을 콕콕 찌르는 무언가가 집요하게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어째서 서열이가 나 때문에 다른 여인과 싸우는 게 나를 마음에 두는 증거라고 생각했을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장서열의 품격은 이런 하찮은 일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그의 서열이는 언제나 스스럼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귀함을 갖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우러러보았다. 많은 이가 그녀를 사모했다. 초혜전 시절 사람들은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했지만, 다가가지 못하자 언제나 뒤에서 그녀를 공격했다. 그들이 원한 건 스쳐지나가는 장서열의 눈빛 하나였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고귀한 여인이, 구염락이 사모하는 여인이 오늘 그로 인해 화가 났다. 논할 가치조차 없는 궁녀 한 명 때문에 장서열을 울리는 것이 과연 그녀에게 합당한 처사일까.
구염락은 자신이 너무 잔인했다고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 소란을 피울 자격도 없는 사람을 억지로 참아내게 하지 않았는가. 결국 그녀는 자신 때문에 마음을 다쳤다.
장서열을 꼭 끌어안는 구염락의 마음이 아려 왔다. 자신이 극악무도한 짓으로 그녀에게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장서열은 가만히 구염락의 품에 기댔다. 단단한 팔뚝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구염락의 심장박동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다. 그는 그녀가 우는 모습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갑자기 더 울고 싶어졌다. 이것이 정말 구염락을 위해서인지 자신을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금용을 쫓아내고 싶었다. 구염락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그 여자를 너무나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구염락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을 멀리 내쫓으려는 건 너무 이기적이었다.
장서열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위하는 길은 결코 자신을 위하는 길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말하고 싶었다.
‘금용을 내보내요… 금용은 당신의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훗날 금용은 당신이 사랑하는 후궁에게 손을 댈 거예요. 그 애에게 미련 가질 필요 없어요!’
장서열이 알고 있는 금용은 그러했다. 어쩌면 사적인 원한에 눈이 멀어서일 수도, 혹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그런 까닭일 수도 있었다. 금용이 그리 비천한 계략을 짜낸 건 현재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훗날 구염락의 관심을 받고 손에 쥔 것이 늘어나는 날, 결국 금용의 요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다른 여인이 취하는 걸 막을 생각이 없었다. 첫째는 스스로 구염락의 진심 어린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구염락이 제왕이기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두 번의 생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꾸지 않았다.
장서열은 가끔 힘들게 앞으로 나아가는 구염락을 보며 누군가 진심을 다해 그를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알면 알수록 진실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자신이 그런 사랑을 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지 하늘의 실수로 두 번의 생을 살게 된 사람이자 그의 소중한 꿈을 훔친 사람에 불과했다.
장서열은 적극적으로 구염락을 밀어내지 않았지만 일부러 그를 끌어당기려고도 하지도 않았다. 만일 언젠가 구염락의 시선이 다른 여인을 향한다 해도 장서열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저 다른 마음을 품고 그의 곁에 머무는 여인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장서열은 비록 이번 생에서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다 말할 수는 없었으나 구염락을 무척 아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 자신이 정말 구염락에게 무언가를 바랄 수 있을까.
장서열은 너무 많은 생각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구염락처럼 순수하지 못했다.
손을 뒤로 한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잡은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폐하…….”
“서열아?”
구염락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나를 용서해 주는 거야?”
구염락은 장서열이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 미안해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화내지 마. 다시는 안 그럴게. 서열아… 절대 다시는 안 그럴게.”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구염락의 허리를 껴안았다. 마침내 구염락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았고, 구염락은 그런 그녀를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울던 장서열은 약 기운에 의해 곧 다시 잠에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간을 찡그리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구염락은 계속해 장서열을 껴안고 있었다. 그는 저녁을 먹지도, 상소문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침대 머리맡에 타오르는 촛불과 쓰디쓴 약냄새에 둘러싸여 있었다. 구염락은 품 안에 느껴지는 무게에 마음이 든든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구염락은 두 사람이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원한도, 비난도 없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구염락은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승건전에 모인 백여 명의 관원들이 정사를 논의하고 있었다.
구룡이 에워싼 황금빛 용좌에 앉은 그는 아래에 선 관원이 전전긍긍하며 전시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관원은 승전보를 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무서운가?’
고개를 든 구염락은 용좌에 앉은 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자였다. 섭궁개가 저렇게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용좌에 앉은 자신의 얼굴은 어둡고 매서웠으며, 단단한 근육이 뿜는 살기는 아무리 용포에 감춰 놓아도 가려지지 않았다.
구염락은 자신이 지금보다 더욱 성숙한 사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정숙한 용모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며, 간단한 몸짓은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다. 어느새 귀밑으로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섭궁개는 여전히 원기 왕성한 노익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염락은 갑자기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섬뜩한 시선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구염락은 직감적으로 용상 위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발밑에 놓인 반용도(盘龙图,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림)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구염락은 뜻밖의 공포에 당황했으나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염락은 공중에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용좌에 앉아 있는 자신이 싫었다.
비록 아랫사람을 절로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심지어 승전보를 보고하는 대신조차 감히 웃지 못하게 할 정도로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그였지만 구염락은 왠지 그런 스스로가 싫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곧 그런 모습을 확실히 싫어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따스함도 찾아볼 수 없는 그는 위압적인 모습으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