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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23)화 (223/449)

제223화

궁에 들어온 이상 장서열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대적할 만한 상대와 직접 싸우기도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는 그닥 흥미가 없었다.

사실 장서열은 사람을 따끔하게 다스리는 왕 마마의 수법에 탄복했다. 전생에서 이미 그녀는 왕 마마에게 적지 않은 것을 배웠던 터였다. 그런 왕 마마가 만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자 몹시도 마음이 놓였다.

장서열은 차를 마시며 극을 관람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팔색조의 매력을 선보이는 잘생긴 소생(小生, 중국 전통극에서 젊은 남자 배역을 맡은 이)에 몰입하여 점점 마음을 졸여 가며 극을 감상했다.

화 마마는 다소 우월감을 느꼈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왕 마마는 현재 주인에게 일어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주인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노비가 아무리 뛰어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현재 내명부의 주인은 현비였다. 어차피 왕 마마는 화 마마를 만나면 원치 않아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을 잡은 주인을 모실 때 따라오는 이점이었다.

화 마마는 겉으로는 의기양양해 보였지만 그간 왕 마마와 마주치는 것을 꺼려해 왔다. 왕 마마는 절로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자로, 두 번 마주치기가 무서운 사람이었다.

* * *

한편, 태후는 친히 정심전에 행차했다.

권여아는 침착한 모습으로 태후를 맞이했다. 어젯밤의 분노는 이미 얼굴에서 지운 후였다. 그녀는 단정하고 대범한 모습으로, 또한 권씨 가문의 귀하디귀한 적녀로서 위엄을 드러내 보였다.

태후는 마마들의 부축을 받으며 선두에 서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윤기가 흐르는 혈색을 자랑했다. 풍윤제의 죽음도 그녀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 최후에 태후가 되는 것이 그녀가 꿈꿔 온 가장 큰 소망이었기 때문이리라.

호갑(護甲)을 치켜든 태후가 정심전에서 내온 차를 마시며 비교적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차는 권씨 가문의 자녀들만 마실 수 있는 옥로(玉露)였다.

“모두들 물러가라.”

슬쩍 권여아를 쳐다본 방 마마가 궁녀들을 거느리고 물러갔다. 태후 곁에 있던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정심전에는 권씨 가문의 두 여인만이 남았다. 삽시간에 온화한 모습을 버린 태후가 매서운 눈으로 권여아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어째서 궁등을 끄게 한 것이냐? 수년간 궁중 생활을 해놓고도 아직도 궁의 이치를 모르는 게야? 그 좋은 기회를 그렇게 날려 버리다니, 조로전만 좋은 일을 시켰구나!”

“…….”

“장서열은 한창 때이니 언제 회임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가 되면 네 신분이 아무리 고귀한들 황실의 장자를 낳은 여인과 비교가 되겠느냐?”

권여아는 손수건을 꽉 쥐었다. 태연히 하인들을 대할 때와 달리 원성이 가득한 얼굴을 들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저도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그가… 그가 저를 그렇게 대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뭘 어찌했느냐? 결국 한 치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질 않았느냐! 넌 그가 아직도 과거처럼 우리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던 그 구염락인 줄 아느냐? 그는 그리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

“선황의 사인(死因)은 아직까지도 미궁에 빠져 있다. 정녕 구염락이 그 의혹에서 자유로울 성싶으냐? 그는 분명 선황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애초에 그런 악랄한 자에게 따뜻한 대우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순간 권여아는 우는 것도 잊은 채 놀란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마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태후는 씁쓸한 냉소를 금치 못했다. 여인은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른다는 말을 그녀의 조카가 아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듯했다.

“방금 내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거라.”

눈물을 닦은 권여아가 결연하게 말했다.

“고모, 저를 원망하시나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고모께서는 이제 고귀한 태후이시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자유로이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러나 만에 하나 불충한 마음을 품은 자가 고모의 말을 옮기기라도 한다면, 이는 가문을 멸족시킬 대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권세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것도 다 소용없는 일이 되겠지요.”

“…….”

“이제 막 태후의 자리에 오르시어 최고의 권세를 누리시는 분이 불효자라는 오명을 씌워 폐하를 곤경에 빠뜨린다면 이는 결코 고모께도 좋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얻은 지위를 다른 이에게 양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태후마마, 부디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권여아의 말에 태후가 손에 쥔 담청색 손수건을 차분하게 움켜쥐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원망에 차 있던 모습을 지운 권여아의 눈가에는 어느새 총기가 더해져 있었다.

“우리 여아의 말이 옳구나.”

권여아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고집스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

권여아는 다시 한번 분노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젯밤 구염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을 돌렸다. 게다가 그가 향한 곳은 다른 곳도 아닌 조로전이었다. 권여아의 충격이 큰 것도 당연했다.

권여아는 구염락이 특별히 자신만을 총애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공평하게 대해 주기를 바랐다.

처음 풍윤제가 장서열을 입궁시켰을 당시, 그녀는 권여아보다 두 품계나 낮은 양원이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현비(贤妃)로 승격되었다. 그래도 권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서 구염락은 한 마디 설명조차 해 주질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장서열과 구염락은 어렸을 적 친분이 조금 있었던 것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추억을 얼마나 깊게 쌓았단 말인가. 고작 어린 시절의 추억 따위가 자신이 구염락을 위해 벌인 희생보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은혜를 갚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 방법이 꼭 총애일 필요는 없었다.

권여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구염락에게 은혜를 베푼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장서열보다 미색이 뛰어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은 분명 장서열보다 높은 신분을 갖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장서열보다 자신을 총애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권여아는 억울했다. 만약 구염락이 약간의 여지라도 남겨 뒀다면 권여아도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면서까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염락은 장서열 앞에서 그녀에게 망신을 주었다.

태후는 권여아를 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높은 신분의 덫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은 궁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였다.

“궁에 들어온 이상 너는 죽을 때까지 황제의 여인이다. 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의 희로애락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거라. 언제까지 권씨 가문이 너를 보호해 줄 수는 없느니.”

“명심하겠습니다.”

태후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끝내 오늘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풍윤제가 승하한 후, 총애를 등에 업고 날뛰던 귀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덕분에 태후는 원하던 미래를 맞이한 후 마음 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적당한 시기에 권여아를 도와줄 수 있었다.

따라서 태후는 권여아를 깨우쳐 주기 위해 따끔한 말을 해야 했다. 구염락을 예전의 그 소년으로 대한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권여아였다.

태후는 아래에 선 권여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토록 상황 파악이 확실한 조카는 도무지 전날에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알면 됐다. 난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구나.”

태후는 훈계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심전은 좀 익숙해졌느냐? 네 취향에 맞춰 꾸민 곳이다. 안심하고 마음을 편히 먹거라.”

태후는 마지막 말을 뱉으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권여아를 바라보았다. 권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을 편히 먹으라고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무슨 뜻인지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 * *

권서함은 권여아가 입궁하고 난 뒤 보름이 지나 한림원 4품으로 승격되었다. 이번 인사는 권씨 가문의 명성과 권서함의 학식에 힘입어 거의 정해져 있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구도 이와 권여아의 입궁을 연결 짓지 못했다.

하지만 권서함이 승격한 후 사흘째 되는 날, 장서전 역시 두 계급이 상승한 6품 관원이 되었다. 그는 제일군의 천총(千總, 하급 무관의 직급명)이 됨과 동시에 다섯 개 성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이는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황제의 근위군(近衛軍)으로 실권을 쥔 자리였다.

사람들은 이번 인사를 낱낱이 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뭇사람들의 눈에, 이는 마치 권서함의 승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누군가가 황제를 부추겨 장서전까지 똑같이 승격시킨 꼴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현명한 비()이고 누가 미인계를 쓰는 비()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조정 대신들은 장서전이 육세지란(六勢之亂)에서 어떤 활약을 보였는지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구염락은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그는 스스로 잘난 줄 아는 신하들을 등한시했다. 대신 진실로 뛰어난 신하들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공무를 간소화하고 군사 시설을 확충하는 데 힘썼다.

황제로 등극한 후 구염락은 이백여 명의 관원을 파면시키고 오십여 명의 탐관오리를 처벌했다. 그는 특히 관원들의 청렴을 강조하며 대주국에 뿌리 깊게 박힌 악습을 뽑아내고자 했다. 관직을 가진 이들은 사실상 전부 실각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구염락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비리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법에 따라 엄벌했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은 차츰 ‘비리’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선황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속물들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기에 다른 이들보다 많은 일에 무덤덤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노력으로 얻은 능력이 아니기에 자랑할 거리는 못 되지만, 이것이야말로 장서열이 손에 쥔 가장 큰 승부수였다. 이를 이용하지 않는 건 바보짓이었다.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조로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앞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그가 조정 일을 거론할 때에도 그녀는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오라버니 장서전의 출세를 바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구염락은 조로전에서 머무는 시간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아무리 피곤한 하루를 보내도 안심하며 쉴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로서는 조로전에 가는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장서열은 영원히 구염락의 편에 서 있을 듯 한없이 그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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