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서북왕이 생모를 빌미로 폐하를 건드리는 목적이 뭘까……. 과거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경고? 아니면 폐하의 생모가 그의 손안에 있으니 얌전히 굴라는 암시?’
소리자는 더는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든 황제는 누군가 감히 자신을 위협하려 드는 걸 질색했다. 그런데 생모를 내세워 협박을 하려 들다니.
“몇 시지?”
“술시(戌时, 저녁7시~9시)이옵니다, 폐하.”
소리자의 말에 답하듯 궁 안의 촛불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일 년 중 가장 추운 섣달이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대전 안을 대낮처럼 환히 밝힌 촛불은 오히려 바깥을 칠흑 같이 어둡게 보이게 했다.
구염락은 그대로 잠시 더 머문 뒤 조로전으로 향했다.
새하얀 눈을 비춘 달빛이 색다른 한기를 자아냈다. 구염락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어떠한 장식도 허용치 않은 손은 길고 단단했다. 그는 장서열에게 어떻게 모친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태자로 봉해지기 전, 황후의 의도였든 스스로의 호기심에서였든 구염락은 국암사에 방문해 모친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만남은 여러 차례 지속됐다.
사람들에게 구염락의 모친은 출신이 매우 비천할 뿐만 아니라 심성이 나약하여 남에게 잘 휘둘리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구염락 역시 당시 모친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국암사를 찾아갔을 때, 모친은 때마침 뜰 안의 작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구경을 하러 나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홀로 그곳에 앉아 바쁘게 빨래를 했다. 평범한 비구니 복장을 한 그녀는 빨래를 하다 손으로 이마를 훔치기도 하고 다시 물을 퍼 옷을 빨았다.
차분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띤 그녀는 구염락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편안하고 한가로운 가락은 오랜 기간 불안에 떨었던 그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소문처럼 요염하거나 남자를 홀릴 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여인들보다 더 연약해 보였으며,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을 때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녀가 쳐다보았을 때, 구염락은 모든 게 지워진 그녀의 눈 속에 오직 자신만이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구염락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날을 시작으로 구염락은 자신에게도 자상한 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어머니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봐 주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발 벗고 나서 주고, 아플 때는 눈물을 흘려 주고, 자랑스러운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귀여워해 줄 어머니가.
그날 이후 구염락은 다른 아이들처럼 모친을 그리워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자상한 여인이었으며 그간 꿈꿔 왔던 모습보다 훨씬 완벽했다.
다시 만난 날, 그녀는 구염락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과일을 따 주었다. 그녀는 아들의 뒤에서 몰래 울었다. 이어 그녀는 황후의 말을 잘 들을 것을 당부하고, 떠나는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아들을 꼭 껴안고 놓아주던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숭산을 찾거라.”
교련(轿撵, 지붕 없는 가마 모양의 탈 것)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염락의 기분도 모처럼 요동쳤다. 오늘날 제왕의 자리에 앉은 그를 감히 누가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서숭산이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서숭산이 모친을 빌미로 협박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다만 모친을 궁에 들였을 때 그가 또 다른 계략을 꾸밀 수도 있다는 것은 염려스러웠다.
현재 장서열은 회임 중이었고 상태가 좋지 못했다. 구염락은 이를 두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장서열이 아이를 낳은 뒤 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모친을 입궁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일도 아니었다.
등불이 장사진을 이루며 다가오자 완정이 앞으로 다가와 절을 올렸다.
“폐하, 마마께서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구염락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조로전에 드는 그에게 완정은 언제나 같은 말을 건넸다.
장서열이 정말로 문 앞에서 그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리 없었지만 계집종이 말하는 정성이 갸륵해 구염락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오늘 몸이 불편하지 않았던 장서열은 정말로 문 앞에서 구염락을 맞이했다. 그에게서 망토를 받아 든 그녀가 이를 화 마마에게 건넸다. 순간 마음이 훈훈해진 구염락이 장서열을 부축하며 연탑으로 다가갔다.
“몸조심하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밖이 추우니 굳이 마중 나올 필요 없어.”
이어 몹시 작고 연약한 목소리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호 태의에게 물어 보니 괜찮으면 걸어도 좋다고 했어요. 벌써부터 침대에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만 있으면 몇 달 뒤에는 어떡하라고요?”
장서열이 웃자 구염락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사실 뭐가 웃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기분이 좋다면 그도 좋았다.
“조 부인을 입궁시켜 보살핌을 받는 게 어때? 그러면 나도 안심이 될 거야.”
구염락의 부축을 받으며 연탑 위에 앉은 장서열이 그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어머니가 궁에 들어오면 훈계를 늘어놓는 침방울에 빠져 익사당할 거예요.”
물론 실제 이유는 황제가 태후를 연금시키고 총애하는 후궁의 모친을 입궁시키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배은망덕의 전형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관없어.”
그러나 구염락은 유언비어를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제 어머니 역시 남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어머니야말로 홍촉의 시중이 필요해요. 게다가 가문에 들어온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리에 없다면 아마 올케도 곤란할 거예요. 저에게는 호 태의와 당신이 있으니 어머니까지 오게 할 필요는 없어요.”
장서열을 반쯤 껴안은 구염락이 사랑을 표하듯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조 부인을 그리워할까 봐 그렇지. 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장서열이 그의 손을 톡 치며 미소를 머금었다.
“전 지금 매우 편안해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정말로 원하는 게 생기면 말할 게요.”
“…….”
“그리고 당신에게 확실히 말해 둘 게 있어요. 만정의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 당신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그 말에 구염락이 장서열을 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가 신을 벗자 농교가 황급히 앞으로 나와 도우려다 이내 그의 눈길에 제지당했다. 구염락은 홀로 신을 풀기 시작했다.
“후에 내가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고 탓하지 마. 만정은 생각을 바꿀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어.”
“그럼 제가 궁에서 평생 그녀를 돌보겠어요.”
장서열은 흘러내리는 구염락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주면서 그가 복잡한 신발 끈을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두 남편을 섬기지 않겠대요. 만정이 그렇다면 나도 달리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그녀를 못살게 굴면 안 돼요. 아무리 만정을 총애하지 않는다 해도 가서 구슬려야 한다는 소리예요.”
신발을 벗은 구염락이 연탑 위에 다리를 올렸다. 그가 금색 꽃이 그려진 연탑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자 부드러운 머리칼이 갈색 연탑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을 감은 구염락은 한쪽 팔을 이마 위에 얹은 채 단단한 팔로 장서열을 품에 안았다. 거부할 수 없는 향기가 줄곧 장서열의 마음속에서 응석을 부리던 남자아이를 저 멀리 날려 보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잠시 멍해진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뻗으려던 손을 자기도 모르게 거두었다. 그녀는 왠지 그가 조금 두려웠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장서열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아니면 천하에 한가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듣자 하니 오늘도 웬 미인이 당신 곁에 있게 해 달라며 꿇어앉아 빌었다지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프게 운 데다 나중에는 과거의 추억까지 들먹이며 충심을 표했다던데요.”
말을 마친 장서열이 매서운 곁눈질로 구염락을 흘겨보았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그가 두 손을 뻗어 부드럽게 장서열을 껴안아 품에 쏙 넣었다.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군.”
장서열은 순간 구염락이 평소와 매우 다르다는 걸 느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그럴 리가.”
구염락은 장서열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천천히 새끼손가락에 감았다가 다시 푸는 그의 눈빛은 반짝거렸고, 입술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서열은 문득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자 그녀는 무력한 슬픔에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전 구염락의 맹목적인 모습이 장서열을 불편하게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사랑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서열에게 익숙한 건 지금의 구염락이었다. 심지어 너무 익숙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구염락은 비록 여인을 사랑하더라도 정도를 지켰고, 결코 맹목적으로 굴지 않았다. 장서열은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구염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시각각 성장하며 더욱 특별하고 강인해졌다.
그렇게 그의 무대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무대는 내명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녀가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여인들끼리의 하찮은 수작뿐이었다.
장서열은 자신을 향한 구염락의 사랑이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 믿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구염락의 미래를 언제까지고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그를 다루는 게 버겁다고 느끼는 지금처럼.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녀는 영원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길 바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 상황을 좌우할 능력을 갖추어 모든 일에 합당한 결말을 맺고, 만정의 행복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죽어야 할 자들을 마땅히 처단하는 일이었다.
구염락이 옆으로 몸을 돌렸다. 길게 뻗은 눈이 발산하는 권위는 아무리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도 숨길 수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무슨 생각해?”
장서열을 더욱 가까이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그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서열아, 넌 정말 향기로워.”
구염락은 그녀의 지나친 완벽함에 절로 수줍음을 느꼈다. 장서열은 순간 풋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시간을 초월하는 매력이 있다니까.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다니.’
장서열은 잠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렸다. 하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그녀가 이제껏 없던 평온한 태도로 물었다.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봐요. 누가 당신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죠? 본궁이 가서 혼을 내 주겠어요. 누구도 다시는 우리 폐하를 못살게 굴지 못하도록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