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폐하…….”
금용이 아리따운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눈에 맺힌 눈물방울이 또르륵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대역무도하게도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다면 일을 치르신 후 소인을 죽이십시오. 노비는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폐하를 모실 수 있는 건 노비의 영광입니다!”
무릎을 꿇은 금용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이상할 정도로 결연한 마음이 된 금용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예 다른 지방으로 떠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구염락의 눈 속에 어두운 한기가 어렸다. 별안간 허리띠를 잡아 챈 그가 더운 공기를 뚫고 한기를 발산하듯 소리쳤다.
“물러가라!”
“폐하……?”
금용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금용의 손을 뿌리친 구염락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옷을 입고 나가라.”
“폐하?”
“짐의 인내심을 시험할 셈이냐?”
이를 꽉 깨문 금용은 어깨까지 흘러내린 옷을 부여잡고 울며 조석궁을 뛰쳐나갔다. 초췌한 얼굴에서 흐른 눈물 자국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조석궁 밖을 지키던 이는 순간 속으로 당황했다.
‘성공했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던 구염락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느낌인지 콕 집어 설명할 수 없었다.
모퉁이를 돌던 소리자가 마침 뛰어오던 금용과 부딪쳤다. 금용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순간 정신이 멍해진 소리자는 이내 미친 듯이 조석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쯤 뛰던 그는 곧 바보 같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폐하께서 금용을 안으셨을 리 없지.’
황제는 말한 바는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황제가 현비를 배신하고 함부로 행동했을 리 없었다.
소리자는 쓸쓸히 전각에 돌아가 시중을 들었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혜령이 소리자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나 아플 정도로 열심히 눈을 깜빡여도 소리자는 끝내 반응하지 않았다.
조석궁의 분위기는 매우 이상했다. 다시 시중을 들러 들어온 하인들은 마치 공기 중에서 어떤 냄새라도 찾는 듯 열심히 코를 킁킁댔다. 마치 그 냄새를 찾아내면 조석궁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듯이.
조석궁에서 일어난 일은 비밀이 아니었다. 조석궁의 하인 중 약삭빠른 자가 서둘러 이 사실을 조로전의 화 마마에게 알렸다. 그녀는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수소문하기를 좋아했다.
화 마마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즉시 현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했다. 화 마마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마마, 조심하셔야 합니다. 금용이 늑대 같은 야심을 품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천한 것이 감히 출궁 후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다니요? 마마, 이건 마마를 욕보인 것입니다. 폐하를 모시지 못하는 마마께서 내명부를 독점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한 것입니다! 마마, 금용 그 계집을 결코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장서열의 안색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누구든 구염락의 침대에 기어오를 수 있었지만 금용은 아니었다. 누구든 구염락에게 지극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할 수 있었지만 이 또한 금용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시침을 들 계집을 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인내하는 구염락을 보며 그녀라고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둘 사이의 일이었다. 감히 일개 궁녀 한 명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화가 난 장서열은 탕약을 단숨에 들이켠 뒤 약사발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바닥에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었기에 약사발은 바닥에서 한 바퀴를 굴렀을 뿐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예상한 소리가 나지 않자 장서열의 기분은 더욱 불쾌해졌다.
“여봐라! 저 사발을 당장 부숴 버려라. 깨뜨리지 않으면 본궁이 직접 때려 부술 것이다!”
놀란 화 마마는 얼른 아랫사람에게 사발을 갖다 버리고 마마의 귀에 들리도록 깨뜨리라고 분부했다.
마마께서 마침내 화가 나셨다. 화 마마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마마께서는 화를 내고 질투해야 마땅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폐하는 분명 마음 아파할 것이다.
‘흥! 그때가 되면 과연 누가 재수 없게 될지 두고 보라지!’
화 마마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현비의 뒤에 섰다. 그 모습은 노여워하는 현비의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장서열의 맞은편에 있던 농교는 주인과 화 마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주인께서는 언제나처럼 양보하지 말고 그들의 기세를 눌러놔야 한다고. 만 귀인이 마마의 호의를 받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금용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감히 마마를 업신여기는 말을 하다니!’
금용은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 귀인 또한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마마께서는 결코 만만하지도, 마음씨 좋은 사람도 아니라는걸.
‘감히 마마에게서 폐하를 빼앗아가려 해? 껍데기가 벗겨질 날이나 기다려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농교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꼿꼿이 세우며 주인에게 물을 떠다 바쳤다. 현비가 숨을 고르고 노기를 진정시킬 수 있도록 농교가 주렴을 걷어 환기를 시키려 할 때였다. 갑자기 어린 계집종 한 명이 깨진 사발 조각을 들고 나타났다. 현비에게 보여주려는 게 분명했다.
어이가 없어진 농교가 잡고 있던 주렴을 손에서 놓은 채 어린 계집종을 끌고 나갔다.
“뭘 하는 게냐! 마마께서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신 것뿐인데 그걸 보여 드려서 뭘 어쩌려고! 얼른 가서 물이나 한 주전자 가져오거라. 다시는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어린 계집종은 억울한 눈으로 농교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빈 주전자를 받아 들었다.
한편, 금용의 일은 경옥전 왕 마마의 귀에도 전해졌다. 왕 마마는 눈빛 하나로 이 소문이 경옥전에 떠도는 걸 잠재웠다.
만정은 바깥에서 들리는 기척에 호기심이 인 듯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왕 마마, 무슨 일이야?”
왕 마마가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네, 마마. 신형사에서 사람을 데려가려는 모양입니다. 그들에게 은자를 쥐여 줘야 할지 의흔과 상의 중입니다.”
금족령 때문에 방에서 나갈 수 없었던 만정은 자주색 진주 주렴을 걷고 머리를 내밀어 바깥을 엿보았다.
“그래? 은자가 부족하면 말해. 내게 좀 있으니까.”
왕 마마가 흥미 없다는 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마마. 부족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만정은 조금 실망한 듯 머리를 움츠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왕 마마가 만정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 까닭은 분명했다. 이번 일은 원래대로라면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경옥전에 전해질 수 없는 소식이었다. 이런 좋지 않은 본보기를 만 귀인이 보고 배우게 할 수 없었다. 또한 다시 한번 황제를 화나게 한다면 만 귀인은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차피 만 귀인이 경옥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만 귀인을 잘 달래 궁 밖으로 내보낼 날이 올 것이라고, 왕 마마는 생각했다.
* * *
냉궁 안은 떨어지는 물방울이 얼음이 될 정도로 추웠다. 아직 호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바람에 태후의 병세는 다시 심각해졌다.
황제가 벌인 대대적인 숙청으로 인해 궁에는 익숙한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권여아는 의원을 부를 자격조차 없는 상태였다. 지난 며칠간 그녀는 직접 땔감을 줍고 물을 끓이며 홀로 태후를 돌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살면서 이런 고생은 처음이었다.
권여아는 풍한에 든 몸을 이끌고 병든 태후를 돌봤다. 그녀는 심지어 함부로 울 수도 없었다. 울기만 하면 눈물이 고드름이 되어 찌를 듯이 아팠고, 특히나 바람이 불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권여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들을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태후는 자신이 약을 넣은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만간 황제가 이 사실을 밝혀 낼 것이므로 그때가 되면 현비도 더 이상 자신들을 가둘 이유가 없다는 게 태후의 생각이었다. 태후는 어떻게든 버텨 낸다면 반드시 구출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권여아는 태후처럼 낙관적이지 않았다.
권여아는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냉궁 사람들은 이들이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는 곧 바깥에 있는 주인이 여전히 이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커지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권여아는 몸서리쳤다.
이대로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권여아는 스스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은 이곳에서 소리소문 없이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을까? 나는 바깥에 누구와도 연락하지 못하는데……. 어떡하지?’
* * *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회색 나뭇가지를 감싼 눈이 서리를 만들어 냈다. 마침내 얼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며 눈부신 장관을 연출했다.
제1군영에 위치한 널따란 훈련기지는 푸른 하늘과 큰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회색 나뭇가지는 쌓인 눈도 없이 깨끗했다. 군영 안을 울리는 살벌한 포효와 함성 소리는 바깥의 냉기와 상관없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황실의 정규군인 제1군은 오늘날 국가의 그 어떤 대군부(大军部)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그 위상이 대단했다.
제1군에는 모든 일에 죽기를 각오하고 나서는 ‘사사(死士)’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군부특종병(军部特种兵)’이 있었다. 전자가 개인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반해, 후자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등 유연한 전술로 적진을 함락시키고, 적군의 군량과 마초 보급로를 끊어 승리를 거머쥐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 구염락이 직접 이끄는 전군에는 삼만여 명의 군사가 속해 있었고, 한 명의 병사가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정도로 용맹무쌍했다.
오전에 정무를 처리한 구염락은 오후에 친히 무장(武将)들을 이끌고 제1군을 순회했다. 백국(白国)의 도발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조정에서는 문신과 무신 사이의 정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구염락은 답답한 머리를 식힐 겸 사람들을 데리고 제1군영으로 향했다.
금박이 수놓아진 망토를 걸친 구염락은 말 위에 앉아 준수하고 오만한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전쟁으로 천하를 제패하려는 욕망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차게 불어오는 찬바람조차 온몸으로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의 기상을 흩트리지 못했다.
현천기와 서풍엽, 류소경, 권서함 역시 말을 타고 구염락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뒤에는 태자 시절 구염락과 함께 전장에 나가 싸웠던 6대 장군이 있었다.
“폐하, 궁술을 겨루시겠습니까, 아니면 기마술을 겨루시겠습니까?”
제1군의 총사령관이 공손하게 말 아래 무릎을 꿇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위풍당당한 삼만의 군사가 언제라도 뛰어들 듯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