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구염락은 궁녀가 가져온 차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붉어진 눈을 한 만정이 의흔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대청으로 나왔다. 황제를 본 순간 만정은 어디가 아픈지도 잊은 채 인사도 올리기 전 울음부터 터뜨리고 말았다.
만정은 배꽃 같은 비단에 커다란 해당화가 수놓아진 상의를 입고 있었다. 얼음처럼 투명한 비단 위에 작은 해당화가 수놓아진 치마는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대전의 풍경과 어우러져 유난히 사랑스러웠다. 만정이 울음을 터뜨리자 하인들 중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마치 만정과 자신의 사이에 가림막이라도 쳐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청에는 단지 청령석과 자색 진주 사이로 울리는 만정의 흐느낌만이 구슬프게 울릴 뿐이었다.
왕 마마가 몰래 황제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애석해 마지않는 상황에서 황제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오히려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왕 마마는 결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감히 황제를 보지 못한 만정은 그저 슬퍼할 뿐이었다. 이렇게 울고 있는데도 그는 자신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엄연히 황제의 비빈이었다. 입궁하고 지금까지 무려 두 달이 지나는 동안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버텨 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만정은 계속 울었다.
결국 구염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끝없는 만정의 울음을 들어 줄 시간도,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다 울었으면 일어나서 말을 해라.”
만정은 멈칫했다. 이미 눈물은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겨우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만정은 아주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 왔다. 예전부터 그와 혼인하기를 바라면서 그의 곁에 있기 위해 그리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리 무섭게 굴 수가 있단 말인가.
예전에 그는 너무나 다정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고개를 든 만정의 눈에 잘생긴 얼굴을 덮는 차가운 표정이 들어왔다. 위엄에 찬 그 모습은 하필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일순간 만정의 눈과 뺨을 한꺼번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전보다 훨씬 잘생기고 성숙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절로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만정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그가 오늘 이렇게 경옥전에 온 것은 분명 자신을 생각했다는 뜻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만정은 괜히 성질을 부려 그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을 정한 만정의 두 뺨에 어색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았다.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도 만정이 하면 천진난만한 느낌이 들었다.
만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록 마음을 정했지만 여전히 억울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만정은 구염락에게 가까이 다가가 절을 올린 뒤 오랫동안 방치되어 토라진 소녀처럼 입을 열었다.
“폐하, 식사하셨어요? 신첩이 얼른 식사를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그만.”
만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그는 사족 없이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다. 대전 안을 메운 하인들을 둘러보던 구염락이 말했다.
“왕 마마를 제외하고 모두 물러가라.”
이는 왕 마마를 포함하여 소리자 등 측근들도 자리를 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사람을 내보냈다는 건 모든 하인들이 알고 있듯 이제부터 나눌 이야기를 절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했다.
하인들이 모두 물러가자 구염락은 만정을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짐이 오늘 너를 찾아온 이유는 네가 짐과의 혼사에 만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탓이다. 짐은 현비 외에 다른 여인을 볼 생각이 없다. 하여 짐은 현비와 상의한 끝에 너를 위해 널 다른 이와 혼인시켜 주려고 한다.”
놀란 만정이 비빈의 예절도 잊은 채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폐하, 싫습니다! 전 폐하의 후궁인데 어찌 다른 이와 혼인을 할 수 있겠어요!”
구염락은 만정의 뜻을 무시하고 다시 딱 잘라 말했다.
“짐은 네게 중병이 들었다고 공표한 뒤 조만간 네가 급사했다고 알릴 계획이다. 너는 다시 만 씨 가문으로 돌아가 가문의 조카딸 신분으로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넌 여전히 만 씨 가문의 아가씨로 어떠한 손해도 보지 않는다.”
만정은 황제가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궁에 들어온 황제의 여인이었다. 그런 자신을 어떻게 내보내려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정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큰 눈으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상심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폐하… 대체 신첩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리도 저를 싫어하시나요? 그런 방법까지 생각해 내 신첩을 모욕하시다니요. 그 정도로 신첩이 보기 싫으신가요? 만일 신첩이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렀다면 차라리 신첩을 죽여 주세요. 제가 어떻게 수치도 모르고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갈 수 있겠어요!”
구염락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수치도 몰라? 이건 너를 위한 일이다. 정말 늙어 죽을 때까지 궁에 있고 싶은 게냐? 짐은 네게 머물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부리지 마라. 널 내보내는 건 좋은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다.”
만정이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구염락은 여전히 따뜻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 주인이 자신이 아닌 서열 언니였을 뿐이다.
만정은 이제 구염락이 장서열에게 보여 주는 모습의 반만큼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구염락이 한가로운 시간에 자신을 떠올려 주기를, 조금이라도 따스하게 대해 주기를,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만정은 자신의 요구가 그리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열 언니는 이런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걸까? 이런 날 궁 밖으로 내치려 하다니!’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만정이 큰 눈으로 구염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고운 자태 속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폐하, 신첩이 폐하를 사모하는 것을 용서하세요! 신첩이 폐하를 흠모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신첩이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폐하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폐하와 비교할 수 있는 남자는 없습니다!”
만정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부디 서열 언니에게 말해 주세요. 저는 언니의 적이 아니라고요. 또한 저를 위해 주실 필요 없어요. 폐하의 총애를 받을 수 없다 해도 저는 죽을 때까지 궁에 남겠습니다. 저는 영원히 경옥전 밖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부디 제 부탁을 들어 주세요. 서열 언니에게 제 말을 전해 주세요!”
말을 마친 만정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만정은 연달아 머리를 찧으며 부디 그가 은혜를 내려 주기를, 계속해 궁에 머물 수 있기를 빌었다.
이를 바라보는 구염락의 미간에 점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호의가 나쁜 계략으로 변질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장서열과의 친분만 아니었다면 구염락은 당장 만정을 내치고 밖에서 객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하라!”
구염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열이가 아니라 짐의 뜻이다! 짜증나게 굴지 말라는 말을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을 터, 그렇게 궁에서 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대신 행여라도 후에 짐이 네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말라!”
말을 마친 구염락은 소매를 뿌리치고 자리를 떠났다.
이상한 아이였다. 황제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대로 원망도 후회도 없이 궁에서 늙어 죽겠다니.
필시 거짓말이었다. 만정은 후에 황실에서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했다며 원망할 것이 분명했다.
‘좋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팠으니 죽게 만들어 주지.’
“왕 마마는 네 주인을 잘 감시하라!”
왕 마마는 순간 안 좋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려는 만정에게 달려가 그녀의 입을 막고 떠나는 황제를 배웅했다.
그가 떠난 후 경옥전의 문이 닫히자 왕 마마는 그제야 만정의 입을 막은 손을 풀어 주었다. 슬픔이 극에 달한 만정은 언제나 무섭게 여기던 왕 마마의 품에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왕 마마, 대체 내가 뭘 잘못했어? 폐하는 왜 나를 원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리 못생겼어? 아니면 내가 너무 철없이 굴어서 페하의 눈에 들지 못한 거야?”
비통하게 흐느끼는 만정에 의해 왕 마마의 어깨가 금세 젖어들었다.
“난 떠나기 싫어… 떠나기 싫다고…….”
왕 마마가 손을 뻗어 만정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탄식했다. 주인은 잘못한 게 없었다. 하필 자신의 여인 외에는 누구도 아낄 줄 모르는 황제를 만났을 뿐이다.
비록 조로전의 현비만큼 아름답지는 않으나 만 귀인은 분명 미인이었다. 왕 마마의 눈에도 이토록 어여쁜 만 귀인을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단 한 사람, 황제를 제외한다면.
‘하필이면 폐하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이것이 바로 만 귀인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최근 현비에게 닥친 살해 위협을 경험한 터라 특히나 후궁에 좋은 감정이 없었다.
만에 하나 여기서 만 귀인이 소란을 피운다면 그는 아마 그녀를 가만 두지 않으리라. 이는 다른 속셈을 품고 궁에 남는 거라고 여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비록 만 귀인이 지금은 현비의 보호를 받고 있으나 만약 황제가 그녀를 눈엣가시로 취급하여 제거하려 한다면 거기서 만 귀인의 생은 끝이었다.
왕 마마는 조금 전 황제의 눈 속에 비친 살기를 보았다. 만 귀인은 황제에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마, 울지 마십시오. 마마는 좋은 규수입니다. 이 노비의 권고를 들으시고 부디 폐하의 말씀대로 궁을 나가 다른 이와 혼인하십시오. 후에 폐하와 현비마마는 모두 마마께 빚을 졌다는 걸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편안한 나날을, 원하는 모든 걸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궁에 머무르려 하십니까. 보이지도 않는 부귀를 쫓으면서…….”
만정은 왕 마마의 품 안에서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하지만 난 폐하가 좋아……. 왕 마마, 난 어린 시절부터 그를 좋아했어. 그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어……. 왕 마마, 난 정말 떠나기 싫어. 내게 궁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응? 제발…….”
만정이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왕 마마의 옷을 붙잡고 물었다. 만정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평소 감히 무서워 쳐다보지 못했던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