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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24)화 (224/449)
  • 제224화

    같은 시기, 권여아와 만정은 가문의 안위를 부탁하기 위해 구염락을 찾아갔다. 구염락의 성격상 도를 넘는 여인들은 냉궁에 처넣는 것이 마땅했지만, 천만다행히 진 공공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 공공의 말은 매우 간단했다. 그는 작게나마 은혜를 베푸는 건 황제에게 매우 간단한 일이니,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너무 냉정하게 뿌리치지 말라고 간언했다. 말을 마친 진 공공은 슬쩍 조로전 방향을 바라보았다.

    진 공공의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구염락이 모를 리 없었다.

    “그것들이 감히!”

    “그들이 감히 그럴 것인지 아닌지는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은 현비마마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마음에 울분이 찬 누군가는 분명 현비마마께 화풀이를 하려 들 것입니다.”

    “…….”

    “다른 후궁들도 현비마마께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폐하께 총애받고 있다는 걸 보여 주셔야 합니다. 다른 후궁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아 주신다면…….”

    구염락은 심사숙고 끝에 진 공공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나 끝끝내 정심전이나 경옥전의 감사 연회에는 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조로전을 찾았다.

    장서열도 평소와 같았다. 그녀는 구염락이 두 후궁의 가문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구태여 참견하거나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구염락이 두 후궁을 찾지 않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구염락은 어째서 다른 여인을 취하지 않는 걸까?’

    장서열은 평소 황제를 모시는 데 있어 결코 정성을 다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보통 일상적인 잡담을 늘어놓곤 했는데, 주로 그날 들었던 가극이나 어화원에 핀 꽃에 대해서였다. 심지어 그녀는 겨울이 되면 궁중에서 솜옷을 몇 벌이나 만들었는지와 같은 사소한 일까지 그에게 시시콜콜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구염락은 마치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들으며 맞장구까지 쳐 주었다. 덕분에 장서열은 쑥스러움 없이 계속해 그에게 잡담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각자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장서열의 호랑이는 이제 두 눈만 수를 놓으면 완성이었지만 구염락의 공무는 영원히 끝날 줄을 몰랐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공무를 미뤄두고 다른 후궁의 처소에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난 보름간 구염락은 줄곧 얌전하게 굴었다. 장서열 때문에 국무를 소홀히 하지도, 조례를 등한시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는 날이 갈수록 더 성실해져 아무리 흠을 잡으려 해도 도통 충고할 구실을 찾을 수 없었다.

    장서열은 그저 기다렸다. 그녀는 분명 권여아가 움직일 거라 믿었다. 왕 마마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만정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터였다. 세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건 모두 권여아에게 달려 있었다.

    ‘모든 건 순리에 맡기자.’

    장서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구염락은 그녀의 바람대로 사흘에 한 번씩만 밤새도록 그녀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날 밤, 그윽한 눈빛으로 돌변한 구염락은 큰 침대에 누운 장서열의 아담한 체구를 위에서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갈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열아, 벌써 며칠째야…….”

    장서열은 순간 잠에서 번쩍 깼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구염락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과연 그에게 이로울까?

    “해도 돼…? 응? 해도 돼…?”

    이미 달아오른 그의 눈 속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못 참겠어… 조금도 충분하지 않아…….”

    난 잘하니까 가끔씩 조금 더 원하는 건 괜찮아.

    물론 구염락은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며칠을 잘 참다가 꼭 한 번씩 제멋대로 굴곤 했다.

    장서열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던 구염락은 이를 보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용과 봉황이 그려진 자색 그림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염락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날이 샐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날, 구염락을 보내고 난 뒤 장서열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왠지 내키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냈다.

    황궁에서의 시간은 취미를 찾을 수 있다면 비교적 쉽게 흘러갔다. 연주를 듣고, 극을 감상하고, 궁녀들이 전하는 보고를 듣고 있으면 가끔은 희곡 한 편을 채 감상하기도 전에 하루가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간 내명부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평온했다. 다만 세 후궁이 머무는 전각은 매우 시끌벅적했다.

    두 후궁이 입궁한 후 한 달이 다 되도록 구염락은 이들을 찾지 않았다. 장서열은 이쯤 되면 권여아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어쩌면 권여아가 이미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했다.

    장서열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이면 여전히 장신구를 고심해 고를 만큼 기분이 좋았고, 오후에는 하인들과 엽자패(叶子牌)를 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장서열은 이따금씩 과연 권여아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을지 궁금했다. 황제를 현혹한 죄? 감히 황제를 홀로 독점한 죄?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권여아가 공격을 시작해야만 자신도 반격에 나설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면 장서열은 언제나 뼛속까지 궁중 생활에 적응이 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궁중에서 벌어지는 암투가 대단히 위험해 보일지 몰라도 장서열에게 이는 성공 여부를 떠나 전부 귀찮은 과정일 뿐이었다.

    가을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가운데 살을 에는 듯한 북풍이 몰아닥쳤다. 아침 무렵 창문 바깥에는 초겨울 얼음과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얗게 뒤덮인 창밖 풍경은 다시 겨울이 다가왔다는 걸 알려 주었다.

    만정은 심심할 때마다 장서열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매우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동생은 그동안 못다 한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만정은 장서열이 입궁한 뒤 헌원가와 당자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또한 헌원 씨 가문의 유일한 아들 헌원상이 주 태부의 딸과 정혼을 했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이때까지 만정은 인생의 쓴맛을 전혀 모르는 발랄한 소녀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만정은 웃음을 잃었다. 그녀는 가끔씩 조로전에 들렀으나 지난 한 달간 독수공방이 이어지자 결국 숨길 수 없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폐하께서는 나를 잊으신 걸까?’

    황제는 두 후궁이 입궁했다는 사실을 아예 잊은 게 분명했다. 그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서열만을 찾았다. 물론 만정은 장서열이 총애를 받는 것이 기뻤지만 결코 슬프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구염락은 정심전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예상치 못한 황제의 행보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폐하께서 드디어 권 비마마께 은총을 내리려는 걸까?’

    구염락이 정심전을 찾아간 일은 점심이 다 되어 눈을 뜬 장서열에게도 전해졌다. 순간 잠이 싹 달아난 장서열이 의아한 듯 물었다.

    “권 비가 청한 것이냐?”

    이건 권여아답지 않은 태도였다. 한 달 동안 잘 참아온 그녀가 이제 와서 구염락을 불렀을 리 없었다.

    농교가 입술을 삐죽이며 실망한 듯 말했다.

    “권 비께서 부르신 게 아니고 폐하께서 직접 납셨다고 합니다.”

    농교는 황제가 아가씨를 버리고 갔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금치 못했다.

    ‘구염락이 스스로 갔다?’

    장서열은 묘한 얼굴로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권여아가 막 행동을 개시할 참인데 굳이 입을 막다니…….’

    이는 필시 진 공공이 손을 쓴 것이리라.

    장서열은 머리카락을 한데 모으며 계속해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녀는 혹시 자신이 너무 낙관적이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아니면… 구염락은 이렇게 사소한 일까지 세심히 신경 쓸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장서열은 새삼 구염락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더 이상 구염락에게서 불만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더는 생떼를 쓸 이유가 없었다.

    “완정.”

    장서열은 생각을 가다듬으려 애를 썼다. 그녀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서 호 태의를 불러오너라.”

    “마마, 어디 편찮으십니까?”

    순간 모든 하인들이 하던 일을 멈춘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주인의 속뜻을 헤아리고자 했다.

    ‘마마께서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총애를 다투려 하시는 건가? 이번에야말로 마마께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폐하를 붙잡아두려고 하시는 걸까?’

    ‘이런 때에 태의를 부르는 건 정심전을 너무 짓밟는 처사 같은데… 마마께서 너무 분별없이 행동하시는 게 아닐까?’

    ‘마마께서 이렇게 나오신다면 폐하께서는 오늘밤에도 반드시 조로전에 오실 수밖에 없지. 그럼 정심전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인들의 표정은 제각기 다 달랐지만 긴장한 기색만큼은 똑같았다. 그들은 일이 실패하여 행여나 주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혹은 성공하더라도 현비가 총애를 다툰다는 게 기정사실이 될까 봐 염려했다.

    장서열은 긴장한 하인들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측근 시녀들의 얼굴에 떠오른 먹구름은 그녀를 일순간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다. 하인들은 그 즉시 조로전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정말 몸이 안 좋아서 그러니 가서 호 태의를 불러와.”

    완정은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이럴 때 태의를 부르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마는 총애 다툼을 매우 꺼리는 분이지만 이렇게 되면 남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농교와 화 마마가 이미 분부를 받들고 있는 데다 그들보다 약삭빠른 어린 태감이 이미 태의원으로 달려 나간 후였다. 그래서 완정은 토를 달지 않고 주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호 태의는 장서열을 여러 차례 진맥했다.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진맥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내외도 하지 않고 장서열의 혀와 눈꺼풀 안쪽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호 태의의 얼굴은 더욱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두 손가락으로 장서열의 배 위를 짚었다. 몹시 엄숙한 표정이었다.

    주변을 메운 하인들은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전부 긴장했고, 마지막에는 매우 비통한 얼굴이 되었다.

    ‘호 태의의 표정이 왜 저리 어둡지? 설마… 설마 마마의 목숨이…….’

    농교와 완정도 긴장하여 호 태의를 주시했다. 결국 연장자인 화 마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호 태의, 마마의 상태가 어떠신지요? 마마께서는 요즘 줄곧 잘 지내셨습니다.”

    태의는 의술뿐만이 아니라 눈치도 뛰어나야 했다. 특히 후궁을 모실 때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호 태의는 조로전에 오기 전 현비는 몸이 약하니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황제의 명을 미리 받은 상태였다. 그의 뜻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호 태의는 눈치껏 현비의 상태를 꾸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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