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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31)화 (231/449)

제231화

순간 구염락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번 사건에 만정도 연루된 건가?”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군. 지금 당장 그녀의 목을 벨……!”

얼른 구염락을 끌어당긴 장서열이 질책하듯 눈을 부릅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전 그냥 순수하게 만정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것뿐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 왔으면서 어쩜 그리 만정을 몰라요.”

장서열이 언짢은 눈으로 구염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만정이 어린 시절부터 당신을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말이에요.”

장서열은 구염락의 표정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구염락은 무표정한 얼굴로 치밀었던 화를 가라앉혔다. 어쩌면 사람을 잡아 죽이지 못해 불쾌한 것도 같았다. 그가 다시 무릎을 꿇고 장서열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어. 짜증이 날 뿐이야.”

말을 마친 구염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가 조심스레 장서열을 품에 안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에게는 서로만 있으면 돼. 궁에 필요한 건 너뿐이야. 난 오직 너에게만 잘 할 거야. 그렇다면 다시는 이런 너저분한 일도, 누군가 네게 불경을 저지르는 일도 없겠지.”

“…….”

“궁에는 오직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만 있을 거야.”

구염락은 손을 내려 장서열의 배를 덮었다. 자신에게 와닿는 부드러운 눈길에 잠시 넋을 놓은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예전처럼 어리광을 부리지도, 막무가내로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몹시도 정중한 말투에 장서열은 적응이 안 될 지경이었다.

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장서열은 순간 그를 껴안은 채 울고 싶어졌다. 마침내 모자랐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것처럼, 그토록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차오른 감동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장서열은 그동안 구염락에게 그리 잘해 주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다른 마음을 품고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구염락은 자신을 소중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대체 그의 삶은 얼마나 외로웠기에 자신에게 이런 대우를 받고도 좋다고 여기는 걸까. 어째서 자신을 꽉 붙잡고 놓지 못하는 걸까.

장서열은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권여아는 구염락에게 매우 잘했다.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든 권세를 위해서였든, 전생에서 권여아는 구염락에게 극진했고, 구염락도 그런 권여아를 진심으로 대했다.

그리고 질투에 눈이 먼 그녀는 권여아를 죽였다.

어쩌면 구염락이 분노한 것도 당연했다. 그뿐인가?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구염락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금용까지 건드렸다. 그야말로 죽음을 자초한 셈이었다.

장서열은 문득 자신에게 구염락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의 구염락이라고 자신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전생의 그녀는 제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고, 그가 간직한 따뜻한 추억을 몽땅 파낸 채 이기적으로 자신의 소망만을 이루고자 했다.

이는 구염락이 원했던 사랑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나마 부부의 연을 생각한 그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했다.

구염락의 마음을 전부 안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문득 장서열은 전생에서 그가 나름대로 아내를 위해 포용을 베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그의 포용을 짓밟은 건 그녀였다. 실망한 그가 다시는 자신을 보려 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다.

장서열은 쓸쓸한 얼굴이 되었다. 어쩌면 시종일관 그에게 미안한 일을 저지른 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구염락도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일에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 줄 사람을 원했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후궁들은 언제나 싸움을 일삼았고, 그는 결국 후궁을 찾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금용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발걸음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를 비빈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의 두 팔이 그녀의 어깨 위에 드리워졌다. 그가 지닌 특유의 향기는 전생처럼 깨끗하고 편안했다.

“갑자기 조용해졌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구염락은 마치 품 안에 있는 이가 듣지 못할까 염려한 듯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염려하는 말투에는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역력했다.

“난 너만 있으면 돼. 어쩌면 넌 내 곁에 있는 게 힘들거나, 내가 네게 부족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아무리 날 싫어한대도 난 너를 싫어할 수 없어.”

구염락은 특히 마지막 말을 할 때 더욱 기뻐 보였다. 마치 장서열이 자신의 흠을 잡기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장서열은 앙탈 없이 그저 구염락의 품에 기댄 채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른한 얼굴로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구염락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손아귀와 붓이 닿는 손가락, 심지어 손바닥도 거칠었다. 그는 자신을 돌보는 일에 서툴렀고, 선황들처럼 번지르르하게 스스로를 꾸미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황위에 오른 뒤, 구염락의 어깨에는 더욱 무거운 책임이 얹어졌다. 그는 더욱 향기롭고 준수해지기 위해 노력할 시간이 없었다.

“폐하…….”

“응… 서열아.”

구염락은 장서열을 껴안은 채 촛불 속에서 평온을 즐겼다. 꿇어앉아 있는 하인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장서열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만정에게 좋은 사람을 찾아 주고 싶어요.”

“좋아. 누가 어울릴 것 같아?”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후궁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여인이 아니었던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한 번 황실에 들어온 여인은 죽어도 황실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없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만정을 취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녀를 다른 이와 맺어 주는 것 자체가 황실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순간 장서열은 무언가 눈에 들어간 듯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바보.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바로 승낙을 하면 어떡해. 이 정도 권위도 못 세우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구염락의 황권은 바로 이렇듯 만백성을 진심으로 복종시키는 데 있었다. 형식에 얽매이지도, 도리에 속박되지도 않는 그의 황권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몸을 돌려 구염락을 끌어안은 장서열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그대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잘할 거예요…….”

장서열은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아직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구염락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원하는 가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생에서 당신을 사랑하게 된 뒤부터 어떤 남자도 내게 의미가 없었어요…….’

눈을 반짝인 구염락이 고개를 숙이고 되물었다.

“서열아, 뭐라고?”

구염락의 시선에 장서열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멀리 밀어냈다.

“당신은 머리를 묶지 않으면 아가씨 같아 보인다고요.”

“아, 지금 이 몸이 어여쁘다고 칭찬하는 것이로군.”

구염락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그녀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나도 내가 참 잘생겼다고 생각해.”

자아도취로 가득한 발언에 장서열이 그를 힐끗 쏘아보았다. 그녀는 꿇어앉은 그의 다리 위에 올라앉은 채 그가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는 걸 거부했다.

구염락은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장서열이 자신을 밀어낼수록 그는 더욱 그녀에게 머리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는 지난 이틀간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최근 장서열은 드디어 웃기만 하던 모습을 버리고 종종 자신에게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곤 했다.

구염락은 그 모습이 좋았다. 복중 태아의 건강은 어떻든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암묵적으로 아이가 무사하게 태어나기만 한다면 이를 복으로 여기고 아이를 사랑하리라 마음먹은 상태였다. 만에 하나 아이가 세상 빛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건 그간 자만했던 것에 대한 벌이자 인연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배 속의 아이는 이미 두 사람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 보물이었다. 이들은 천하에서 가장 높은 권세를 누리는 이들이었으나 평소 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하는 건 단지 평온한 가정을 꾸리고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지금이, 그녀가 가끔씩 자신에게 애교 섞인 심술을 부리는 모습이 좋았다. 회임을 한 뒤로 장서열은 예전만큼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이전보다 많은 관용을 베풀었다.

게다가 장서열은 만정이 입궁할 때 가지고 들어온 일루춘(一缕香)이 서풍엽이 만든 것일 거라는 솔직한 이야기도 모두 전해 준 상태였다. 장서열은 그 일루춘이 서풍엽이 오랜 시간 연습한 끝에 만들어낸 맛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구염락은 처음에는 살짝 질투를 느꼈다. 아니, 사실 엄청난 질투를 느꼈다.

그는 그 즉시 온갖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냄새만 맡아도 자신이 정성껏 만든 음식이라는 것을 알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러나 아쉽게도 어선방의 요리사는 딱 첫 시도 만에 앞으로 일 년간은 회임한 현비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이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구염락이 살짝 짓궂은 정도로 장서열을 더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그가 입을 열었다.

“당자는 어때?”

뺨이 약간 붉어진 장서열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발그레한 뺨 위로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은 몹시 요염해 보였다.

순간 무거워진 구염락의 호흡을 인지한 장서열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자와 헌원가가 이제야 간신히 혼례를 올릴 수 있게 됐는데, 갑자기 중간에 만정을 껴 넣으면 헌원가의 마음이 편하겠어요? 당자는 두 여인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테고, 결국 집안이 시끄러워질 거예요.”

장서열은 일부러 몸을 움직여 그의 민감한 부위를 건드렸다. 구염락의 눈에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장서열, 내가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짐짓 불쌍한 표정으로 구염락을 바라본 장서열이 매혹적인 눈을 깜빡였다.

“보세요, 겨우 이 정도도 못 참잖아요. 폐하께서는 정녕 다른 미인을 찾지 않고 밤을 보낼 자신이 있나요?”

장서열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사실을 놀리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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