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짙게 깔린 안개 속, 수풀이 빽빽한 곳에 위치한 국암사는 구불구불한 산 중턱에 놓여 있었다. 일 년 내내 향불을 피우는 사찰은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계절과 관계없이 국암사의 후원(后院) 가옥은 언제나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로 방이 모자랐다.
하지만 이렇듯 녹록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국암사는 본래 초라한 곳에 거주하던 황제의 생모에게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다.
어느덧 노쇠한 얼굴을 한 약연은 나무 대야를 앞에 둔 채 손에 든 회색 수건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 아이는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은 거지?’
황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떳떳하지 못한 일이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깨끗한 명성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불결한 일은 저 멀리 처박아 두고 불경하고 불손하다는 꼬리표를 달지 않던가.
약연은 어째서 구염락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마땅히 자신을 궁으로 데려가 성모(圣母)로 모시고 태후의 대항마로 내세워야 했다.
일이 성사되면 그녀는 반드시 아들을 위해 모든 장애물을 숙청하고, 최후에 웃는 사람이 누구인지 서숭산에게 똑똑히 보여 줄 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약연은 비구니 차림으로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여리고 하얗던 피부는 이미 세월의 흔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절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 그녀의 손은 더는 예전의 부드러움을 회복하지 못했다. 약연은 이대로 국암사에 갇혀 고독한 일생을 보내야 한다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약연은 쥐조차 찾아오지 않는 거처를 둘러보며 그 남자가 매일같이 여인을 갈아치우는 상상을 했다. 그녀의 마음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뜻을 이루는데 자신만 홀로 초라하게 이곳에 남아있지 않은가.
약연은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밝은 색상의 옷감을 보지도, 연지를 바르지도 못했다. 또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와 영광, 그리고 사랑했던 남자까지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못했다.
약연은 나무 대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상이 걸린 손으로 천천히 뺨을 어루만지다가 순간 무섭게 부어 오른 손가락에 놀라 얼른 손을 거두었다.
‘아니야! 나는 아름다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야!’
과거에 약연은 모든 남자를 놀라게 할 미모를 갖고 있었다. 성질 급한 서북왕(西北王, 서숭산)도, 수많은 미인을 거느린 풍윤제도 모두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었다.
약연은 국암사에 너무 오래 있었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이곳을 떠나 아들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약연은 일전에 아들을 본 적이 있었다. 생모의 앞에서 굳이 야심을 감추지 않던 그 아이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노력 끝에 아이는 생존했고, 이후 단숨에 도약하여 마침내 오늘날 대주국의 제왕이 되었다.
이제 세상이 약연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 줘야 할 때였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녀는 서숭산과 풍윤제가 쥔 바둑돌에 불과했고, 하나뿐인 아들도 결국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그녀는 두 남자에게 혈육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안위 또한 보장 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용만 당하다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마땅히 받아야 할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두 남자에게 사랑 받은 조옥언은 넘칠 만한 권세를 누렸고, 심지어 그녀의 딸은 궁에 들어가 약연의 아들이 힘들게 쟁취한 모든 것을 쉽게 누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조옥언과 장서열은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남자는 자신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조옥언만큼 미색이 빼어나지 않아서? 아니면 조옥언만큼 신분이 높지 않아서?’
신분을 생각하자 약연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그녀는 기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은 천하의 지존인 황제였다.
‘나와 밤을 보낸 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약연 역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황손을 불쌍히 여겼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토록 우수한 사내를 어느 여인인들 따르지 않겠는가. 훗날 반드시 수많은 황손이 자신을 할마마마라 부르게 될 것이다.
약연은 미래의 손주들을 생각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웃는 눈매는 젊은 여인보다 더욱 매혹적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누구도 이를 볼 수 없었다.
약연은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대야 속에 담긴 물을 전부 자신의 몸 위로 쏟아 부었다. 바닥에 떨어진 나무 대야가 큰 소리를 냈다.
머리를 땋은 어린아이가 놀라서 뛰어들었다.
“부인! 왜 그러세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부인! 큰일 났어요! 부인이 기절했어요!”
아이가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가 사람을 불렀다. 약연은 차가운 물이 흥건한 바닥 위로 엎드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약연은 기절한 척했지만 정말로 현기증이 일었기에 이대로 병이 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모에게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어쨌든 아들은 태의를 불러 주고, 그녀를 보러 올 것이다.
어쩌면 불쌍한 생모를 보고 궁으로 데려가 호강을 시켜줄지 모를 일이었다.
약연은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기대에 찬 눈을 감았다. 용포를 입은 구염락이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궁으로 모셔 가는 장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권씨 가문의 존귀한 두 여인은 하루아침에 냉궁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물거품처럼 모든 영화가 사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깍듯하던 하인들은 다들 뒤로 물러선 채 이들을 모른 척했다.
익숙한 얼굴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건장한 궁녀들과 아직 훈련이 덜 된 어린 궁녀들이 가끔씩 그녀들의 시중을 들어 줄 뿐이었다. 심지어 새로 궁에 들어온 궁녀들은 두 여인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궁녀들은 가끔 양이 아주 적은 음식을 내려놓거나, 석탄을 전해 주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권여아는 그들을 붙잡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들은 매번 겁먹은 사슴처럼 날듯이 도망갔다.
권여아는 눈앞이 깜깜했다. 그녀의 고모는 태후였다. 태후가 고열에 시달리는데도 태의는 오지 않았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권여아는 황제의 비(妃)였다. 아직 품계가 강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을 나기 위한 물품이 고작 이것뿐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두려워졌다.
‘설마 다시는 나가지 못하는 걸까? 가문에서 우리를 포기한 걸까?’
분명한 건 황제가 두 여인을 벌하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권여아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피해자였다. 그녀는 황제가 어째서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지, 왜 해독을 시켜 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권여아였다. 며칠 전 황제와 함께 식사까지 한 여인!
“아니야!”
권여아는 미친 사람처럼 냉궁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날 보내 줘! 날 내보내 줘!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왜 나를 이곳에 가두는 거야! 왜!”
문밖에는 차가운 바람소리 외에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밀려드는 공포에 숨이 막힌 권여아가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날 내보내 줘! 내보내 줘!”
황량한 바람소리가 전해졌다. 권여아는 양팔을 껴안은 채 대문 구석에 쪼그려 앉아 몸을 벌벌 떨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공포만이 가득했다.
만정은 경옥전에 갇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 침실 외에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만정의 활동 범위는 하루아침에 침대와 화장대로 좁혀졌다. 다행히 방이 충분히 큰 덕분에 첫날까지는 갇혀 지내는 데 큰 불편이 없었다.
하지만 벌써 사흘째였다. 만정은 속절없는 감금에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영원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서열 언니는 괜찮을까? 다시는 폐하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거라면… 그런데 폐하께서는 내가 갇혀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
만정은 금과 옥으로 조각된 침대 위에 앉아 불안한 눈을 굴렸다. 그녀는 곁에 있는 궁녀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그녀의 시중을 들러 온 궁녀는 고작 두 명뿐이었고, 심지어 이들은 한 시진 전에 나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만정은 갑작스러운 제재에 매우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어제 왕 마마는 혹 조금이나마 자유가 허락되더라도 얌전히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엄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무례하게 만정의 눈을 쳐다보기까지 했는데, 이전의 공손함이 사라진 모습은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꾸짖는 어른처럼 매서웠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만정은 더욱 경솔히 굴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있어도 한기가 전해져 오는 걸 느꼈다.
왕 마마는 만정을 위로할 시간이 없었다. 궁의 모든 태감과 궁녀를 대상으로 한바탕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출생부터 가족과 친지들의 재산, 취미까지 모든 게 조사 대상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두철미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모든 하인들은 가깝거나 뒷배가 되어 준 세력을 자백해야 했고, 누구에게 어떠한 편의를 제공했는지도 빠짐없이 털어놓아야 했다. 만일 양쪽에서 진술한 말이 불일치하거나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항을 보고하지 않은 경우 예외 없이 혹형에 처해졌다.
각 궁의 노비들은 한 무더기씩 교체되었다. 높은 직위에 있는 궁인들 중 교활한 계책을 쓰지 않은 자는 없었다. 비록 황제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닐지라도 묻는 말에는 모두 바짝 정신을 차려 대답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제가 대대적인 조사를 벌인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하인들을 모조리 없앨 생각은 아니었다.
왕 마마는 안도하는 동시에 조로전의 영향력과 현비의 악랄함, 그리고 그녀가 예법과 도리를 무시하는 무법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일국의 태후를 정말로 가둘 줄이야. 심지어 현비에게서는 조금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왕 마마는 만 귀인이 현비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위협을 당한 후 자기 몸을 돌보기에도 정신이 없는 현비가 당장 몸이 나아진다 한들 잡다한 일에 신경 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울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현비가 이런 일을 당한 이상, 본래도 까다로운 성격이 더욱 날카로워졌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간 현비는 만 귀인만큼은 살갑게 대해 주었으나 이제 그녀가 만 귀인을 높은 자리에 앉힐지, 아니면 궁 밖으로 내보내 다른 길을 열어 줄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