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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34)화 (234/449)

제234화

현천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한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밀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다. 권서함은 어떠한 큰일이라도 구태여 마음에 두지 않았고, 항상 무난하게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었다. 방금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현천기는 문득 권서함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권 한림(翰林, 관직명),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면 재미없습니다. 현비마마의 초상화가 당신 손 안에 있지 않습니까. 쉬이 넘길 만한 일은 아니지요. 만약 소생이 이 사실을 폐하께 고한다면…….”

그러나 권서함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고, ‘폐하’라는 두 글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무천도(舞天图)는 기법과 묘사에서 인물화 중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할 만합니다. 그림에 빠진 선배 한 분께서 우연히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이고, 소생도 몹시 아끼지요. 폐하께서도 보시면 분명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현천기가 별안간 코웃음을 쳤다. 그는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싹 날아가는 걸 느꼈다.

“권서함, 지금 보니 퍽 재미없는 사람이로군. 현비마마의 초상화를 몰래 소장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걸 설명하기에 충분하지요. 과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그림을 찾았는지 소생이 모를 줄 안다면 오산입니다. 당신은 그림을 숨겨 놓고 매일 혼자 감상했습니다. 족자가 그토록 닳아 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이지요!”

권서함이 피곤한 얼굴로 자리를 바꿨다. 여전히 안색은 창백했지만 목소리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현 대인,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군요. 저희 가문의 서재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그만큼 낡았습니다. 책꽂이에 둔 서적과 그림들은 그저 장식용으로 둔 것이 아니지요. 현 대인께서 조금만 주의 깊게 보셨다면 분명 이를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

“혹 애초에 그 그림을 왜 황제 폐하께 바치지 않았느냐 한다면, 소생은 폐하께서 그 그림을 구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 까닭입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벌써 폐하께 바쳤겠지요. 만일 한낱 그림 한 장이 현 대인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해도 함부로 말씀하시는 건 삼가 주시지요. 소생이야 괜찮습니다만 현비마마께는 분명 좋지 않을 것입니다.”

현천기가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권서함! 진정 장서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소?”

권서함이 날카롭게 현천기를 쳐다보았다.

“현 대인, 말씀을 삼가시지요. 현비마마의 존함을 직접 일컫는 것은 죽을죄입니다!”

현천기는 순간 자신이 어리석고 미쳤다고 생각했다. 권서함과 약속을 잡고 만나 쓸데없는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다니.

권서함은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샌님이었다. 틀에 박힌 예법을 진리로 여기는 인간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야말로 감정을 낭비하는 일이었다.

화가 난 현천기는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났다.

‘또 다시 권서함과 함께 동병상련을 느끼고자 한다면 내 인간이 아니다!’

권서함은 현천기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문을 박차고 나가자 속으로 어리둥절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떠나다니. 병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게 겨우 물이나 마시고 영문 모를 말이나 듣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그러나 권서함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현천기는 조금 전 무천도(舞天图)를 입에 올렸다. 현천기가 그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혀 아니었다. 그 말은 곧 그 역시 그림 속의 여인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일순간 권서함의 눈에 담겨 있던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봄바람이 지나간 그의 얼굴은 마치 주먹으로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져선 안 될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진다면 화를 입는 건 그녀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권서함은 기회를 봐서 무천도(舞天图)를 황제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 평범한 여인과 혼례를 올리고, 평온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권서함은 뜻밖에도 현천기가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몰려든 인파 사이에 끼어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권서함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천기는 분명 존재감이 넘치는 자였으나 사람들은 그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권서함은 본래 구경하는 것을 싫어했다.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임은 물론이거니와 구경거리가 된 이에게 불공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든 구경당하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권서함은 하인의 부축 끝에 인파 속에 뒤섞였다. 잠시 후, 현천기의 뒤에 선 그는 구경거리가 된 몇몇 이들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장서양?”

현천기는 권서함의 인기척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가 바닥에 꿇어앉아 관씨 가문의 도련님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만인의 구경거리가 된 자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는 사람입니까?”

권서함의 시선이 현천기를 향했다.

“저자를 모르십니까? 그는 장… 아니, 과거 현비마마의 이복 오라버니였습니다.”

현천기가 경악한 눈으로 장서양을 바라보았다. 단출한 옷차림을 한 그는 겉보기에는 어느 정도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제야 현천기는 그가 과거 안하무인으로 굴던 장씨 가문의 서자 도련님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현천기는 저 구경거리와 과거의 장서양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현천기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조 부인이 장신성과 이혼해서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저런 머저리 같은 인간 때문에 화병으로 제 명을 다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들으셨습니까? 저자는 누이동생을 관씨 집안에 첩으로 보내고 은자 오만 냥을 받았다더군요. 무려 오만 냥이나 말입니다!”

“…….”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국보라도 샀는 줄 알 것입니다. 아무리 미인이라 해도 오만 냥의 가치가 있을 리가요. 아무튼 저들 형제는 그 오만 냥을 다 쓰고도 또 관씨 가문에 돈을 요구하는 중이지요. 관 공자의 낯빛 좀 보십시오.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아예 저자를 걷어차 죽이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현천기가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해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자의 누이동생이 그렇게 예쁩니까?”

권서함이 불편한 얼굴로 현천기를 쳐다보았다. 권서함은 타인의 외모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걸 싫어했다. 더군다나 조금 전 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이 거리의 촌부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건 더더욱 싫었다.

“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군요.”

현천기는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팔짱을 낀 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분명 별로였을 겁니다. 현비마마야 조 부인을 닮았다지만 그녀의 동생이라면 조 부인의 핏줄도 아닌데 어떻게 용모가 예쁠 수 있겠습니까.”

“…….”

“그나저나 관씨 가문도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오만 냥을 버린 것은 그렇다 치고, 저런 무지렁이와 사돈을 맺다니요.”

“처음 관씨 가문이 혼담을 건넸을 때 장신성은 좌상이었습니다. 그때 납채금(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보내는 금품)은 십만 냥이었죠. 후에 그가 승상직에서 쫓겨나면서 오히려 금액이 오만 냥으로 줄어든 겁니다.”

현천기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관씨 가문이 정말 정신이 나갔군요!”

세상에 어떤 여인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이는 집안을 말아먹는 꼴이었다.

“보십시오. 말로 안 되니까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조금 전의 악감정을 털어 버린 현천기는 아직 다 낫지 않은 권서함을 휙 잡아당겨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권서함은 붙잡힌 팔이 저리는 걸 느꼈지만 가문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행동에 굳이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올해로 스무 살쯤 된 관씨 가문의 서자 관지례(管之礼)는 가문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자손 중 한 명이자 훗날 청산을 이어받을 유력한 후보자였다. 그는 일처리에 노련한 팔방미인으로 귀족 사이에서 호평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온화하고 점잖은 성격은 아니었다.

관지례가 발로 장서양을 퍽 걷어찼다. 그의 말투는 차갑고 딱딱했다.

“경고하는데! 난 네가 누구의 오라비이건 관심 없어. 너랑 이 몸은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이다! 다시 내 눈에 띄는 날에는 바로 관부에 보내 엄히 다스려 주마!”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장서양이 벌건 눈으로 관지례의 돈주머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서양은 주머니를 쥔 관지례의 손을 문 뒤 주머니와 옥패를 빼앗아 죽어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내 누이동생을 취했으니 당신은 우릴 부양할 의무가 있어!”

잽싸게 도망치는 장서양을 보며 관지례가 격노했다.

“여봐라! 저 놈을 잡아라! 잡아서 다리를 부러뜨려라! 윽…….”

물린 손에 통증을 느낀 관지례가 숨을 들이마셨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장서양이 무슨 말을 해도 장서영을 첩으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구경꾼들이 관씨 집안 장정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몰려든 구경꾼들이 계속해 이상한 구호를 외치자 멀리 도망치던 장서양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관지례는 구경꾼들이 흩어진 자리에서 인파에 섞여 있던 권서함과 현천기를 발견했다. 서둘러 얼굴에 나타난 험악한 기색을 지운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부드러운 태도로 두 사람의 앞에 나섰다. 관원과 백성 사이의 예를 지키기 위해 관지례는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인, 권 대인과 현 대인을 뵈옵니다. 이곳에서 두 대인을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혹 소인이 두 대인께 식사를 대접해도 될는지요? 부디 소인의 체면을 봐서라도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관씨 가문은 돈으로 얻은 관직이 있을 만큼 연경의 대표적인 대부호 가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관지례의 눈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관씨 가문은 모래알만큼이나 하찮은 것이었다. 심지어 관지례의 부친인 관 노야조차도 권서함 앞에서는 큰절을 올려야 했다. 따라서 관지례가 이토록 공손하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현천기는 식사보다 현재 관씨 가문에 쫓기고 있는 사람에게 더 흥미가 갔다.

“큰처남인가?”

관지례가 어색하게 답했다.

“현 대인께 아룁니다. 그는 정실부인이 아닌 첩실의 오라비입니다.”

“오, 그렇군. 헌데 그자는 예전에 국자감에서 수학하지 않았나? 배움이 짧지는 않을 텐데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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