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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28)화 (228/449)

제228화

“가마를 준비하라.”

장서열은 완정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 올랐다. 그녀는 대청에 서서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남겨둔 채 조석궁으로 향했다.

조석궁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병풍과 명가의 서화 작품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깨질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남김없이 부서져 있었다. 구염락과 권서함은 아예 바깥으로 나와 대치 중이었다.

권서함은 이미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였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섬뜩함을 느꼈다. 황제의 명성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과연 일등공과 제일군을 손에 넣고 육세지란을 가벼이 평정한 인물다웠다. 권서함은 전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구염락의 기세에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다.

권 노야의 노쇠한 얼굴이 해쓱해졌다. 아들이 황제에 맞서기 시작한 그때부터 권 노야는 더 이상 권씨 가문의 장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망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이동생은 정도를 벗어났으며 황제는 분노했다. 이제 권씨 가문은 끝장이었다.

가마에서 내린 장서열이 곧장 외쳤다.

“폐하……!”

동시에 구염락이 권서함의 머리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구염락의 마음은 온통 비통함으로 가득했다. 그와 맞서는 권서함조차도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심경이 떠오른 그녀의 얼굴 위로 감동이 일었다. 이내 뒤돌아 선 그녀는 다시 가마에 올라 자리를 떠났다.

정원에 선 구염락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당장 그녀를 뒤쫓아가고 싶었지만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구염락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반드시 권씨 가문에 알려 줘야 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은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걸.

“태후와 권 비와 관련된 모든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그렇다면 짐은 더 이상 두 여인의 생사와 권씨 가문을 연결 짓지 않을 것이다.”

권 노야는 이제껏 한 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제왕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황제는 분명 아직 어렸다. 하지만 태자 시절에 보여 줬던 기품과 우아함이 모조리 사라진 그는 선황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냉혹했다. 대주국은 지난 백 년간 지나치게 안일한 향락에 젖어 있었으므로 확실히 오늘날 강단과 결단력을 갖춘 제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권 노야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도 황제와 담판을 지을 만한 승부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권씨 가문의 충성을 바라는 것인가. 그러나 권 노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권 노야의 시선이 아들에게 향했다. 권서함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중 유일하게 멀쩡한 의자에 간신히 앉아있었다. 권 노야는 아들이 중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황제의 앞에서 감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권 노야는 문득 큰 소리로 웃고 싶어졌다. 어차피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황제와 맞서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권 노야에게는 여전히 아들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결국 권 노야는 어린 제왕 앞에서 늙은 신하의 모습을 버렸다.

“미천한 소신이 감히 마지막으로 폐하께 두 여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 드리옵니다.”

구염락이 냉랭한 눈을 치켜떴다. 권 노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인간은 각자의 운명을 따를 뿐이었다. 그는 몇 세대에 걸쳐 명망을 이어 온 권씨 가문이 더는 가문의 힘으로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탄을 금치 못했다.

“폐하, 권 한림은 죄가 없사옵니다.”

권서함을 힐끗 바라본 구염락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떠났다. 이제 황실의 여인들과 권씨 가문은 더 이상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두 여인의 생사는 오로지 장서열의 손에 달려 있었다.

소리자가 황급히 약사발을 가져왔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폐하…….”

탕약을 바라보던 구염락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장서열을 생각하자 다시 자책감이 일었다. 그는 약사발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비의 처분이 끝나면 그 여인들을 모두 냉궁에 처넣고, 그 하인들은 지하 감옥에서 심문하라.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자는 끌어내어 개에게 먹여라.”

깜짝 놀란 소리자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 * *

태후가 황손을 해쳤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번져 나갔다. 누군가는 태후가 그녀의 조카에게서 황손을 보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권씨 가문이 권력을 도모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수군거렸다. 또 누군가는 현비가 연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스스로 벌인 자작극이라고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입에 올리는 쓸데없는 화젯거리에 불과했다. 백성들은 그토록 위엄 넘치는 황실에서 이처럼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이들은 은근한 만족감을 느꼈다.

많은 이들이 황실과 얽힌 권씨 가문을 궁금해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유지하는 당사자들 때문에 누구도 이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 사이 자녕궁과 정심전은 주인을 잃었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은 이 나라의 태후였다.

두 여인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하듯 권 씨 가문은 이러한 치욕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제왕에게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행여나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노심초사했다.

상황을 지켜본 조정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혹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어떤 이는 줏대 없는 권씨 가문을 몰래 욕했지만, 또 어떤 이는 권씨 가문이 괜히 앙갚음을 하려 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순식간에 태후는 덧없는 최후를 맞이한 이가 되었고, 누구도 감히 황제의 처분을 비판하지 못했다.

사흘 뒤, 조정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황제는 권씨 가문에 죄를 묻지 않았고 권서함은 바깥출입을 삼갔다. 서풍엽 역시 무서울 정도로 냉정을 유지했다.

현천기는 장서열이 구염락을 부리는 솜씨에 탄복했다. 게다가 그 솜씨는 갈수록 발전하고 있었다.

명혜전(明慧殿) 조정에 선 현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중간쯤 서 있는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으로 온갖 감정들이 솟구쳐 올랐다.

현천기는 자신이 고통스러울 때 다른 이가 평안한 표정을 짓는 꼴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과 똑같은 심정인 이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런 현천기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건 서풍엽이었다.

‘장서열이 회임을 했다는데 대체 서풍엽은 무슨 생각이지?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거야?’

현천기는 정말로 서풍엽에게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궁금했다. 과연 장서열이 아이를 낳는 게 좋을지, 그녀의 아이가 뱃속에서 아홉 달 동안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혹 태어날 아이가 재앙을 몰고 오지는 않을지, 만에 하나 장서열과 아이 모두 죽게 되지는 않을지, 서풍엽이라면 마땅히 궁금하게 여겨야 하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장서열이 회임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는 앞으로 장서열이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에게 모든 진심을 다할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

‘서풍엽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영원을 맹세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하는 것을 보면 마땅히 슬프고 고통스러울 텐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까? 밤마다 황제를 저주하고 있는 거라면?’

현천기는 온갖 상상을 하며 속으로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현천기는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자였다. 그는 서풍엽이 분명 속으로 고통에 젖어 있지만 겉으로 애써 평온한 척하는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것이야말로 서풍엽이 취해야 할 자세였다. 진실로 잘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여전히 과거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건 현천기뿐이었다.

서풍엽은 현천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현천기에게는 과연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서풍엽은 자신이 신출귀몰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현 대인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계속 염탐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서풍엽은 자신이 그의 관심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천기는 서풍엽이 침묵을 지키자 코웃음을 쳤다.

‘장서열이 입궁했을 때 이미 모든 게 끝났어. 그러니 너 자신도, 황권의 횡포도 과소평가하지 마.’

서풍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와 구염락의 잘못을 물고 늘어지며 오직 자신만이 장서열을 지켜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조회가 끝나자 조정 대신들은 괜히 불똥이 튀는 일이 없도록 단 한 명도 따로 황제를 알현하지 않았고, 평소 올리던 분량의 반의 반 정도로 상소문을 줄였다. 이 과정에서 굳이 황제의 손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다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넘치는 상소문은 단지 평소에 앓는 소리를 하는 신하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온 연경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고요하고 작은 저택에서는 서숭산이 궁의 소식을 전해듣고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일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태후가 음식에 약을 뿌렸다면 구염락은 총애하는 후궁을 위해 궁중 세력을 제거할 게 아니라 국암사에 있는 친모를 황궁에 모셔오는 것으로 태후에게 교훈을 줘야 했다. 그래야 장서열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후에 장서열과 태후가 다시 맞붙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두 여인이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는 동안 권씨 가문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게야!’

분노한 서숭산이 손에 든 찻잔을 던져 깨뜨렸다. 구염락을 가리켜 불효자라고 욕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 그의 야만성이 드러나지 않은 걸 욕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서숭산은 무엇보다도 이제 갓 제위에 등극한 어린 황제 하나 어쩌지 못하는 권씨 가문이 가장 짜증스러웠다.

‘그토록 치욕을 당해 놓고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다니!’

이런 식이라면 이제 누구도 약연(若然, 구염락의 친모)을 궁에 들이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리라. 그게 큰 문제였다.

‘과연 여인의 계책은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전혀 쓸모가 없군!’

서숭산의 눈 속에 서북의 냉기로 단련된 야심이 번뜩였다. 우회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직접적인 방식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서숭산은 황제로 하여금 어떻게든 생모를 인정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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