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혜령은 오늘 군중을 압도하던 황제의 위풍당당한 모습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계속해 황제를 찬양하기에 바빴다. 흥분한 혜령의 두 눈에 불꽃이 번쩍였다.
“소인, 예전부터 폐하께서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견문을 크게 넓혔사옵니다. 홀로 화살 열 발을 열 개의 과녁에 전부 맞히시다니요! 폐하, 여러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가는 상황을 어찌 그리 정확히 보셨사옵니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소리자는 재잘대는 혜령을 노려보았다. 오늘 특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소리자는 혜령이 더욱 거슬렸다.
소리자가 눈에 거슬리는 건 혜령도 마찬가지였다. 소리자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수록 혜령은 더욱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아예 소리자에게 화병을 안겨 죽게 만들 작정인 듯했다.
구염락은 혜령과 소리자 사이의 알력 다툼을 모른 척했다. 그의 그윽한 눈빛에는 기분이 좋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행렬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등불은 그들이 가는 길을 온통 밝게 비추었다. 기뻐하는 혜령의 목소리는 마치 악관(乐官)의 손에 들린 고금(古琴)처럼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안간 무거운 물건에 눌리기라도 한듯 고금이 끽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깜짝 놀란 혜령이 칠흑처럼 깜깜한 조로전을 바라보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에는 항상 황제를 맞이하던 완정도, 촛불조차도 없었다.
돌연 안 좋은 예감을 느낀 혜령이 걱정스레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화를 내실까 걱정이었다.
구염락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이제 궁등이 꺼진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로전은 불은 끄더라도 문까지 닫은 적은 없었다.
구염락은 이 느낌을 정말 싫어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그 느낌을.
구염락이 혜령을 바라보았다.
“가서 문을 두드려라.”
혜령은 즉시 안도했다. 폐하께서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예.”
혜령은 부디 크게 힘 들이지 않고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손에 힘을 실어 탕탕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누군가 나와 이는 마마께서 토라진 걸 알리기 위함이라고, 마마는 실은 폐하께서 들어오시기를 몹시 기다리고 계신다고 얼른 말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혜령의 얼굴은 곧 땀범벅이 되었다. 그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식은땀이 날 때까지 계속해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혜령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문을 연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상대를 붙들고 몹시 안도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구염락 역시 살짝 안도했다. 그는 그제야 오늘 금용을 내쫓고 느낀 그 정체 모를 불길함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서열이가 화가 났다.’
구염락의 입가에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등불을 든 혜령은 앞장 서 걸어가며 초조한 마음으로 몰래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제는 웃고 있었다. 이를 본 혜령은 하마터면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구염락은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버벅대는 혜령에게 모처럼 상을 내리듯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조심하거라. 덜렁대지 말고 침착해야지.”
혜령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허둥지둥 달려온 조로전의 궁녀들이 서둘러 황제를 맞이했다. 그녀들은 긴장이 되어 죽을 것 같았다.
마마는 피곤하니 쉬겠다고 했다. 그리고 등불이 너무 밝아 잠이 오지 않으니 이를 다 끄고 대문을 닫으라고 했다.
궁녀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무서운 현비마마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뜻하지 않게 황제를 문 밖에서 기다리게 만들고 말았다.
화 마마는 황제가 집요하게 문을 두드려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든 하인들을 데리고 전각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구염락은 일어나라고 명한 뒤 곧장 전각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모습은 그의 기분을 더욱 좋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 바퀴를 둘러보아도 익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염락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현비는?”
화 마마가 서둘러 답했다.
“예, 폐하. 마마께서는 몸이 편찮으시어 탕약을 드시고 쉬고 계십니다. 폐하, 농교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고 하겠…….”
그 말에 벗고 있던 망토를 신속히 벗어 던진 그가 내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현비는 좀 어떠하냐. 괜찮아졌느냐? 대체 시중을 어떻게 들었기에 현비가 아프다는 것이냐!”
종종걸음으로 황제의 뒤를 따르며 완정과 농교, 화 마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다 폐하 때문이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폐하, 마마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폐하…….”
구염락이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을 무렵, 그는 이미 침대 앞에 다가가 있었다. 익숙한 약 냄새 외에 새로운 약재의 향이 나자 구염락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변했다.
막 촛불에 불을 붙이던 농교는 황제의 차가운 얼굴에 등골이 오싹해져 감히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다. 겁이 많은 완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딱 감고 앞으로 나선 화 마마가 장서열을 깨웠다. 장서열은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호 태의가 새로 처방한 탕약에 숙면을 취하는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마, 현비마마…….”
구염락이 갑자기 분노를 억제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라!”
‘못된 노비 같으니, 주인이 잠들었는데 감히 함부로 깨우려 하다니!’
조금 전까지 구염락은 장서열이 단순히 토라진 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앉은 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구염락은 미간을 찌푸린 장서열을 바라보며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
“현비는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구염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서열의 손을 쓰다듬던 그는 돌연 그녀가 잠에서 깨어날까 걱정이 된 듯 멈칫했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완정이 눈물을 머금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폐하, 마마께서는 오늘 대전에서 있었던 그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
“노비들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노비들이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함께 꿇어앉은 농교가 이어 말했다.
“이를 알게 된 마마께서 약사발을 깨뜨리셨습니다. 오후가 되자 몸이 불편하다고 하셔서 노비들은 태의를 청했지요. 진맥을 본 태의가 약을 처방했고, 그제야 몸이 나아지신 마마께서는 겨우 잠에 드셨습니다.”
구염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겨우 계집종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쓰다니…….
“물러가라. 여기는 짐이 있겠다.”
서로를 쳐다본 세 궁녀는 조용히 몸을 낮추고 물러나갔다.
어슴푸레한 촛불이 편치 못한 마음으로 잠든 장서열을 비춰 주었다. 구염락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 평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서열이가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
구염락은 평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장서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걸 싫어했다. 또한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남자도―심지어 그것이 태감일지라도―그녀에게 접근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이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바로 이러한 마음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구염락은 기쁨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는 회임한 장서열이 충격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그녀가 그리 개의치 않을 거라 여겼으며, 감히 질투해 주기를 바라지 못했다.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던 장서열이 결국 작은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긴 속눈썹을 깜빡인 그녀가 마지못해 눈을 떴다.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구염락은 마음이 간질거렸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구염락은 왠지 자신이 없어졌지만 꿋꿋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 태의를 부를까?”
“괜찮습니다. 탕약을 마셨더니 많이 나아졌습니다.”
담담한 말투는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구염락은 마치 누군가 이불로 그의 얼굴을 막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금용의 일은… 많이 불쾌했어?”
“제가 감히 그럴 리가요!”
장서열이 구염락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식사 전이실 텐데, 신첩은 몸이 불편하여 시중을 들 수 없으니 화 마마에게 시중을 들라 하겠습니다. 배웅해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구염락은 침대 끝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즉시 진 공공에게 명했어. 설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일 당장 금용을 출궁시키라고.”
장서열은 대꾸할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구염락은 갑자기 자신감이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잠시 장서열을 바라보던 그가 홍목 침대 위에 깔린 비단 이불로 시선을 돌렸다.
“한낱 계집종일 뿐이야. 네가 화낼 가치도 없는. 아니면 날 믿지 못하는 거야?”
“…….”
“과거 그들과 함께한 시절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어. 하지만 그때의 감정은 이미 희석됐어. 내가 금용을 죽일 수 없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화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구염락의 손을 밀어낸 장서열은 안쪽으로 몸을 뒤척이며 그를 외면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구염락이 얼른 가까이 다가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열아, 정말이야. 금용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 혼자서 떠들던 그 애가 갑자기 옷을 벗었어. 나도 놀라서 정신이 멍했어.”
구염락이 서둘러 이어 말했다.
“처음에는 낯설어도 두 번째는 익숙해진다잖아. 한 번 겪어 봤으니 다음에 또 누군가 같은 짓을 하면 짐은 당황하지 않고 곧장 내팽개칠 수 있어.”
말을 마친 구염락이 아차 하는 얼굴로 이를 꽉 물었다. 아무래도 말실수를 한 것 같았다.
“서열아, 화내지 마.”
장서열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이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다독였다.
“나와 금용은 친남매나 다름없어. 이런 말도 기분이 나쁠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과거 내 곁에는 오로지 금용과 소리자뿐이었어. 나와 그들의 관계는 다른 황자, 하인 사이와는 달랐으니까.”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고 내 앞에 네가 나타났지… 그 후로 우리의 생활은 조금 나아졌어. 그때는 금용과 소리자가 내게 먹일 것을 구하느라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우리 세 사람은 자주 배를 곯았어.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도운 덕분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