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구염락의 시선이 뒤에 선 병사들을 향했다. 나이 어린 황제의 위엄은 이미 그들과 충분히 겨룰 만한 자질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대들은 어떤 걸 선택할 거지?”
권서함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허나 소신은 그 복을 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말에 오른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니 송구하고 부끄럽습니다.”
반면에 류소경은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권형께서 오늘 겸손하시군요. 몸이 불편하시면 제게 기회를 넘기시지요. 이 아우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서풍엽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장애물 넘기는 어떻습니까? 초혜전을 떠난 후로 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권서함이 하하 웃었다. 얼음을 녹일 듯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난이도를 조금 높이시지요. 한 사람당 화살은 열 발씩, 과녁은 스무 개로 제한한다면 누가 말 위의 진정한 영웅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염락이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준수한 소년이 냉엄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애경(爱卿, 황제가 신하를 칭하는 말)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이렇게 함께 즐기는 게 오랜만이니 짐도 참여하겠다. 모두들 기량을 최고치로 끌어내라. 짐에게 지는 자는 곤장을 맞을 것이다!”
순간 권서함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벌써부터 엉덩이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황제는 누구보다 군대를 통솔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특히 전장에서 천 리 길을 단숨에 달려오는 기마술의 경지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런 황제를 이겨야 한다니!
권서함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것은 불공평합니다, 페하. 차라리 이렇게 하시지요. 과녁에 화살을 한 발도 맞히지 못하는 자가 곤장 스무 대를 맞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있던 모든 장병들은 감격에 찬 얼굴로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곤장 스무 대가 대수겠는가. 황제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성과를 낼 수만 있다면 가문 대대로 내려질 큰 경사가 될 터였다.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했다. 그가 제1군 총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1열 좌측 세 번째에 선 군병들은 전부 대열 앞으로 나와 명을 기다리라고 해라.”
“예!”
구염락은 다시 뒤에 선 무장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가장 먼 곳에서 애써 존재감을 누르고 있는 서북왕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들 최선을 다하라! 짐은 예외 없이 곤장 스무 대를 내릴 것이고, 과녁에 화살을 맞힌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다. 권 한림을 제외한 모든 관원은 일각 후 말에 올라 짐과 함께 출발선에 서도록!”
장수들은 권서함을 보며 야유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저 기마술에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일각 후,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탄 서북왕은 다른 장수 한 명과 함께 경주로 위에 섰다. 경기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백여 명 정도였으나 권서함의 권유대로 화살은 한 사람당 열 발씩, 과녁은 스무 개밖에 없었다. 만일 활시위를 늦게 당기거나 화살에 힘이 부족하면 다음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곤장 스무 대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시합에 임하는 모든 이들은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모두 득의양양한 기세로 자신이 패자가 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구염락도 경주로 위에 섰다. 한 손으로 막운(莫云, 말 이름)을 쓰다듬던 구염락이 권서함에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권서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길을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자신을 보란 듯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폐하, 제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권서함을 바라본 구염락이 코웃음을 친 뒤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아픈 척은!’
징이 울리자 순식간에 백여 마리의 말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기마술을 자랑하는 전장의 영웅들은 누구도 승리를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소년 시절 섭궁개의 지도 아래 경주로를 뛰쳐나가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경기장 밖으로 물러선 권서함은 나는 듯이 달리는 군마들을 바라보았다. 물결치는 함성을 듣자 절로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권서함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찬바람에 흔들린 경기장의 깃발들이 휙휙 소리를 냈다. 백여 명 정도의 병사들은 마치 몸을 사린 독사처럼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움츠렸다. 경기장에는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 만큼 더욱 매섭고도 독사 같은 자가 있었다.
권서함은 경주 중인 구염락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서열이 키워낸 제자는 이미 스승을 넘어서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년은 어느덧 만인 위에 군림하는 제왕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궁에 가두고 다시는 남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권서함은 구염락이 그런 일을 저지른 고모를 그 자리에서 참수하지 않은 건 예상 밖이라고 생각했다.
“권 대인, 앉으시지요.”
눈치 있는 자가 의자를 옮겨왔다. 권서함은 사양하지 않았다. 물론 몸이 다 낫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권씨 가문은 여전히 태후와 권여아를 모른 척할 수 없었고, 특히 태후는 몰라도 권여아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이들 가문은 가문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굳이 여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권씨 가문의 핏줄이 냉궁에 갇힌 이상 그들을 끝까지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화살 하나가 빠른 속도로 과녁을 향해 돌진했다. 다른 화살은 도중에 노선을 빗나가 과녁을 넘어갔다. 권서함은 장서열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참석했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황제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추월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몇 발의 화살이 과녁을 향해 쉭쉭 날아갔다. 서로 다른 이유로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제외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세 발의 화살이 과녁에 박혀 있던 한 화살 끝에 동시에 박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권서함은 전혀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는 병사를 훈련시킨 구염락의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여 명의 병사는 삼만 명의 대군 중 무작위로 뽑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낙오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권서함은 대주국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안심하는 한편, 궁중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는 애석함을 느꼈다. 마음을 굳게 먹은 황제는 이번만큼은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매서운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첫 번째로 결승선에 도착한 사람은 권서함이 모르는 자였다. 검은 옷을 입은 그는 무표정한 얼굴에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황제 수하의 명장(名將)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 자를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 자들이 이기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주국이 무너질 징조였다.
연이어 결승선을 통과한 다섯 명은 전부 낯선 자들이었다. 그러나 6등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에는 어떠한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권서함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의 황제였다. 구염락은 목숨을 걸고 미래를 개척한 사람답게 매일 용상에 앉아 있어도 자신의 기량을 펼치는 데 조금도 서툴지 않았다.
7등은 서북왕이었다. 뜻밖이었지만 권서함의 예상을 그리 빗겨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 뒤를 서풍엽이 바짝 따랐고, 그 다음은 현천기였다.
권서함은 현천기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현천기는 반응하지 않고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숨어 공기처럼 사라졌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감격했으나 어떤 이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애석해했다. 먼저 들어온 스무 명 중에는 과녁을 맞히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들어온 70여 명의 사람들은 곤장을 맞았으나 20명은 상을 받았다.
상벌의 시간이 끝날 무렵, 서북왕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그의 수하 중 과녁을 맞힌 이는 단 한 명뿐이었고, 그 마저도 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지독하게 추운 서북 변방은 눈과 얼음에 뒤덮인 토지로 인해 항상 물자가 부족했다. 서북의 군사들은 적을 막아내는 동시에 농사도 지어야 했다.
과거 풍윤제가 농병일치제를 시행했을 때만 해도 서북군과 중앙군의 군력에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현 황제가 등극한 후 똑같이 농업에서 손을 뗐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군대는 점점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오늘 시합에서 서북왕의 병력은 구염락의 병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준이 형편없다는 걸 만천하에 증명했다.
서북왕 서숭산은 멀지 않은 곳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황제의 삼만 대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구염락은 잠시 서북왕을 쳐다본 뒤 다시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늘 구염락이 시합을 벌인 이유는 서북왕에게 황실의 군력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그에게 희망을 건 자들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라고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구염락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권서함을 흥미 없다는 듯 힐끗 바라본 뒤 절을 하고 있는 장수들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그런 다음 대열를 따라 돌아가며 권서함에게 물었다.
“어째서 웃는 것이지?”
권서함이 은근한 미소를 띠며 스스럼없이 말했다.
“소신은 만일 오늘 이 자리에 현비마마가 계셨다면 곤장을 맞는 자가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구염락은 권서함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에서 이를 듣게 된 서풍엽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서풍엽의 눈으로 빠르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구염락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
군중 사이에 서 있던 현천기는 황제과 이야기를 나누는 권서함을 탄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현비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은 주제에 감히 황제의 면전 앞에서 그녀를 거론하고 있었다.
‘과연 연경의 우뚝 선 대유학자답군. 권씨 가문은 역시 대단해.’
차갑게 코웃음을 치던 류소경은 문득 오늘 시합에 당자와 장서전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장서전은 자리에 있었으나 삼만 대군 중 평범한 한 명에 불과했기에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떠올리지 못했다.
구염락은 해 질 무렵 자리를 떴다. 완벽히 준비해 두었지만 결과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서풍엽이 몇 번이나 몸을 피하는 모습은 구염락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나중에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구염락은 하던 일을 멈추고 태감에게 상소문을 챙기라 명했다. 그 후 옷을 갈아입고 조로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