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42)화 (242/449)

제242화

소리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금용, 그만해라! 널 출궁시키는 건 현비마마가 아니라 폐하께서 내린 결정이다!”

“아니야!”

금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분노한 눈빛으로 소리자를 쳐다보았다. 이미 굴곡을 드러내기 시작한 아름다운 몸매와 소녀 특유의 발랄함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폐하께서는 우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할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궁에 들어오자 모든 약속이 깨졌어요! 어제 겨우 폐하를 한 번 찾아간 걸 가지고 지금 그 여자가 나를 내쫓으려는 거잖아요! 소리자, 정말로 그 여자가 폐하와 내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금용을 바라보던 소리자의 표정이 천천히 피폐해졌다. 소리자는 문득 처음으로 금용이 궁을 떠나는 게 그녀에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용, 폐하께서는 널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왜 여기에 남으려는 거야.”

소리자를 바라보는 금용의 얼굴에는 마음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당신까지 그런 말을 해요? 소리자, 나 금용이에요. 당신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금용이라고요! 폐하를 향한 제 마음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런데 당신마저도 나를 그런 식으로 타일러요?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예요!”

소리자는 침묵을 지켰다. 지난번 현비에게 호되게 혼이 난 뒤 금용은 똑똑하게도 방법을 달리 하는 법을 배웠다.

금용은 다시는 현비를 도발하지 않는 대신 황제에게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 또한 총명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일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금용, 내 말을 좀 들어봐…….”

“싫어요! 차라리 현비가 꾸민 일이라면 인정하겠어요!”

금용의 눈 속에 광기가 번뜩였다.

“폐하께 권비가 지극정성이었던 것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겠죠. 하지만 장서열은 뭐죠? 그 여자는 무려 혼인을 할 정혼자가 있었어요!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다른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기 일쑤였고요!”

금용이 냉소를 터뜨렸다.

“당신도 알죠? 장서열은 서풍엽이 폐하에게 ‘매부’ 대접을 받도록 했어요. 마치 대단한 은혜라도 내리는 듯한 태도로 말이에요. 그리고는 보란 듯이 폐하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상으로 내렸죠! 그 여자는 폐하께서 서풍엽이 오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금용은 아홉 살 난 구염락이 어떤 활 하나를 무척 좋아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 손에 넣을 수 없던 구염락에게 직접 활을 구해다 선물로 준 건 서풍엽이었다. 그에게 잘 보여야 장서열에게 잘 보일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장서열은 수업도 빠진 채 서풍엽을 따라 청산으로 꽃구경을 갔다.

그날 저녁, 거처로 돌아온 구염락은 서풍엽이 준 활을 산산조각 내 불태웠다.

‘그날 폐하가 느낀 고통을 장서열이 알기나 해? 그런 시혜적인 태도로 폐하를 대할 때마다 폐하께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제까짓 게 알긴 하냐고!’

금용은 눈물을 훔치며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작아진 목소리가 제멋대로 울렸다.

“소리자, 난 나갈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장서열만큼은 절대 안 돼요!”

금용은 그저 죽은 듯이 서 있는 소리자를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는 언제나 저딴 식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참고 견뎠지만 정작 가장 원하는 건 가져다주지 못했다.

별안간 입구를 막아선 소리자를 밀친 금용이 그대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깜짝 놀란 소리자가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체면도 잊은 그가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금용! 거기 서! 지금 현비마마는 회임 중이시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네 머리가 열 개라도 모자라!”

소리자는 금용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큰 소리로 소리쳤다.

“만일 현비마마께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폐하께서는 절대로 널 살려두지 않아! 여봐라! 어서 금용을 붙잡아라! 감히 폐하를 놀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얼른 붙잡아라!”

그러나 금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서 수년간 시중을 들어 온 그녀는 하인들에게 위엄을 내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황제의 곁에 있지 못했으나 누구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금용이 달리면서 소리쳤다.

“누구든 감히 날 막는 자는 일이 마무리된 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테다!”

금용을 잡으려고 나서던 하인들이 순간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비록 지금은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였지만 소리자가 그녀에게 극진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금용이 보복하겠다는 건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자는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금용이 발길을 돌려 조로전이 아닌, 조석궁으로 향하는 걸 본 소리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히 금용은 현비를 찾아가 성가시게 굴 생각은 아니었다.

현비 앞에서 알짱거리지만 않는다면 사실상 금용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옛정이 남아 있는 폐하라면 기껏해야 금용을 내쫓는 걸로 처벌을 대신할 터였다.

소리자는 복도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눈치 빠른 어린 태감이 서둘러 따뜻한 차와 손난로를 가져다주었다. 추운 겨울에 뛰어다니면서 넘어지지 않은 것만으로 하늘이 보살핀 결과였다.

금용은 조석궁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도 그녀를 막아서지 못했지만 혜령과 금서는 달랐다. 금용은 기세 좋게 고개를 치켜든 채 금서를 쳐다보았다.

“저리 비켜! 네가 새 주인을 섬긴다고 해서 내가 널 못 건드릴 것 같아? 네가 죽으면 주인은 새 노비로 바꾸면 그만이야! 네가 나를 건드리는 순간 네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새 노비를 들여야 할 거야!”

금서 역시 팽팽하게 맞섰다.

“그 전에 네가 주인을 만나볼 자격이 있는지부터 먼저 따져 볼까? 어디 재주 있으면 우리 주인께 새 노비를 선물해 보시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는 사이, 구염락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를 거칠게 내리쳤다.

“웬 소란이냐!”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금용이 금서를 밀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금용은 휘황찬란한 조석궁 대전 한복판에 털썩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무릎걸음으로 구염락에게 다가갔다.

“폐하! 정말 소인을 내쫓으시려는 건가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 주십시오! 소인은 현비마마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후궁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폐하께 충성을 다하며 실수 한 번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노비를 용서하지 않으시나요…….”

금용은 소리 없는 눈물과 함께 구염락의 다리 밑까지 기어갔다. 고개를 든 그녀는 처량하고 서러운 얼굴로 이제껏 흠모해 마지않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의 우정은 다 잊으신 건가요? 아무리 장서열이 소중하다 해도 제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대체 뭐가 부족한가요? 왜 제 희망을 끊어버리려 하세요!’

힐끗 금용을 바라본 구염락이 손을 내저어 대전에 뛰어드는 하인들을 내보냈다. 그는 혜령 또한 물러가도록 손짓한 뒤 손에 든 상소문을 내려놓았다.

구염락이 냉랭한 눈으로 금용을 바라보았다.

“금용, 짐은 줄곧 네가 사리분별이 뛰어나다고 여겼다.”

금용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낯빛으로 여전히 고개를 든 채 고집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폐하를 실망시켜 드렸군요.”

“아니. 그렇지 않다.”

금용은 본분을 지킨 편에 속했다. 다만 구염락의 머릿속엔 언제나 이전에 꾸었던 꿈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떠올릴 때마다 몹시 무섭고 불쾌한 꿈.

자리에서 일어난 구염락이 대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넌 반드시 떠나야 한다.”

“현비마마를 위해서인가요?”

금용은 이 순간 자신이 겁쟁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녀는 감히 소리자 앞에서처럼 장서열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녀는 황제가 얼마나 장서열을 끔찍이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구염락은 그날의 꿈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몹시도 불쾌한 꿈이었다.

서열이는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질투하고 큰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꿈에서처럼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려서는 안 되었다.

물론 구염락은 꿈에서 본 장면이 금용의 잘못이라기보다 자신의 마음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떨군 채 무섭게 눈물을 흘리던 금용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튀어 나가 구염락의 다리를 붙잡았다.

“폐하… 저는 폐하를 연모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폐하예요…….”

구염락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린 시절 함께한 우정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발로 걷어차 버렸을 것이다.

구염락을 껴안은 금용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황궁을 떠나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마치 누군가 심장을 꺼내 조금씩 조각내는 것만 같았다.

“폐하, 소인은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녀가 손에 쥔 용포가 눈물에 젖어 더욱 선명한 금빛으로 빛났다.

“폐하께 필요한 일이라면 소인, 궁을 나가 시집가겠습니다. 폐하께서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금용은 이제껏 한 번도 황제에게 반항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하찮은 힘 따위로는 물론 반항도 불가능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금용이 결연한 눈빛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성숙해진 몸을 드러낸 그녀가 말했다.

“폐하, 소인이 한 번만 폐하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소인이 무리한 부탁을 드리고 있다는 걸 압니다. 또 폐하께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라는 것도요. 하지만 폐하…….”

금용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훤칠한 체구와 매력적인 용모, 심지어 오늘날의 지위까지 그의 모든 것은 결코 금용이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떠나야 했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폐하… 어린 시절 소인이 폐하의 이불을 따뜻하게 데우고 물을 길어 온 정성을 봐서라도, 그리고 폐하의 목숨을 구했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노비를 안아 주세요…….”

금용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자 매끄러운 어깨가 드러났다. 대전의 따뜻한 공기로 인해 그녀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금용의 말에 서로를 위하던 과거를 떠올린 구염락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금용과 소리자를 위해 노력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럴 필요 없다.”

“폐하, 절 원하지 않으세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소인은 그저 폐하께서 가지고 노는 물건일 뿐입니다! 소인은 출궁 후에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폐하, 소인은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폐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소인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금용은 진심을 다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회임 중이었고, 태아가 불안정한 상황이라 황제를 모실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왜 참고 견뎌야 한단 말인가.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자 금용이 어렸을 때부터 바라 온 그녀의 주인이었다.

장서열은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모욕과 수치를 견딜 수 없을 테지만 금용은 달랐다. 그녀는 오직 주인만 알았다. 주인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 시중을 드는 그녀의 본분이었다. 어렵사리 오늘날에 이른 그녀의 주인이 도대체 왜 사내의 욕구를 참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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