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장서열을 매섭게 노려보던 그가 그녀의 부드러운 분홍빛 볼을 꼬집었다.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군. 하지만 이 몸은 인사사(人事司)의 간언을 받아들여 건강한 제왕이 되기로 결심했어.”
구염락의 입에서 ‘건강’이라는 글자가 나오자 장서열은 진심으로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그토록 굳은 얼굴로 그가 이런 농담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한 탓이었다.
“정말로요?”
구염락은 장서열의 목을 어루만지며 침을 삼켰다. 심호흡하며 애써 열을 가라앉힌 그가 달아오른 표정과 달리 진지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야. 짐은 아직 어려서 합방을 자주 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장서열은 속으로 슬며시 웃음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돌적으로 추파를 던지며 침대에 기어 올라오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래 놓고 아직 어리다고?
“스스로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옥체를 보전하세요.”
구염락의 얼굴이 즉시 붉어졌다. 다른 이도 아닌, 장서열이 자신에게 어리다고 말하는 건 큰 금기였다. 나이도 그렇거니와 그 어떤 방면에서도 어리다고 말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구염락은 이미 장서열보다 키가 큰 것은 물론이고 그녀보다 식견도 넓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구염락은 그녀보다 두 살이 어렸다. 그는 차라리 그녀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작아도 좋으니 그녀보다 두 살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넌 만정이 누구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권서함?”
장서열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목덜미에 닿은 구염락의 얼굴이 간지러웠지만 일단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만정이 권서함과 혼인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예요. 권씨 가문 출신인 태후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권서함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게다가 그는 아직 정혼자도, 첩실도 없는 데다 만정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니 좋은 짝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이를 듣던 구염락은 왠지 서러움을 느꼈다. 그녀가 아무리 만정 때문에 권서함을 칭찬하는 것에 불과하다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장서열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우수한 사람이어야 했다.
장서열이 기쁘게 이야기하자 구염락은 그녀를 위해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며칠 전 그가 나에게 졌다는 걸 잊지 마.”
말을 마친 구염락은 간절한 시선으로 장서열의 칭찬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상심한 구염락을 상대하는 게 귀찮다는 듯 무시했다.
“권씨 가문을 설득할 방법이 있어요?”
“아니.”
고개를 저은 구염락이 덧붙여 말했다.
“그들을 처벌하자마자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며느리를 맞이하라고 강요하는 건 적절치 않아. 너무 괴롭히는 모양새가 되니까. 차라리 현천기는 어때? 지금 외모는 좀 보기 흉해도 역용술(易容术, 외모를 바꾸는 기술)이 뛰어나니, 만정이 어떤 잘난 얼굴을 원하든 현천기는 반드시 그녀를 만족시켜 줄 거야.”
구염락은 현천기를 거의 물건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조건이 되면 언제든지 팔아 버릴 수 있다는 듯 뒷일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어 보였다.
장서열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현천기요?”
장서열은 그간 현천기가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나 구염락이 그의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까지 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장서열은 거부감을 느꼈다. 만약 현천기가 생지옥에 버려지던 꼴을 보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가 부인이든 자식이든 개의치 않고 가족을 말려 죽여 감상할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그가 조금 음침하고 잔인하더라도 만정과 맺어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서열은 가슴에 분노와 증오만이 남은 현천기가 만정의 남편이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없나요?”
“다른 사람?”
구염락은 열심히 생각했다.
“류소경(柳少顷, 권서함의 친구)은 어때?”
“그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몰라요?”
장서열은 머리가 아팠다. 구염락이 추천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 만정이 혼인하지 않기를 원하는 거예요? 궁에 남아 노후를 보내길 바라는 거냐고요!”
구염락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를 나무랄 일도 아니긴 했다. 류소경, 권서함, 서풍엽, 장서전, 서비절, 당자 등은 현 세대에서 가장 출중한 소년들이었다. 성적 기호와 관계없이 류소경의 능력이 뛰어난 건 두말할 나위 없이 사실이었다.
구염락은 자신이 서풍엽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만정과 서풍엽이 맺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모두가 자신에게 고마워하게 될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있자 만족한 얼굴로 그의 품에 기대어 누가 만정에게 적합한지를 한참 생각했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 소후야(余小侯爷, 여씨 가문의 도련님)는 어때요? 여운(余韵)의 큰오라비 말이에요.”
비록 여운은 가식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녀의 오라버니는 매우 착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몰락한 여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여씨 가문의 위세는 예전만 못했지만, 여 소후야는 분명 인품이 좋고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내일 만정과 얘기해 봐. 괜찮다고 하면 내가 바로 만정이 병을 앓고 있다고 공표할게.”
그 말에 장서열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말했잖아요. 사실 만정이 좋아하는 건 당신이에요.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도 만정은 결코 만족하지 못할 거예요. 이번 일은 당신이 가서 잘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폐하의 말이라면 어쩌면 만정도 받아들일지도 몰라요.”
만약 장서열에게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만정은 구염락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이는 결코 만정에게 좋지 않았다.
구염락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좋아. 내가 갈게.”
장서열이 피곤해하자 구염락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그는 오늘 분량의 마지막 탕약을 마신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이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심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준 구염락이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더 번져나가다 이윽고 환한 웃음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구염락은 숙직을 서는 완정을 불러다 놓은 후 다시 앞으로 나가 공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 * *
권서함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현천기는 그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현천기는 권서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날 구염락에게 패배한 뒤 그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리고 그가 정말로 냉궁에 갇힌 권여아를 체념한 건지 궁금했다.
‘누이동생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니, 대체 권씨 가문은 무슨 꿍꿍이지?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황제에게 보복하려는 속셈인가?’
현천기는 공무를 가장한 사적인 궁금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밤을 틈타 두 명의 측근을 데리고 권씨 가문의 저택에 잠입했다.
권씨 가문에는 수많은 서적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특히 서재에 끝없이 늘어선 책꽂이와 각종 서적들은 일개 좀도둑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는 권씨 가문의 권세를 상징하기도, 대주국 최고의 한림(翰林, 조정의 문서를 저술하거나 국사를 편찬하고 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는 등의 일을 하는 관직)이자 문무백관의 귀감을 상징하기도 했다. 권씨 가문은 가히 문인과 유생들이 대대로 가장 존경하는 가문의 표본다웠다.
이는 현천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줄곧 권서함에게 나름의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초혜전 시절부터 그는 권서함 역시 자신처럼 조용한 방관자라고 생각했다.
현천기는 가능한 한 권씨 가문과 접촉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흥분에 젖어 입가를 핥았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결코 권씨 가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시간이었으나 현천기는 만일을 대비하여 역용술(易容述)로 하인처럼 외모를 바꾸고 달빛에 의지하여 서재를 뒤졌다.
잠시 뒤, 현천기는 권씨 가문의 서재에 뜻밖에도 밀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습관적으로 몸을 숨길 장소를 만들어 두고, 심지어 침대에도 여러 장치를 설치해 놓은 현천기로서는 매우 생소한 풍경이었다.
술수에 능한 자신과 비교되는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현천기는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현씨 가문 저택에 밀실이 많은 것은 그들 가문의 특색이었다. 하지만 이와 대비되는 권씨 가문의 담백한 모습에 현천기는 존경심과 더불어 증오심을 느꼈다. 물론 대주국에 권씨 가문과 같은 이들이 많지 않기에 현천기와 같은 이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서재를 한차례 뒤진 후에도 현천기는 딱히 가치 있는 물건을 찾아내지 못했다. 가끔씩 서적 사이에서 억압된 감정을 토로하는 심경과 더러운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광분해 있는 글귀, 혹은 시 몇 수 따위가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교양이 없는 지금의 권력자를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천기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현천기가 권씨 가문을 구태여 깊게 파고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었다.
‘설마 권씨 가문에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한 거야? 겨우 이까짓 것들로 황제나 몇 번 욕한 뒤 가문에 먹칠을 한 두 여인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현천기는 소인배의 마음으로 군자를 헤아리려 했던 스스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코 권씨 가문처럼 정정당당하지도, 권세와 무력에 초연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천기는 비록 권 씨 가문에 탄복할지언정 자신의 가치관만큼은 절대 바꿀 생각이 없었다.
잠시 뒤, 다른 서재로 탐색을 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이들은 현천기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보고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현천기의 시선이 휘영청 떠있는 달로 향했다. 결국 자신이 소인배라는 걸 확인만 한 셈이었다.
“가자!”
몸을 돌리던 현천기는 실수로 책꽂이에 몸을 부딪쳤다. 책꽂이 위에 놓여 있던 족자 하나가 공교롭게도 현천기의 머리 위에 툭 떨어졌다.
일행은 모두 긴장한 채로 심호흡을 들이켰다. 아슬아슬하게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십년감수한 현천기가 막 족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고 할 때였다. 그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족자를 펼쳤다. 무슨 명화인지 구경이나 해 볼 참이었다. 만일 자신의 가문에 없는 귀한 것이라면 이거라도 훔쳐가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현천기는 경악했다. 족자는 무천도(舞天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