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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35)화 (235/449)
  • 제235화

    “말도 마십시오.”

    관지례는 장씨 가문만 떠올려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분명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성가시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누이동생을 첩으로 들인 걸 후회할 지경입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저희 저택으로 몰려와 은자를 요구하는 통에 아주 머리가 아파 죽겠습니다. 심지어 전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장씨 가문 형편이 이제 그 정도로 비참한가 보군.”

    관지례가 쓴웃음을 지었다.

    “장 대인은 집에 들어앉아 있고, 장 부인은 집안을 억누르고 있는 데다, 장서양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거저 얻어먹으려고만 하고 있지요. 듣자 하니 요즘에는 장 대인이 조 부인과 이혼한 것까지 원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 대인이 복을 걷어찼다면서요. 집안이 또 난장판이 되었다더군요.”

    현천기가 활짝 웃었다.

    “재미있군. 장서양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조부(赵府) 앞에 꿇어앉아 자기를 양자로 거둬 달라고 애원했다는군요. 조 부인이 친아들을 놔두고 왜 그를 양자로 들이겠습니까? 다 큰 성인이 매일 남의 집 앞에 꿇어앉아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잃어버린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알 겁니다.”

    현천기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드러냈다. 장서양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조씨 가문에서 쫓겨나서 얻은 깨달음이 겨우 그것뿐이라니. 그는 높은 신분도 아닌 주제에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한심한 인물이었다.

    관지례가 막 떠오른 듯 다시 한번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그는 지금 오로지 조 부인만을 친모로 여기고 있습니다. 밖에서 자신의 성을 조씨라고 말하고 다니지요.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지례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현천기는 인간의 지능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에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으나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왜 그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분발하지 않는 거지?’

    몸이 단단하고 인상이 험상궂은 네다섯 명의 장정들이 흠씬 두들겨 맞은 장서양을 끌고 돌아왔다. 이들은 공손하게 관지례의 앞에 돈주머니와 옥패를 갖다 바쳤다.

    “도련님, 잡아 왔습니다.”

    관지례가 장서양이 훔쳐간 물건들을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희에게 상으로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또 다시 몸부림을 치려는 장서양을 장정 한 명이 발로 퍽 걷어찼다.

    바닥에 웅크린 장서양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반쯤 흘러내렸다. 무릎을 꿇은 그의 얼굴은 실의에 빠져 있다기보다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십수 년간 학문을 닦아온 그에게는 아직 수치심이 남아 있었다. 비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그에게 삶은 운명의 장난과도 같았다.

    장서양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장서영이 시집을 간 뒤에도 고생을 견디기가 어렵자 곧바로 관지례를 찾아갔다. 그에게 빌붙고자 했던 마음이 무색하도록 뜻밖에도 관지례는 처음부터 장서양을 만나 주지 않았다.

    관씨 가문에는 그처럼 빌붙어 보려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그들 중에서도 장서양은 결코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국자감 중퇴라는 이력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관씨 가문은 국자감을 졸업한 이를 고용해 회계를 맡기고 있었다. 그런 관지례에게 장서양이 특별할 리 없었다.

    물론 장서양에게도 열심히 살아보려던 때가 있었다. 비록 전처럼 호사스러운 생활은 누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배는 곯지 않으니 누이동생이 관지례에게 말만 잘해 준다면 작은 일자리 하나쯤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서양은 장서영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심지어 팔려온 첩실에게 무슨 친정이 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화가 난 장서양은 관지례에게 들러붙어 어떻게든 그를 진저리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악의를 품은 장서양이 냉소를 터뜨렸다. 만일 자신에게 명예와 지위가 있었다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다면, 오늘날 관씨 가문이 감히 자신을 이리 대할 리 없었다. 누이동생이 자신을 이렇듯 무시할 리 없었다.

    장서양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후에 장원급제하여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에게 얼마나 사람 보는 눈이 없었는가를 확인시켜 주리라 다짐했다.

    관지례는 장서양 같은 사람과 헛소리를 지껄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그의 앞에는 존귀한 두 도련님이 그의 시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아로 끌고 가 처리해라!”

    말을 마친 관지례가 권서함과 현천기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소인에게 두 분을 천향루에서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다음에 하지요.”

    “좋소.”

    권서함과 현천기가 동시에 반대의 대답을 내놓았다. 권서함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예정대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두 분을 방해할 순 없지요.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관지례는 감히 권서함을 붙잡지 못했다. 권서함과 자리를 함께 한다는 건 큰 영광이었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관지례가 서둘러 인사를 했다.

    “유감입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권 대인.”

    권서함은 느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를 보는 현천기의 눈에 알 수 없는 분노가 확 솟구쳤다.

    ‘아닌 척하기는. 한 눈에 장서양을 알아본 사람이 정말로 장서열을 안 좋아한다고?’

    하지만 현천기는 권서함이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저런 고리타분한 사람에게 모처럼 격동이 몰아쳤는데, 너무 모질게 타격을 가하는 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부끄럽고 화가 난 나머지 권서함이 정말로 무천도를 황제에게 바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의지처를 잃은 권서함은 뒤틀린 심경으로 자신에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

    일단 머릿속에서 권서함을 지운 현천기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관지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와 함께 천향루로 들어간 현천기가 말했다.

    “첩실의 외모는 어떠한가?”

    관지례는 갑자기 어깨가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어떤 이가 감히 면전에서 남의 첩실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하하… 그저 그렇습니다. 물론 현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소인이…….”

    관지례가 아부하며 번들번들 웃었다. 현천기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그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을 뿐일세.”

    현천기가 마치 은혜를 내려 주는 투로 말했다.

    “아까 그 녀석의 누이동생이지?”

    관지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여 줄 뿐인가. 그는 현천기처럼 대단한 관원이 원한다면 그 즉시 첩실을 갖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관지례에게 높은 분들의 시중을 드는 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중을 들지 못하게 할까 두려울 뿐이었다.

    “대인, 지금 보여 드릴까요? 아니면…….”

    그러나 관지례는 곧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대인,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얼른 데리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관지례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당연히 여인 한 명으로 충분할 리 없었다. 그는 현 대인이 천천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각양각색의 미녀를 대령할 생각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권서함은 하인으로부터 아버지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잠시 멈칫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가서 아무 일도 없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한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황당해하시겠는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는 나가서 물이나 마시고 무료한 소동을 지켜보았을 뿐, 그 밖에 다른 일은 없었다.

    “가서 아버지께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시라고 전하거라. 나는 몸이 불편하여 갈 수 없다.”

    “예, 도련님.”

    하인이 물러간 후 권서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헛되었던 오전이었다.

    * * *

    구염락은 알현을 청한 마지막 신하를 돌려보낸 뒤 금서를 불러 조로전의 안부를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경옥전으로 향했다. 소리자와 혜령, 그리고 금서 이외에도 스무 명 정도의 궁녀와 태감이 그의 뒤를 따랐다.

    황제가 도착했다는 전언에 왕 마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공손하게 밖으로 나와 꿇어앉았다. 그녀는 이미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하여 예측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간에 황제가 왔다는 건 가장 나쁜 결과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경옥전은 주인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왕 마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황제가 한창 때의 사내이므로 앞날은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훗날 황제가 장성하여 어리석어진다면 황궁은 또 다시 미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경옥전의 모든 노비가 밖으로 나와 황제를 맞이했다. 그를 맞이하는 노비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말 잘됐어! 드디어 폐하께서 오셨으니 이제 고생스러운 나날도 끝이 났구나!’

    그간 조로전을 제외한 다른 궁에서 괴롭힘을 당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총애 받지 못하는 주인을 둔 노비들은 꼼짝없이 고개를 숙이고 모진 굴욕을 당해야 했다.

    왕 마마는 뒤에 선 하인들이 기대에 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왕 마마는 공손하게 몸을 일으킨 후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버릇처럼 주인을 위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폐하께 아룁니다. 만 귀인마마께서는 지금 내전(内殿)에 계십니다. 성실하게 명을 지키며 대전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황제가 도착했다는 말에 만정은 지난 이틀 동안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세상에서 가장 기쁜 얼굴이 되었다.

    거울 앞으로 달려간 만정은 황급히 용모를 살피며 가장 좋아하는 붉은 비녀를 꽂은 뒤 주렴 밖으로 황제를 맞이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나선 탓에 책상에 걸려 넘어진 그녀는 복사뼈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눈시울을 붉혔다.

    구염락은 내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대청에 놓인 가장 높은 의자 위에 앉아 냉랭하게 말했다.

    “너희 주인을 불러오너라.”

    왕 마마는 마음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황제는 ‘귀인’이라는 봉호도, ‘모셔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만 귀인의 부귀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다행히 현비마마가 모조리 죽이려 하지 않은 덕분에 아직 살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왕 마마는 이제 귀인을 배웅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왕 마마는 의흔(依痕)에게 만 귀인을 데리고 나오라고 눈짓했다. 그녀는 너무 반질반질한 나머지 사람 얼굴이 다 비치는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황제의 심중을 헤아려 보기 위해 애를 썼다.

    아쉽게도 그녀는 황제를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황제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그의 의중을 함부로 추측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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