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열은 빙그레 웃으며 비단 꽃이 장식된 비녀를 골라 화 마마에게 건넸다.
강산은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쉬이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장서열은 비록 전생에서처럼 구염락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습관적으로 주변의 적을 제거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녀는 결코 남 좋은 일에 힘을 보탤 생각이 없었다.
머리에 꽂힌 비녀를 어루만지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 그녀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바라보던 화 마마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권 비가 어찌나 크게 성을 내었는지 이번 일을 숨기기 위해 방 마마가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마마, 권 비는 정말 자고 있었던 걸까요?”
“그런 걸 알아 뭐에 쓰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서열이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먼저 등을 껐으니 권 비도 남을 탓할 수는 없겠지. 참, 진 공공은 요즘 어찌 지내느냐?”
아직 권 비의 일에 마음이 가 있던 화 마마는 주인이 왜 갑자기 진 공공에 대해 물어보는지 몰라 의아해하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 진 공공은 선황께서 승하하신 뒤 줄곧 거처 밖을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에게서 전해 들었사온데, 최근 은퇴할 뜻을 내비쳤다고 합니다.”
장서열은 내전(内殿)에서 나와 창가에 있는 귀비탑에 앉았다.
“진 공공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지?”
“예, 올해로 마흔다섯입니다. 헌데 마마, 어찌하여 이를 궁금해하시는지요?”
화 마마는 왠지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그리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지. 진 공공에게 사람을 보내 폐하를 모시며 궁중의 도리를 일깨워 드릴 마음이 있는지 물어보거라.”
장서열은 구염락이 내명부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제왕이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궁의 이치에 밝은 태감이 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 좋았다. 이는 구염락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방지해 주리라.
잠시 사방을 둘러본 화 마마는 주변에 믿을 만한 측근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마마… 진 공공은 선황을 모실 당시 궁에서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입니다. 왠지…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합니다.”
특히 화 마마는 진 공공의 존재가 현재 현비가 누리는 권세에 결코 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 온 대태감과 대마마(嬷嬷)들 중 서로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이는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대부분 생사를 함께한 교류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선황제를 모셔 온 진 공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적지 않았다.
장서열은 그리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진 공공을 등용한 건 구염락이었다. 따라서 구염락에게 그를 붙여 준다면 자연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 공공의 등용이 장서열에게 미칠 만한 영향을 묻는다면, 가장 큰 가능성은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장서열은 만약 자신이 지금 당장 죽는다면 어머니와 오라버니에게 분명 큰 은혜가 내려질 거라 생각했다. 과거의 정을 생각한 구염락은 분명 남아 있는 자신의 식솔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 번의 고생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방책이었다.
“반드시 그를 정중히 대하거라. 언젠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진 공공이었다. 화 마마가 어찌 감히 그를 정중히 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사십여 년 동안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선황을 모셨으며,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아랫사람에게 큰소리 한 번 쳐 본 적이 없는 호인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대체 왜 진 공공을 기용하려는 것인지, 그게 과연 좋은 일인지 화 마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 마마는 그저 그를 눈여겨보고 기용한 성의를 봐서라도 진 공공이 현비에게 적의를 품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궁에는 비밀이 없었다. 전날 밤 정심전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은 비록 궁의 모든 이가 알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알아야 할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 되었다. 이는 왕 마마가 있는 경옥전도 마찬가지였다.
왕 마마는 만정의 아침 시중을 들며 전날 밤 권 비가 궁등을 끄고 시침을 들지 않은 일과, 황제가 피곤했을 권 비를 ‘걱정’하며 다시 조로전으로 돌아간 일을 들려주었다. 아무 감정이 없는 평온한 목소리는 누구의 편도 들고 있지 않았다.
놀란 만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네 명의 궁녀가 만소를 밀어내고 자신에게 신발을 신기려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권 비는 폐하를 모시고 싶지 않은 걸까?”
만정이 의혹에 찬 눈을 깜빡이며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 거친 파도가 사그라든 만정의 마음속으로 약간의 근심이 떠올랐다.
잠시 만정을 바라보던 왕 마마는 다시 만정의 옷자락으로 공손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어젯밤에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드셨던 것처럼 권 비마마 또한 많이 피곤하셨을 겁니다. 궁등을 꺼뜨린 건 조로전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인들이 벌인 일이겠지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둔하게 굴려면 끝까지 아둔하게 굴어야 한다. 어쩌면 황제가 만 귀인의 단순한 모습에 마음이 끌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에 띄게 음흉하거나 옹졸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왕 마마는 차라리 만정이 쓸데없는 사색 없이 아예 단순한 생각을 하게끔 유도했다.
고개를 끄덕인 만정은 처음 가졌던 의혹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감추었다. 권씨 가문은 무수한 문하생을 거느린 대주국 제일의 귀족 가문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권여아는 만정과 비슷한 또래였다. 만정은 어떤 면에서는 권여아도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소녀라고 생각했다.
가장 골치 아픈 주인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주인과 남의 충고를 듣지 않는 주인이었다. 다행히 왕 마마의 눈에 만 귀인은 그런 고질병은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만 귀인에게도 발전의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다만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되었다. 조로전의 노여움을 산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왕 마마는 네 명의 궁녀에게 만 귀인의 몸단장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네 사람은 만정의 세수를 도울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이 가져온 도구들은 모두 금을 입혀 조각한 것으로 하나하나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마치 예술품과 같았다. 심지어 물을 담는 세숫대야조차 귀비가 사용했던 물건임을 입증하듯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왕 마마는 만 귀인이 황궁의 비품에 놀란 틈을 타 네 명의 궁녀 중 우두머리인 의흔(依痕)에게 눈짓을 보냈다. 왕 마마의 뜻을 알아챈 의흔은 수건을 건네던 틈새로 슬쩍 다리를 내밀어 앞으로 다가오던 만소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만소는 아직 궁의 규율을 익히지 못했기에 넘어질 때 반드시 혼자 넘어져야 한다는 법도를 알지 못했다. 넘어지던 만소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곁에 있던 사람의 옷을 움켜쥐었다. 만정은 옷이 찢기는 걸 느낄 새도 없이 만소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네 명의 궁녀는 주인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곧장 몸을 날렸다. 여섯 사람이 한데 엉킨 방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심지어 만소는 넘어지면서 세숫대야의 물을 만정의 머리 위에 뿌린 채였다. 다행히 네 명의 궁녀가 제때에 몸을 던져 만정의 충격을 최소화한 덕분에 만정은 겨우 참담한 꼴을 면할 수 있었다.
진노한 왕 마마가 즉시 소리쳤다.
“여봐라! 만소를 끌고 나가라! 감히 마마를 해하려 하다니, 저런 아이가 어찌 궁에 들어왔단 말이냐! 당장 끌고 나가라!”
만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몸의 통증보다 더욱 무서운 건 왕 마마의 불호령이었다. 만소는 몹시 놀라 허둥댔다. 몸을 날려 바닥에 엎드린 만소가 만정에게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마마! 살려주십시오. 노비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마마…….”
만정은 의흔에게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녀들이 제때에 몸을 날려 보호한 덕분에 그녀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만소가 용서를 구하자 그녀는 곧바로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왕 마마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마마, 방금 만소의 행동은 대역죄에 해당합니다. 몸을 부딪쳐 주인을 쓰러뜨린 죄는 마마께서 아무리 관용을 베푸신다 해도 용서받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마마가 아닌 다른 주인을 쓰러뜨렸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부디 만소의 처벌을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마.”
말을 마친 왕 마마는 고개를 들어 만정이 함부로 명을 내리지 못하도록 눈짓했다. 이에 만정은 차마 만소를 용서해 주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왕 마마의 행동을 묵인하기로 했다. 이미 그녀는 왕 마마를 몹시 신임하고 있었다.
왕 마마는 사람을 시켜 만소를 끌고 가게 했다. 만소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왕 마마의 소관이었다. 그녀는 규율을 지키지 않는 노비를 쉽게 봐줄 생각이 없었다.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게 혼내지는 않을 것이나, 혼자 넘어지지 않고 주인에게 해를 입힌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만소는 아직 궁중 법도에 익숙하지 않아 반드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노비도 심사숙고 끝에 그 아이를 끌고 나가라 한 것이니 부디 마마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몸에 생긴 상처를 바라보던 만정은 자신의 시중을 들던 네 궁녀의 모습과 만소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궁은 그녀의 집이었던 만 씨 가문이 아니었다. 만정은 만소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만소에게 열심히 궁의 법도를 익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왕 마마는 다시 만 귀인의 발끝으로 시선을 돌리며 구태여 소란을 피우지 않는 만 귀인의 결정을 매우 흡족히 여겼다.
경옥전에서의 일은 화 마마를 통하여 장서열의 귀에 들어갔다. 가극이 이어지는 정자 밖으로 하늘하늘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수나무 향기가 공기 중에 흩날렸다.
차를 마시던 장서열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남 말하기를 좋아하는 화 마마에게 굳이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왕 마마를 경옥전에 남게 했던 이유가 바로 만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왕 마마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만정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우연한 기회로 만소를 손보았을 뿐일 테지만, 어쨌든 왕 마마가 만정을 지키고 있는 한 만소는 아무리 구염락의 침대에 기어 올라가고 싶어도 제 주제부터 먼저 파악해야 했다. 왕 마마는 분명 만소의 가냘픈 얼굴이 거칠어질 때까지 쉽게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