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엷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한 시선으로 만정을 쳐다보던 왕 마마가 마치 딸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마마, 이 노비의 말을 들으세요. 저는 마마께서 궁에 남는 것이 진심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왕 마마는 진심을 다해 만정을 타이르고 있었다. 그녀는 만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만정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고자 했다. 이는 과거에 모셨던 귀비(贵妃)에게도 드러내 본 적이 없는 진심이었다.
“싫어! 난 이미 폐하와 혼인했으니 설령 평생을 홀로 외롭게 지내야 한대도 다른 사람과 다시 혼인하지는 않을 거야! 두 번이나 혼인을 하다니, 내가 뭐가 되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왕 마마는 더는 만정을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에게 기대어 있던 만정을 정중하게 밀어내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선 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바닥에 짚은 그녀가 이마를 땅에 조아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귀인마마, 그토록 궁에 남길 원하신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마의 좋은 자매인 현비마마를 찾아가십시오. 현비마마께서는 언제나 마마를 돌봐 주시니 분명 마마의 부탁을 들어 주실 겁니다.”
“…….”
“또한 귀인마마. 불행히도 소인, 오늘 아침에 넘어져 다리를 접질렸습니다. 감히 간청하건대 소인이 오늘부터 복수원(福寿苑)에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복수원(福寿苑)은 명망 있는 노 공공이나 노 마마들이 궁을 나가고 싶어 하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노후를 보내는 곳이었다. 나이가 찼어도 힘이 없는 하인들은 그곳에서 노년을 보낼 은혜를 입지 못했다.
왕 마마는 이미 과거에 모셨던 귀비로부터 진작 그 영광을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복수원에 가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위험을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만약 만 귀인이 출궁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두 번 혼인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뿐이었다면 왕 마마는 만 귀인의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조금씩 만 귀인을 타일러서 생각을 고쳐먹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다음 왕 마마는 만정이 궁 밖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도왔을 것이다. 이는 왕 마마에게 공을 세울 기회와 영예를 한꺼번에 안겨줄 터였다.
하지만 만 귀인이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건 위험했다. 왕 마마는 여태껏 곁에서 황제와 그의 여인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사랑을 지속하는 비빈을 본 적이 없었다.
이처럼 만 귀인이 계속해 잘못된 길을 걷고자 한다면, 결국 후에 허점을 공격당하고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 또한 만 귀인의 몫이었다. 그때가 되면 왕 마마의 명성 또한 만 귀인과 함께 추락하게 될 것이다.
만정은 나이가 어려서 훗날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왕 마마는 경옥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왕 마마는 결코 모성애가 넘치는 착한 늙은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만정은 왕 마마의 정식 주인도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평생 만정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맞아 죽을 각오로 간언할 필요가 없었다.
왕 마마는 더는 만정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의아한 눈으로 왕 마마를 쳐다보던 만정은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쓸쓸하게 말했다.
“경옥전은 이제 왕 마마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줄 수 없겠지. 떠나려는 것도 당연해. 이따 내 화장대에서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장신구를 가져가. 내가 마마에게 주는 이별 선물이야.”
만정은 방 한편에 놓여 있던 의자 위에 엎드려 더욱 처절하게 울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친 뒤에도 왕 마마는 여전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노비 신분인 그녀가 주인에게 작별을 고하며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었다.
만정은 지금껏 이렇게 실패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노비조차 곁에 남으려 하지 않다니.
‘폐하께서는 왜 내게 이런 모욕을 주는 걸까? 나는 단지 그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게 잘못이란 말이야?’
만정은 계속 울었다. 만신창이가 된 마음속으로 끝도 없는 슬픔과 분노가 들이찼다. 그녀는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줄곧 착하게 굴었는데, 대체 그는 왜 난감하게도 자신을 내쫓으려는 걸까!
왕 마마는 노비로서 본분에 충실하기 위하여 주인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가 주인을 포기한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이대로 만 귀인이 저녁까지 울겠구나 생각할 무렵, 조로전에서 전갈이 도착했다. 현비의 일등 궁녀인 농교는 현비가 만 귀인을 청했음을 알렸다.
농교의 공손한 표정을 확인한 왕 마마는 원래도 없었던 기대를 더욱 철저히 버렸다. 폐하의 말처럼 만 귀인을 궁에서 내보내고자 한 건 전적으로 그의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장서열은 혹시 만정이 떠나고 싶지는 않은지 그 진심을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만약 장서열이 ‘물어보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면 구염락은 즉시 만정을 내쳤을 것이다.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직접 이야기를 시킨 까닭은 그에게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만정이 더 이상 희망고문을 당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려 말하는 것도 귀찮았던 구염락은 곧장 만정을 내쫓고자 했다.
잠시 후, 네 궁녀의 도움으로 치장을 마친 만정은 왕 마마의 시중을 받으며 퉁퉁 부은 눈으로 조로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농교가 줄곧 설명했다.
“현비마마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바깥출입을 못하고 계십니다. 아니었다면 마마를 보러 직접 경옥전으로 가셨을 거예요. 이렇게 오시라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귀인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왕 마마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일은 현비가 만 귀인을 부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설마 현비가 황제에게 만 귀인과 시침을 들라고 말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황제의 은총을 마다하는 게 아닌 이상 현비 또한 그럴 일은 없었다.
“현비마마, 만 귀인이 도착했습니다.”
소수자(小树子, 태감 이름)의 기세 좋은 목소리가 조로전 대청에 울려 퍼졌다. 처음 외치는 보고라 소수자는 조금 긴장했다.
장서열은 연탑 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손가락에 호갑(护甲)도 끼우지 않은 그녀는 머리 위에 꽂은 나무 비녀를 제외하면 어떠한 치장도 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단아하고 우아했다.
장서열을 본 만정이 고개를 숙였다. 또 다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열 언니…….”
입을 열자마자 목이 멘 만정을 보며 장서열이 손을 저어 모든 이들을 물러가게 했다. 화 마마는 만정을 힐끔 쳐다본 뒤 물러났으나 왕 마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장서열은 만정이 왕 마마를 물리지 않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잠시 한숨을 내쉰 그녀가 어린 시절처럼 허물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오후 내내 울었으면서 지치지도 않아?”
눈물을 머금고 장서열을 바라보던 만정이 그 말에 가련한 모습으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울기 시작했다.
“언니… 폐하께서 저보고 궁을 떠나래요. 언니 생각이죠? 그렇죠?”
“그래.”
장서열은 격식을 따지지 않고 만정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랑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한 올 한 올 어루만지던 장서열이 이어 말했다.
“어젯밤에 폐하께 여쭤봤어. 경옥전에 가서 주무시지 않겠냐고…….”
부드러운 손길로 만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장서열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장서열의 표정에 만정은 그가 듣기 좋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 겨우 그것 때문에 저보고 궁을 나가라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폐하께서 계속 널 찾지 않으시면 네가 궁에서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장서열은 만정의 결정에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정확한 상황을 일깨워 준 뒤 만정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만약 만정이 끝까지 궁에 남기를 원한다면 그녀는 최선을 다해 만정을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만정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정아, 너는 좋은 규수야. 평생을 궁에서 허비하는 게 아깝지 않니? 물론 난 폐하를 네게 양보할 수 있어. 하지만 생각해 봐. 일단 폐하를 한 번 모시고 나면 넌 두 번째, 세 번째를 원하게 될 거야. 그리고 결국 그의 눈 속에 네가 있기를 바라게 되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생에서 만정은 만소의 일로 그렇게 화를 내지도, 다른 여인이 총애 받는 모습에 나날이 여위어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서열은 훗날 구염락에게 분명 다른 여인이 생길 거라 믿었다. 여인이 많아진다는 건 시비가 생긴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후궁에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만약 나와 충돌이 생긴다면, 그래서 네가 한 번이라도 실수로 다른 이에게 이용을 당하게 된다면 어떡할래? 이런 식이라면 넌 노년에 괄시당할 일을 걱정하면서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걸 지켜봐야만 해. 그리고…….”
만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일 없어요. 전 언니에게서 폐하를 빼앗지 않을 거예요……. 언니랑 어떠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을 게요. 언니,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절대로 폐하를 빼앗지 않겠어요. 제발 저를 내쫓지 마요……. 네? 언니, 제발요…….”
장서열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진퇴양난이었다. 만정은 지금 철없는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서열 언니, 만일 언니가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전 언니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찧고 죽을 거예요. 우리 만씨 가문은 비록 권씨 가문만큼 대단한 명문대가는 아니지만 예의와 염치는 알아요. 한 여인이 두 남편을 섬길 수는 없어요!”
장서열은 잠시 멈칫했다. 살짝 굳었던 손끝이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씁쓸했다.
“좋아. 그럼 왕 마마와 함께 돌아가도록 해.”
장서열은 가능한 한 만정에게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만정이 궁에 남기를 원한다면 남게 해 주고 싶었다.
만정이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안심하고 계속 경옥전에서 지내도록 해.”
만정의 얼굴에 즉시 눈부신 광채가 빛났다.
“고마워요, 언니! 정말 고마워요.”
장서열은 비로소 웃게 된 만정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만정의 웃음은 어린 시절처럼 예뻤다.
만정은 눈물을 훔치면서 드디어 난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출궁을 바라는 게 비단 장서열뿐만이 아니라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다. 만정은 구염락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대로 궁에서 떠나지만 않으면 언젠가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