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왕 마마가 만 귀인에게 훈계를 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왕 마마는 만 귀인의 착한 성정과 단순한 성격을 생각해 그녀를 한 번은 도와주고자 했다.
어쩌면 만 귀인은 현비가 아픈 틈을 타 황제의 총애를 얻어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혹은 궁을 떠나게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든 왕 마마로서는 공덕을 쌓는 셈이었다.
장서열은 침대에 누워 태교에 전념했다. 그녀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한 시진마다 탕약을 마셨다. 이는 조금씩 자주 마셔 주어야 하는 탓에 조로전에는 매일 쓰디쓴 탕약 냄새가 진동했다.
탕약 냄새는 결코 좋지 않았다. 누구인들 쓴 약초향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장서열은 탕약이든 보양탕이든 닥치는 대로 마셨다.
그녀가 아이를 낳기 위해 집착하는 것도 당연했다. 약을 먹어도 9개월 동안 아이를 무사히 뱃속에 품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어미에게 아이를 낳을 것인지의 여부를 논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장서열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설령 태어난 아이가 바보이고 장애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아이에게 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녀는 세상의 온갖 희귀한 약재들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녀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장서열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자신을 입궁시킨 것에 너무나 감사했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이곳은 황실이었다. 궁에서는 비록 애정이 없는 서먹한 삶을 살게 될지라도 총애만 있다면 원하는 꿈을 이루고 나의 자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었다.
눈송이가 흩날렸다. 장서열은 전처럼 창문 바깥의 경치를 감상하거나 극을 즐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가끔씩 책을 보았고, 또 가끔은 귀비탑(贵妃榻)에 누워 완정이 들려주는 우스갯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많은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완정은 매일 장서열의 곁에서 한 시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정의 말솜씨는 별로 늘지 않았지만, 대신 그녀는 날이 갈수록 활달해졌다.
장서열이 이제는 눈빛만 봐도 웃기다고 놀리자 완정은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다고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태아에 대한 염려를 제외하면 조로전의 분위기는 마치 예전과 같았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전보다 더욱 평화롭기까지 했다.
태후가 냉궁에 갇힌 뒤 조로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장서열의 조로전은 아직까지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내명부 틈에서 오히려 특별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태후를 처리한 뒤, 장서열은 더는 무리하지 않고 나머지 일은 몸조리를 마친 후에 천천히 결정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번 일을 국암사의 약연이 사주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한편, 궁에 숨어든 약연의 밀정을 처리하는 일은 모두 구염락에게 맡겼다.
장서열은 무언가를 따지거나 낯선 사람을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구염락으로부터 충왕부에서 진귀한 약재와 귀한 물품을 올려 보냈다는 걸 전해 듣고도, 그저 힐끗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그런 장서열의 태도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지난 며칠 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구염락은 그녀를 위해 직접 거문고를 연주해 주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장서열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문고 연주를 들었다. 그의 곡조가 익숙한 이유는 자신이 구염락에게 연주법을 전수해 준 탓이었고, 낯선 이유는 이처럼 살벌한 곡조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연주는 그 가락이 매우 얽히고설켜 좀처럼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했다.
장서열은 문득 구염락의 변화를 느꼈다. 그녀의 곁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그는 어느새 다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를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얼굴로 조로전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해 나갔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구염락은 더 이상 예전처럼 어리광을 부리지도, 아이처럼 들러붙지도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성장하여 사랑과 포용이 깃든 남자의 모습을 하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저녁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망토를 걸친 구염락이 등불을 든 긴 행렬을 거느린 채 조로전에 당도했다. 금실로 수놓아진 검은 망토 위로 하얀 눈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장서열은 화로 앞에서 농교의 잡담을 듣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실처럼 가는 눈을 뜨고 웃는 그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비롭고 인자해 보였다.
구염락은 순간 뇌리에 떠오른 표현에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자비롭고 인자하다니. 그녀는 온화한 것이지 할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녀의 표정은 자비롭고 인자하다는 표현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구염락은 그녀가 분명 아이를 사랑하는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라 믿었다.
“어쩌다가 어깨가 다 젖었나요? 또 급하게 왔군요.”
구염락을 본 장서열이 화 마마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막 방 안에 들어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고개를 기울인 그녀의 귓가로 붉은 비녀 장식이 늘어졌다. 한층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농교는 가서 따뜻한 물을 가져와 폐하를 씻겨 드려라.”
말을 마친 장서열이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구염락은 감히 한기가 도는 몸으로 장서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싱긋 웃는 얼굴 위로 성숙하고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짐짓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인의 미소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인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구나…….”
구염락이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갑자기 뒤에서 연분홍 연꽃을 든 혜령이 불쑥 나타났다.
두 개의 큰 잎사귀 위로 맑은 연분홍 꽃 한 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꽃은 엄동설한 아래 뜻밖에 아리따운 모습으로 삽시간에 보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장서열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 예쁘네요…….”
혜령이 완정에게 꽃을 건네자 완정이 서둘러 이를 장서열에게 갖다 바쳤다. 구염락은 미소를 머금으며 욕실로 향했다.
장서열은 연잎 위에 놓인 눈송이를 보고 더욱 놀라 구염락이 들어간 욕실을 향해 물었다.
“정말 바깥에서 자란 건가요? 어디서 구했기에 이렇게 예쁘죠?”
정말로 이렇듯 추운 날씨에 자란 꽃이라면 실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서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곧 얇은 비단 병풍을 넘어 구염락의 답이 들려 왔다.
“맞혀 봐.”
장서열이 즐거운 얼굴로 연꽃의 꽃잎을 톡톡 건드렸다. 손가락 끝에 닿은 눈꽃이 녹아내렸다. 순간 눈발이 휘날리는 은백색 설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당신이 직접 딴 거예요?”
“그래.”
희미한 물소리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딴 건지 맞히면 그곳에 데려가 줄게.”
“정말요?”
가까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구염락은 하마터면 물속에서 뛰쳐나올 뻔했다. 순식간에 얼굴을 붉힌 그가 고개를 돌린 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몸을 씻었다. 물을 부으러 온 하인의 발걸음 소리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터였다.
“언제 들어왔어? 깜짝 놀랐잖아.”
장서열은 구염락이 놀라자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당신 정말 재미있네요.”
구염락이 뒤를 돌아보았다.
“웃기는.”
이어 그는 그녀가 쳐다보지 못하도록 다시 몸을 돌려 씻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러지 마. 내가 자객으로 오해해 공격할까 두렵지도 않아?”
마치 자신의 몸을 훔쳐봐서 원망스럽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잠시 구염락을 바라보던 장서열이 방금 꽃잎을 만졌던 손가락으로 그의 넓은 등을 찔렀다.
“누가 보고 싶대요?”
장서열은 곧 손을 거두었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얼음 같은 한기가 곧장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구염락은 순간 온몸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구염락은 얼른 고개를 숙인 채 일순간 일어난 흥분을 숨겼다. 애써 마음을 비우고 목욕을 마친 그가 순식간에 장서열의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이미 도포를 걸치고 성숙한 남자의 멋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서열이 야릇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기도 안 닦고 뭐 해요? 젖었잖아요.”
구염락은 감히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때마침 탕약을 갖고 들어온 완정 덕분에 주의력이 분산되었다. 그 틈을 타 장서열을 데리고 욕실을 나온 구염락이 애매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오늘은 뭐 했어?”
연꽃과 함께 욕망 또한 자취를 감췄다. 장서열은 정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탕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별거 없었어요. 탕약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지요.”
밤의 장막 같은 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연꽃보다도 그 꽃이 핀 장소를 더욱 아름답게 여겼다.
구염락은 화 마마가 건네는 다른 탕약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은 후 이를 도로 가지고 가게 했다. 이어 뒤돌아 선 그는 장서열의 곁에 앉아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팔을 둘렀다.
“조금만 더 지나면 밖에 나가 걸을 수 있어. 방금 그 꽃이 어떻게 이 엄동설한에 핀 건지 궁금하지 않아? 짐이 궁 안에 온천이 솟구쳐 나오고 기이한 향기가 나는 곳이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 꽃송이들이 잇달아 모여 핀 모습이 정말 보기 좋더군.”
구염락이 손을 내밀어 장서열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계속 누워 있는 것도 힘들겠지. 내일 같이 가자. 오늘은 눈이 내렸으니 추워서 안 돼.”
탕약을 다 마신 장서열이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려 잠시 주무르는 것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깨끗한 물로 입 안을 헹구어 탕약 냄새를 없앤 뒤 다시 그에게 어깨를 주무르게 했다. 그녀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궁에 그런 곳이 있었어요?”
“진 공공이 알려 주더군. 버려진 지 몇 년 된 곳이야.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궁에는 갑작스레 주인의 관심을 잃은 곳들이 널려 있었다. 까닭 없이 주인에게 미움을 받게 된 장소들은 몇 대에 걸쳐 눈에 띄지 않으면 안 좋은 소문에 휩싸여 점점 더 황폐해졌다. 이는 광활한 황궁에서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숙련된 손길로 장서열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는 반쯤 꿇어앉고 있었지만 그녀보다도 훨씬 키가 컸다.
하인들은 황제가 꿇어앉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조용히 함께 무릎을 꿇었다. 장서열은 등 뒤의 구염락을 톡톡 두드리며 하인들을 보라고 손짓한 후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구염락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자세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장서열은 어깨에 계속 힘이 느껴지자 미소를 머금고 있던 표정을 점점 굳혔다. 그가 자신의 얼굴에 남긴 촉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전 욕실에서 그의 욕망을 보았다.
하지만 장서열은 지금 회임 중이었다. 앞으로 일 년 동안은 그의 시침을 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그에게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폐하, 만정을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