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호 태의가 굳은 얼굴로 도포 앞자락을 들어 올리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현비마마, 소신의 판단으로 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듯하나… 현재 맥이 안정치 않아 함부로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태의원에서 진맥에 능한 이를 불러 함께 진맥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호 태의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만일 복중 태아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호 태의는 예정대로 쉬지 않고 괜히 부지런하게 당직을 선 것을 몹시 후회했다. 하필 이런 진맥을 하게 되다니. 진맥한 바에 의하면 뱃속의 아이는 생명이 위태로웠다.
호 태의의 낭패와 달리, 순간 조로전에는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주인이 회임을 한 건 무엇보다도 좋은 소식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감히 주인과 총애를 다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함께 기뻐하려던 화 마마는 웃음기 없는 호 태의의 표정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서열 역시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바로 태의원에서 회임에 능한 이를 부르라 명했다.
장서열은 일주일 전,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정상적인 월경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만일 최근 며칠 동안 식욕이 없고 속이 울렁거리지만 않았다면 태의를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회임이 맞다면 지난 번 월경은 월경이 아닌 출혈이었다.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호 태의의 얼굴은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장서열의 기분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심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열일곱에 처음으로 회임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일 년 정도가 더 일렀다. 그리고 같은 시기, 구염락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장서열이 굳은 얼굴로 복부에 손을 올렸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다.
“심각한가?”
호 태의는 바닥에 꿇어앉아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장서열은 더는 묻지 않고 묵묵히 화장대의 한 귀퉁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건드릴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녀는 건강했고, 전생에서 상아(裳儿)를 회임했을 때에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고작 일 년 일찍 회임을 했다고 이렇게 큰 변화가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손을 썼으리라. 장서열의 이목을 피해 그녀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태의원에서 진맥에 뛰어난 다섯 명의 태의가 도착했다. 하인 모두를 내보낸 후 방 안에는 세 명의 측근 시녀만이 남았다.
태의들은 돌아가며 진맥을 본 뒤, 모두들 입을 모아 아이를 포기할 것을 권유했다. 호 태의는 남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돌보아 온 장서열을 위해 몰래 입을 열었다.
“설령 폐하께서 아이를 원하신다 해도 마마께서 반드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내 몸에 해가 된다는 뜻인가?”
장서열이 직설적으로 묻자 호 태의가 답했다.
“그것이 아니옵고… 복중 태아에게 결함이 있습니다. 이는 마마의 앞날에도,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결함?”
호 태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무서운 집착이 느껴졌다. 호 태의는 감히 장서열을 쳐다보지 못하고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 그것이… 마마께서 복용하신 약이 신체에 퍼진 기간이 오래되어 이미 태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옵니다. 낳으신다 해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으니 애써 위험을 감당하려 하지 마십시오.”
“…….”
“마마, 이는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이 노신의 권고를 들어 주십시오.”
장서열은 순간 태후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했다.
‘과연 재주가 좋구나. 이렇게 빨리 나를 공격하다니!’
충분히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서열은 언제 태후의 계략에 빠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불을 젖힌 장서열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화 마마와 농교가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마마!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고정하십시오!”
장서열은 팔을 휘둘러 농교의 손을 뿌리쳤다.
전각 안팎에 있던 하인들 모두가 장서열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꿇어앉았다. 농교와 완정, 그리고 화 마마는 장서열이 후에 후회할 행동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그녀를 꼭 붙잡았다.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태후의 시녀가 손을 썼겠지만, 어선방에서 만든 음식은 장서열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태후와 다른 비빈들도 모두 먹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마, 고정하십시오! 폐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다가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화 마마는 행여나 장서열이 구족을 멸할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녀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상대는 황제의 모친이자 만백성의 어른인 태후였다.
농교와 완정 또한 울면서 바닥에 꿇어앉아 장서열을 설득했다.
“마마, 마마!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태의가 침대에서 나오시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마!”
침대에서 자리보전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후의 노여움을 사는 건 중죄였다.
갑자기 한 줄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놔주어라!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용포를 입은 구염락이 바깥의 엄동설한보다 더욱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살을 에듯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서 있었다.
구염락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등 뒤로 뒷짐을 지고 선 그의 주먹은 온통 한기를 머금은 핏줄로 가득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태후가 벌인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태후 외에 이렇듯 치밀한 계책을 사용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장서열의 복중 태아가 제거되었을 때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것도 태후뿐이었다.
‘저군전에서부터 손을 쓰다니!’
자녕궁으로 뛰어든 장서열은 태후가 채 위엄을 갖추기도 전에 곧장 따귀를 날렸다. 그녀는 즉시 건장한 두 마마들을 시켜 태후의 위에 올라 따귀를 치게 했다.
‘네가 그리도 계략에 능하다 이거지? 그리도 재능을 썩히기가 아까웠더냐?’
“여봐라! 당장 첩가관(贴加官,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물을 뿌려 질식하게 만드는 형벌)을 대령하라!”
놀란 권여아가 뛰어들었다.
“현비마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곳은 자녕궁입니다. 당신이 때리고 있는 건 이 나라의 태후마마요,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그만하십시오!”
자녕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태후의 머리에 꽂힌 봉황 비녀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두 뺨은 눈 깜짝할 새에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네년들이 전부 정신이 나갔……!”
“입을 막고 쳐라!”
장서열이 죽일 듯한 시선으로 태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지금 가장 크게 분노했다. 방심하고 자만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모든 장기말을 손에 쥐고 있다고 믿었던 거만함에도 화가 났다.
결국 태후는 장서열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그 누구보다도 하늘을 찌르던 그녀의 자존심을 부수고, 감당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권여아는 태후의 입이 막히는 모습을 보았다. 장서열의 사람들이 태후를 마치 하인을 대하듯 때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권여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어쩔 줄을 몰랐다.
“여봐라! 여봐라! 당장 태후마마를……!”
“입 닥치거라. 한 마디만 더하면 너도 저 꼴이 될 것이다.”
권여아는 장서열이 두렵지 않았다. 자고로 이치에 맞으면 천하를 누빌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나아갈 수 없는 법이었다.
장서열은 지금 도리를 지키기는커녕 감히 태후에게 천인공노할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장서열은 더 이상 황제를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봐라! 윽……!”
농교가 사람을 시켜 권여아의 입을 막고 한쪽으로 끌어냈다.
태후는 장서열을 노려보며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녀의 눈 속에는 고통과 함께 통쾌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무엇보다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어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개 비빈일 뿐인 네가 감히 태후에게 이토록 버릇없이 굴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로구나!’
첩가관(贴加官)이 준비되자 하인에 의해 태후가 앞으로 떠밀려 나왔다. 그녀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드러났다.
“싫어! 네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이 나라의 태후다! 장서열 따위가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느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이거 놔!”
태후는 체면을 불사하고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장서열은 차가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완정은 주변의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의자를 옮겨왔다. 그리고 장서열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곧이어 약사발을 가져 온 그녀가 호흡이 불안정한 장서열에게 이를 바쳤다.
장서열이 즉시 경고하듯 완정을 노려보았다. 완정이 서둘러 고했다.
“태아를 보호하는 약입니다. 우선 복용하신 후, 나중에 화가 가라앉으면 그때 다시 결정하십시오, 마마.”
말을 마친 완정이 격려하는 눈길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증오 섞인 눈으로 자녕궁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탕약을 한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완정은 즉시 탕환(糖丸, 고대의 사탕) 한 알을 건네주었다.
장서열은 고개를 돌려 의자 밑에 깔려 있는 태후를 보았다. 하인이 기름을 먹인 종이를 태후의 얼굴 위로 덮고 있었다.
“싫어!”
태후가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권여아는 공포에 질렸다. 그녀는 이들이 이렇게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하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점심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괜찮았다. 하필이면 그가 오늘 찾아오는 바람에 성공을 눈앞에 둔 일이 실패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권여아는 황제가 먼저 자진하여 자신을 떠올려 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구염락이 자신에게 반찬을 집어주던 모습을 생각하며 행복에 젖은 그녀는 그를 배웅한 뒤 태후에게 달려와 온갖 귀여움을 부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변고가 벌어지다니. 장서열은 미친 게 분명했다. 그녀가 저지른 일은 구족이 멸문을 당할 대역죄였다. 태후는 나라의 어른이었고, 사사롭게는 권 씨 가문 수장의 친동생이었다. 장서열은 분명 제 손으로 무덤을 파고 있었다.
순간 권여아의 마음속에서 시커먼 상상이 고개를 들었다.
‘만일 이 자리에서 고모가 죽는다면…….’
장서열은 천하의 대역 죄인이 되어 무슨 짓을 해도 황후 자리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녀에게 내렸던 은총과 후광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황후 자리는 이제 권여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전제는 그녀의 고모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권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녀에게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던 태후가 죽는다면…….
권여아는 온몸이 떨려와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다. 불경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태후는 그녀의 고모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참혹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권여아는 더욱 힘주어 발버둥 쳤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고모를 구해야 해. 고모를 구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