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권서함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누이동생은 입궁한 이상 이미 황실 사람이었다. 권여아가 어떻게 지내든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충고일 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었다.
물론 권서함은 권여아가 문제를 일으켰을 리 없다고 자신했다. 그녀는 단아하고 차분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설령 나쁜 생각을 품었다 해도 이를 행동으로 옮겼을 리 만무했다.
권씨 부자는 대체 황제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설마 황후 자리를 놓고 권씨 가문과 합의를 보려는 것이라면…….
까마득한 천장이 펼쳐진 황실의 분위기는 언제나 사람을 압도했다.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공손한 태도로 조석궁에 들어섰다.
주변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커다란 대전 안에는 시중을 드는 이들이 빼곡히 서 있었지만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순간 마음이 무거워진 권서함은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에 휩싸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고요함이었다. 권서함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한 지면에 어렴풋한 그림자가 비쳤다. 저 멀리 황제의 옷자락이 보였다.
침묵에 잠긴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위압적으로 변해갔다. 권 노야은 어렴풋하게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황…….”
“권 각로는 과연 대주국 사대부의 표본답소. 매번 짐을 놀라게 만드니 말이야. 짐이 그대에게 어떠한 상을 내리는 게 좋을까…….”
“…….”
“헌데, 먼저 그대의 가문이 짐의 자손을 해친 독사 같은 여인을 다시는 배출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구염락의 말에서는 일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순간 대야에 담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한기를 느꼈다.
대경실색한 권 씨 부자가 서둘러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폐하! 저의 여식은 비록 고집이 세고 무지하나, 감히 황실의 혈통을 해할 정도로 간악한 아이는 아니옵니다! 폐하, 부디 철저히 조사해 주십시오!”
‘장서열이 회임을 했다고?’
놀란 표정을 짓던 권서함이 이내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폐하, 권 비마마의 품성은 폐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사옵니다. 권 비마마는 결코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를 분이 아니옵니다. 마마께서는 이제 막 입궁한 몸으로, 설령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 해도 절대…….”
권서함은 순간 또 다른 가능성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를 본 구염락의 입꼬리에 냉혹한 비웃음이 걸렸다.
“왜 말을 하다 말지? 그래, 권 씨 가문에서 배출한 비빈은 한 명이 아니지.”
분노한 구염락이 탁자 위에 있던 옥사자를 들어 올려 내던졌다.
“충신의 여식이자 명문세가 출신인 대주국의 태후가 감히 황손을 해하다니! 과연 대주국의 어른으로 그 모범이 될 만하다!”
“…….”
“권 각로, 짐은 그대가 조정에서 보여주고 있는 활약을 존중하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대의 가문이 내 자식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오!”
구염락이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권 노야를 노려보았다.
“짐이 그대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런 식으로 짐을 곤경에 빠뜨리고 권 비에게 황자를 낳게 할 속셈이었겠지. 그렇게 권씨 가문에게 치욕을 준 황실을 한바탕 갖고 논 뒤, 권 비의 아이를 황위에 올리려던 속셈을 짐이 모를 줄 아오?”
구염락이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 그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자신과 장서열의 아이가 이런 가증스러운 족속들에게, 잘난 척 권력을 탐하는 권씨 가문에 의해 다쳤다.
구염락은 황권을 우습게 여기는 귀족들을 경멸했다. 이들은 황제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믿는 괘씸한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서숭산에게 그러했듯 사람들의 기억 속에 본보기로 남겨 줄 필요가 있었다.
권 노야는 바닥에 꿇어앉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태후가 움직였을 줄이야…….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어쩌면… 어쩌면…….”
“그대는 태후가 화압(画押)으로 죄를 자백한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로군.”
말을 마친 구염락이 핏자국이 찍힌 문서를 권 노야 앞으로 내던졌다. 권 노야는 순간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비단 위에 적힌 내용과 화압은 이 사태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비단을 움켜쥔 권 노야는 속으로 비통하게 통곡했다.
‘누이야, 어찌하여 그런 일을 벌인 것이냐! 어찌! 네 짓이 아니라도 네가 한 짓이 되는 것이 궁의 이치이거늘, 이 어리석은 것!’
권 노야는 체념했다. 그는 해명을 위해 몸부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성인군자도, 감성이 풍부한 문인도 아니었다. 황제는 약육강식을 완벽히 체득한 맹수였다.
“폐하, 소신은 이미 늙어 기력이 쇠하였으니 부디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권서함은 예상했다는 듯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으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나라를 위해 반평생을 힘써 온 아버지였다. 그런데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다니…….
구염락은 두 사람이 마치 자신의 속내를 간파했다는 듯 거래를 하려고 들자 즉시 이들을 찢어 죽이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가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짐이 하찮은 각로 자리나 하나 빼앗자고 이러는 것으로 보이오? 당신들 권 씨 가문이 나라의 삼 대 벼슬을 꿰차고 앉아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누린대도 짐은 상관하지 않소. 누구나 그대처럼 소인배 같은 생각을 할 거라 착각하지 마시오.”
“…….”
“짐은 권 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에 오르는지 전혀 관심 없소. 하지만 짐은 절대 그대를 용서하지 않아. 짐의 아이를 돌려주시오! 내 아이를 돌려내!”
구염락의 일그러진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흠칫 놀란 권 노야와 권서함은 순간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 속에 피로 물든 증오가 번득이고 있었다.
권서함은 황급히 아버지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권서함은 그제야 황제가 단순히 권모술수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권서함의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는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는 것이었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우리 대주국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니, 분명 폐하께 다시 건강한 황손을 안겨드릴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순간 구염락의 눈에서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건강’이라는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구염락에게 이들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구염락은 폭주하여 권서함에게 달려들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중상모략이나 일삼는 주제에! 내 아이를 돌려내!’
권서함은 반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온화한 선비의 모습을 버린 권서함이 옷깃을 날리며 날카롭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구염락은 맹렬한 기세로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잘난 척하는 이들에게 신물이 났다. 죽어도 제 잘못이 뭔지 모르는 이들을 다스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조석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궁녀와 태감들은 허둥대며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에 황급히 들이닥친 시위와 일등공은 이미 권서함의 전신에 낭자한 상처를 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시위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정말로 권서함을 때려죽일 기세인 황제를 이상하다 여겼다.
혜령은 기둥 뒤에 숨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리자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그는 초조한 눈으로 점점 수세에 몰리는 권서함과 그 주변을 에워싼 시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제는 요즘 제때에 약을 먹고 있어 병환에는 문제가 없었다. 특히 지난번 장서열이 그의 증세를 목격한 이후로 더는 정신을 잃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폐하의 증세가 바깥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소리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급히 자녕궁으로 달려갔다.
그는 현비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적어도 황제가 피로 강물을 이루는 참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자녕궁은 진작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비명과 흐느낌이 뒤섞인 자녕궁의 상황은 조석궁보다 더욱 처참했다.
도착한 소리자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마! 어서 조석궁으로 가 보십시오! 폐하께서 권 각로와 권 한림을 상대로 싸우고 계십니다. 이러다 권 각로 일가를 모두 죽일 듯합니다! 현비마마, 부디 조석궁으로 가 주십시오!”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 태아를 보전하는 탕약을 마신 덕분인지 호흡이 돌아왔고 메스꺼운 느낌도 조금 나아졌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는 태후의 모습과 시사각각 변하는 권여아의 안색을 보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중 압권은 특히 소리자가 들어왔을 때 권여아의 얼굴이었다. 권여아에게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장서열은 즐거움을 느꼈다. 귀한 신분의 여인이 더는 고상하게 굴지 않는 모습은 장서열의 심신을 편안케 했다.
그러나 소리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권여아의 안색은 다시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조금 전 정신을 차린 후 기세 좋게 발버둥을 치던 태후는 아예 움직이지 못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장서열의 기분이 더욱 좋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서열은 냉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의 미소는 절로 구염락의 냉랭한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왜 갑자기 조용해졌지? 너희의 뒷배인 권씨 가문은 너희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하게 해 줄 텐데? 너희는 분명 권씨 가문이 곧 황제 폐하를 찾아가기만 한다면 언제고 반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장서열이 손에 든 하늘색 손수건을 어루만졌다. 마음이 몹시 후련했다.
“그렇다면 실망했겠군. 폐하께서는 너희 가문의 체면을 봐 줄 생각이 없다. 너희의 의지처가 지금 감히 폐하에 맞서고 있다는군. 세상에! 어떠한 말로를 맞게 될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과연 그들이 너희를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순간 격렬하게 한 차례 몸부림을 친 태후가 다시 잠잠해졌다. 장서열이 손수건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가문까지 연루되다니 마음이 아프겠지…….”
장서열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 가문이 너의 뒷배가 되어줄 줄 알았다면 반대로 너 때문에 가문이 멸문지화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누굴 원망하겠느냐. 조용히 태후 노릇이나 할 것이지, 왜 쓸데없이 죽음을 자초해서는…….”
현비는 권씨 부자에게 닥친 재난과 그로 인해 그녀가 받게 될 영향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결국 소리자가 초조한 얼굴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그를 경계하던 장서열이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오자 소리자가 조용히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마마, 폐하께서 상태가 좋지 못하십니다… 마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비마마.”
그 말에 장서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