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그림 속 여인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허공을 가르는 자태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바로 눈앞에서 미인이 춤을 추고 있는 양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화풍이었다.
현천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예상 밖의 물건이었다.
‘이 그림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지 않았나? 어째서 권서함이 이걸 갖고 있는 거지?’
현천기의 눈이 족자를 살폈다. 닳아 있는 모서리는 분명 누군가 감상한 흔적이었다.
‘권서함이 설마…?’
현천기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럴 리가! 권서함은 대주국에서 가장 기품 있고 점잖은 귀족 도련님으로 모든 여인들이 그와 혼인하기 위해 줄을 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권서함이 어떻게 장서열 같이 제멋대로인 여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현천기는 이 세상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 권서함이야말로 미친 게 분명했다.
그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자였고 특히 여인이라면 그저 내키는 대로 고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세상에서 단 하나, 유일하게 가능성이 없는 여인을 좋아하고 있었다.
과연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현천기는 그제야 권서함이 여태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눈이 높은 권 부인이 어떠한 며느릿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일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권서함의 공이 팔 할이었다.
만약 정말로 권서함이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며 고집을 피웠더라면, 권 부인 또한 아들을 꺾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천기는 일행이 족자를 보려하자 얼른 족자를 말아 쥐었다. 이상하게도 권서함을 비웃고 싶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당장이라도 권서함에게 족자를 지닌 이유를 추궁하며 연경에서 가장 점잖은 이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천기는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권서함은 장서열과 교류하며 언제나 담담한 군자의 면모를 보였을 뿐 한 번도 정도를 넘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는 장서열이 입궁하여 수년간 제멋대로 굴면서도 총애를 받고, 또 그의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아 왔다.
그녀가 줄곧 권씨 가문과 대립각을 세우는 걸 보면서 권서함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때를 놓쳤음을, 사모하는 이에게 이미 부군이 있다는 사실을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대인, 이제 가셔야 합니다. 족자는 가져가실 겁니까?”
“아니.”
스스로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현천기는 족자를 잘 말아서 옆에 있는 나무 상자에 넣었다. 오히려 곁에 있던 노구(老九, 수하 이름)가 놀라 어리둥절했다.
“대인, 그 족자는…….”
“괜찮다. 가자!”
세 사람은 어둠을 틈타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현천기의 책상 위에는 날리는 필적으로 ‘수고’ 라고 적힌 서신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현천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신을 갈가리 찢었다. 역시 권씨 가문은 결코 호락호락한 가문이 아니었다.
“여봐라! 어젯밤 숙직을 선 수위들을 끌어내 스무 대씩 곤장을 쳐라!”
이어서 현천기는 뻔뻔하게도 권서함에게 함께 차를 마시자는 내용의 서신을 한 통 썼다. 권서함은 현천기가 유일하게 그 능력을 인정하는 자였다. 모처럼 공통된 화젯거리가 생겼는데 술 한잔 기울이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한편, 권서함은 현천기가 따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젯밤 현천기의 침입은 필시 황명을 받든 결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남을 청하다니, 현천기는 자신과 거래를 할 만한 약점을 잡았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권서함은 이제 겨우 침대에서 내려갈 수 있게 된 병든 몸을 이끌고, 황제의 수하들 중 가장 손꼽는 실력을 가진 이를 만나러 나섰다.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날이 흐린 것으로 보아 저녁에는 눈이 올 것 같았다.
권서함은 소매가 곧은 청색 비단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흰 가장자리에 금테가 둘러진 모습은 그를 더욱 품위 있고 우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와 달리 현천기는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평범한 면피(面皮)를 쓴 채, 입으나마나 한 검은색 유삼(儒衫)을 걸치고 있었다. 높게 묶어 올린 머리 끈에는 광택이 없는 가짜 옥석이 한 알 박혀 있었다.
권서함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의복을 두르고 있었지만 결코 이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백 년 동안 이어 온 유서 깊은 권씨 가문 그 자체였다. 또한 비범한 기상만큼은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천향루(天香楼)의 상급 별실은 한 번 출입하는 데에만 은자 열 냥이 필요했다. 별실은 비싼 만큼 그 값어치를 했다. 방을 꾸민 장식품들은 고급스럽지만 단정해서 누구든 부귀에 눈이 멀어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먼저 도착하여 차를 주문한 현천기는 창가에 기대 앉아 홀로 차를 마셨다. 그는 거리에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신분은 높지만 자신과 비슷한 한 남자를 기다렸다.
현천기는 문득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자신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자각조차 들지 않았다.
권서함 같은 이도 짝사랑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헌데 자신이라고 이상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현천기는 지나치게 매혹적인 황궁의 요녀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다. 자신만 허튼 생각을 품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며.
현천기는 그런 자였다. 자신보다 극한에 몰린 자가 모든 방면에서 훨씬 우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그는 안도했다.
문이 열리고 권서함이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비록 안색은 창백했지만 기운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권서함은 현천기의 맞은편이 아닌, 식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고른 후 하인을 물러가게 했다. 점원에게 물을 따르게 한 권서함은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문지르면서 마치 방 안에 현천기라는 사람이 없다는 듯 침묵에 잠겼다. 만에 하나 현천기가 자신의 약점을 공격하려 한다면 때려죽인다 해도 이에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현천기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똑같은 슬픔을 겪은 두 사람 사이에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함께 앉아 얻지 못한 것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현천기는 말없이 차를 마시며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타인의 인생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고, 덕분에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오직 나태한 사람만이 있을 뿐, 나태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찻잔 속의 차가 다 식을 때까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심지어 화장실을 가지도 않았다.
권서함이 가진 능력 중 단연코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인내심이었다. 게다가 권서함은 집에 누군가 깊은 밤을 틈타 뒤질 만큼 떳떳하지 못한 물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태연자약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감출 것이 없었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그러나 현천기는 그저 이렇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것이었으므로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궁리를 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권서함으로 인해 어지러웠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에게는 이렇듯 상처를 치유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연경을 주름 잡는 두 신하는 마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지는 싸움이라도 하듯이 각자의 생각에 빠진 채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건 천향루의 점원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공손하게 들어온 그가 물었다.
“두 분 손님께서는 어떤 음식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저희 가게에는 볶음국수, 장어요리, 새우볶음, 바지락볶음, 생선볶음, 죽순볶음, 목이버섯튀김, 돼지간볶음, 상어지느러미찜, 참새튀김 등이 있습니다. 또 갈비찜, 닭고기, 배 무침, 각종 두부요리와 여러 가지 야채요리가 있으며 삭힌…….”
현천기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점원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는 오전 내내 한가하게 앉아 있던 스스로가 의아했다.
“닥쳐라!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가져와.”
말을 마친 현천기가 동전 이백 문(文, 동전을 세는 단위) 한 꾸러미를 휙 던졌다. 별실 한 채를 빌릴 값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점원은 아연실색했다. 어떤 손님이든 차별 없이 대할 줄 모른다면 천향루에서 시중들 자격이 없었다. 그가 당황한 건 가난뱅이를 싫어하고 부자 손님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백 문의 돈이 한 사람의 밥값인지 두 사람 분의 밥값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점원은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감히 묻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설령 은자를 내놓지 않았다 해도 기꺼이 맛있는 음식을 올려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는 음식을 더욱 완벽히 외워 두 도련님을 즐겁게 해 주고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심지어는 보상을 받기는커녕 별실을 내준 값이나마 제대로 받아야 할 판이었다.
권서함은 현천기가 입을 열자 그제야 덤덤하게 고개를 들었다.
“현 대인, 오늘은 무척 한가하신가 봅니다. 오전 내내 그리 앉아 계셨습니까?”
현천기가 의아한 눈으로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위로하려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가. 한가하게 굴지 않았다면 이렇듯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암묵적인 공감을 느낄 수 없었으리라.
권서함이 이마를 문질렀다. 몸이 좋지 않았던 그는 더 이상 현천기의 말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제 폐하께 고해 올릴 만한 구실이라도 잡은 것입니까? 우리 권씨 가문이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 말입니다.”
그의 말에 현천기는 침묵을 통해 슬픔을 달래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현천기가 솔직하게 답했다.
“소생은 권 공자를 모시고 그저 차나 한 잔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권 공자께서는 이곳의 차 맛이 그리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예.”
권서함이 조용히 답했다. 현천기는 이를 수긍했다.
“권씨 가문에는 좋은 차가 많을 테니 이곳의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겠군요. 소생이 어젯밤에 폐를 끼쳤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
“소문에 권 공자께서 그림 솜씨가 뛰어나다던데, 혹시 소생에게 무천도(舞天图) 한 부를 그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소생이 미리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권서함은 속으로 살짝 긴장했지만 변함없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송구합니다만 소생은 그러한 솜씨가 없습니다. 현 대인,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바로 하시지요. 소생은 몸이 좋지 않아 오래 머물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