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돌아가면 조금 이따가 왕 마마를 내게 보내.”
만정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왕 마마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럼 지금 두고 갈게요.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왕 마마와 함께 돌아가도록 해.”
만정의 곁에는 왕 마마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자칫 흑심을 품은 자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왕 마마는 그대로 울고만 싶었다. 굳이 다시 오지 않아도 현비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현비는 그녀에게 만정을 보호하라고 당부하려는 것이다. 최소한 남에게 속아 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현비의 명을 거절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차피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왕 마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절을 하며 말했다.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황실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소인이 반드시 만 귀인마마를 잘 보살피겠습니다.”
물론 왕 마마는 만정을 잘 보살펴서 그녀가 일찍 궁을 떠나게 만들 생각이었다.
왕 마마는 자신이 고생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경옥전에서만 해도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주인을 조금씩 깨우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현비는 만 귀인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만 귀인이 그녀의 뜻을 거역하고 심지어 호의를 악의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현비는 화를 내지 않았다.
현비는 대체 만 귀인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만 귀인은 고집불통이었다. 왕 마마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황제는 만 귀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만 귀인은 눈앞에 차려 준 밥상을 걷어찼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왔다면 왕 마마는 곧바로 권씨 가문의 권 공자와 맺어 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장서열이 살짝 웃었다.
“왕 마마, 그럼 잘 부탁하네.”
왕 마마의 표정은 변함없이 엄숙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마. 이것은 노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정은 기뻤다. 궁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만정은 장서열이 마음을 써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황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곁에 남아 아주 가끔이라도 그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만정은 여전히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에 커다란 미소를 띠고 얼굴에 남아 있던 슬픈 기색을 모두 지웠다.
“언니, 아직도 아파요?”
장서열이 배를 어루만지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좋아졌어. 천천히 보양을 해야 해. 병이 낫기 위한 과정이야.”
“그렇군요.”
사실 만정은 대답을 하긴 했으나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 만져 봐도 돼요?”
왕 마마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비의 복중 태아는 아직 위험한 상황이었다. 만 귀인이 만진 뒤 만에 하나 갑자기 태아에게 문제가 생겨 오늘 밤 죽는다면 누구의 잘못이 되겠는가.
왕 마마는 진땀을 흘리며 그저 천진난만할 뿐인 만 귀인을 과연 설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심에 빠졌다. 성숙한 이에게 도리를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순진한 아이에게 도리를 설명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왕 마마는 난감했다. 조금 전 현비와 나눈 약속은 상당한 난이도를 요할 듯했다.
장서열은 웃으며 가만히 만정의 손을 치워 주었다. 만정이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만약 태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만정은 뜻하지 않게 불리한 일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손은 씻었니? 오랫동안 밖에서 울고불고하다 왔으면서 씻지도 않은 손을 뻗으려 하는구나.”
만정이 헤헤 웃으며 얼른 손을 거두었다.
“그럼 안 만질게요. 언니, 몸조심하세요. 전 평소에 언니를 보러 올 수 없으니 언니가 항상 조심해야 해요. 아직 금족령이 내려져 있어서 전 이만 갈게요. 제가 경옥전 밖으로 나온 걸 알면 폐하께서 분명 화내실 거예요.”
“그래.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히 가.”
“네.”
조로전을 나온 만정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역시 서열 언니가 자신의 편이 되어줄 줄 알았다. 만정이 아는 서열 언니는 서풍엽을 좋아했고, 폐하에게는 마음이 없었다.
만정은 자신이 장서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에 그녀도 분명 자신이 떠나는 걸 아쉬워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만정은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빌려 황제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자 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황제가 좋아하는 여인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만정은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만정을 본 왕 마마는 바깥 날씨처럼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만 귀인은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온 탓에 자신에게 내려진 금족령이 어떤 의미인지 잊어 버린 걸까?
어화원 외곽을 걸어가던 만정이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외벽 바깥에 핀 매화를 가리켰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도 키웠었는데! 의흔, 저것 좀 봐. 매화가 피었어! 얼른 가서 보자.”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인 의흔은 곧장 ‘네’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녀 역시 벌써 닷새 가량 경옥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바깥 경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어화원에는 정식 주인도 없으니 몰래 가서 본다 한들 큰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왕 마마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왔다.
“귀인마마.”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흔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지금 금족령이 내려진 몸입니다. 어서 소인과 함께 돌아가시지요. 만일 신형사(慎刑司)에서 금족령이 내려진 동안 마마께서 함부로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에는…….”
만정은 왕 마마의 말에 즉시 경옥전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입으로는 구시렁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신형사가 뭐가 무서워? 서열 언니가 있는데! 언니는 결코 날 벌주지 않을 거야!”
왕 마마는 대꾸 없이 겸손하게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결코 공손하지 못했다.
만 귀인을 출궁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은 황제 폐하였고, 여차하면 폐하가 그 일을 진행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이미 현비로부터 명을 받은 왕 마마는 만 귀인에게 미움을 받을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의흔을 포함한 네 명의 궁녀들은 얼른 몸을 움츠리고 몰래 왕 마마를 쳐다보았다. 그녀들은 조금 전 자신들의 경솔한 행동을 왕 마마가 기억할까 봐 두려웠다.
* * *
현천기는 관지례가 대령해 올린 각양각색의 미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상황을 매우 즐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향루에서 가장 비싼 별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모든 여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현천기는 그중 장서열의 동생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한 번 훑어보았으나 그가 보기에 미인은 없었다.
어차피 여인들 중 장서열의 동생이 있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관지례의 첩실인 그녀가 억지로 여기 끌려나온 것을 달갑게 여겼을 리 없었다. 나중에 죽네 사네 소란을 피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 또한 애초에 현천기에게 지명당하지 않고 일찍 돌아가는 것을 상책이라 여길 것이다.
관지례는 현천기의 태도에서 그가 만족하지 못했다는 걸 눈치챘다. 관지례가 즉시 공손하게 다가갔다.
“현 대인, 혹시…….”
현천기는 관지례가 이토록 빠르게 많은 미인을 모은 것을 보면서 그에게 나름의 연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관지례는 적어도 미인이 모자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최근 황제가 누리는 행복을 떠올리던 현천기가 문득 관지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눈짓했다. 뜻밖의 행동에 깜짝 놀란 관지례가 황급히 다가왔다.
“현 대인, 분부할 것이 있으십니까?”
현천기가 무엇인가를 은밀히 속삭였다. 그의 말에 관지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리 하겠다고 즉시 맹세했다.
정계에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듯 재야에는 자유분방한 풍류가 있었다. 그 정도의 미인을 전부 물린 것으로 보아 현천기는 꽤 눈이 높은 게 분명했다. 관지례는 어떤 수준의 여인을 데려와야 현천기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깨달았다.
관지례의 대답에 현천기가 기분이 좋아진 듯 말했다.
“절세미인 말고…….”
현천기가 제법 흥이 오른 웃음을 지었다.
“남자를 좀 알고 눈치 있게 구는 사람을 데려와. 반드시 남자를 홀릴 줄 아는 여인이어야 해. 한 번만 봐도 바로 마음이 동할 정도로.”
현천기가 관지례를 향해 히죽거리며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알지?”
관지례는 한겨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 대인의 기대를 결단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현천기가 손에 든 부채로 관지례의 머리를 톡톡 쳤다. 일순간 그의 표정이 음산해졌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네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
“예, 예, 대인.”
관지례는 현천기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나선 것을 몹시 후회했다.
* * *
장서영은 사람이 가득 찬 마차 안에서 아랫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꾹 참고 앉아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이 장서영을 툭툭 쳤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디서 왔어요? 저는 전씨 가문에서 나온 시첩(侍妾, 귀인의 시중을 드는 첩)이에요. 평소 중요한 거물이 찾으면 우리 나리께서는 저를 내보내죠. 당신은요?”
그 말에 장서영은 더욱 난감해졌다. 대부호와 귀족 집안에서 손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시첩을 키운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좌상 집안의 서출 자녀인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게 접대를 시킬 줄이야!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라고!’
장서영이 자신을 무시하자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은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얼굴이 좀 반반하기에 말이라도 걸어 줬더니 뭐 얼마나 대단하고 고상한 계집이라고 사람을 무시해? 너도 몇 번 더 나와 보면 알게 되겠지. 귀하신 나리들은 우리를 첩으로 삼을 생각조차 없다는걸! 너는 예외일 거라 생각했다면 꿈 깨시지! 너희 나리가 널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손님이나 접대하라고 밖에 내보냈겠니?”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녹색 옷을 입은 여인에게 짐짓 눈총을 줬다.
“왜 그래요. 수줍어서 낯을 가리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아요. 앞으로 자주 만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죠.”
“맞아요. 연경 남자들의 취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우리 녹주(绿珠) 언니 아니겠어요? 앞으로 새로 온 동생도 녹주 언니께 가르침을 청할 날이 올 거예요.”
‘녹주’라고 불린 여인이 가슴을 쭉 내밀고 자랑스레 말했다.
“너희 말이 맞아. 너희가 시중 든 남자들 중에 내가 안 겪어 본 자가 어디 있겠니. 그런데 방금 만난 사람은 대체 누굴까? 관 도련님께서 그자 앞에서 감히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던데. 그렇게 젊은 사람 앞에서 말이야. 안타깝게도 우리 중 누구도 그 사람에게 선택받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