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불쾌한 기색 없이 미소 짓는 그녀를 본 구염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끌며 천천히 걸어왔다.
“싫어. 밖에 비가 오잖아. 짐이 비에 맞아 병이라도 걸리면 네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구염락이 장서열의 허리를 감싼 채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완정에게 외투를 건네받은 장서열은 그런 구염락을 안아 주며 한 손으로 그를 토닥였다.
“당신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권씨 가문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어요. 권여아는 태후마마와의 일로 줄곧 마음에 응어리가 있어요. 그런데 폐하께서 또 저와 함께 침소에 드시면 권 비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겠지요.”
먼저 정신을 차린 그녀가 구염락의 몸 위에 외투를 덮어 준 후 끈을 묶어주었다.
“가서 권 비를 잘 위로해 주세요. 그녀도 힘들 거예요.”
“…….”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어요. 제가 이런 일로 질투할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저희 가문에는 수많은 첩실과 서출들이 있었지만 제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일로 소란을 피운 적이 없어요. 그러니 얼른 가요.”
사실 이건 극도로 몹쓸 비유였다. 조옥언은 이미 장신성과 이혼한 뒤였고, 겉보기에 번지르르했던 혼인 생활은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조옥언이 무수한 첩실을 용인했던 것은 순전히 장신성이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구염락은 왠지 자신이 장서열에게 그녀의 아버지와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장신성처럼 향락에 빠져 부인과 자식을 등한시 할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편으로 구염락은 장서열이 감히 질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명부의 모범이란 자고로 황제가 어느 한 여인만 총애하지 않고 수많은 비빈에게 두루 은혜를 내리는 데 있었다.
구염락은 움츠린 장서열의 손을 잡고 깊은 애정이 담긴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문득 그날 밤 꿈이 떠올랐다. 조로전 바깥에 홀로 외롭게 서 있던 그녀와, 다른 여인의 품에 안겨 있던 자신의 모습.
구염락은 여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장서열 이외의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대체 왜 그토록 생생한 꿈을 꾸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꼭 가야 하는 거야? 내가 안 가면 네가 난처해질까?”
그 말에 순간 멍하니 그를 보던 장서열이 곧 싱긋 웃었다.
“나야 당연히 당신이 가지 않기를 바라죠. 하지만 당신이 규율대로 권 비에게 간다면 권씨 가문과의 관계에 적잖은 도움이 될 거예요. 권여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권 노야는 달라요. 그와 틀어지면 신하들의 마음도 돌아설 거예요.”
구염락은 웃는 그녀를 보며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웃어 보였다.
“네 말이 맞아. 조금만 기다려. 곧 돌아올게.”
말을 마친 구염락은 장서열을 놓아준 뒤 혜령과 소리자를 데리고 몸을 돌려 나갔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주방에 미리 인삼탕을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했다. 춥고 습한 날씨에 두 전각을 오가는 건 힘든 일이었다.
정심전의 등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권여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아직 잠들지 않은 채였다. 방 마마는 했던 이야기를 또 다시 반복하며 계속해 권여아를 타일렀다.
“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직 폐하께서 오지 않으셨는데 침소에 드시다니요. 마마께서 화가 나신 건 이 노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일이 아닙니다.”
권여아는 몸을 뒤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마마가 탄식하며 말했다.
“마마, 우선 일어나십시오. 노비가 궁등을 밝히고 오겠습니다. 이렇게 깜깜하게 하고 계시면 남들의 비웃음을 삽니다.”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권여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안 돼! 이제 와 궁등을 밝히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볼멘소리를 마친 권여아는 다시 이불을 들추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만약 그가 정말로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면 늦게라도 찾아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마땅했다.
방 마마는 할 수 없이 주위를 서성거리다 다시 돌아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마, 폐하께서는 그저 조로전에서 상소문을 읽고 계신 것뿐입니다. 잘 아시면서 이렇게 어리광을 피우시다니요. 지금 밖에는 비까지 오고 있질 않습니까. 만약 폐하께서 납시다가 등불이 꺼진 것을 보고 마음이 돌아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걱정도 안 되십니까?”
그 말에 권여아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구염락이 정말로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아 줘야 했다.
권여아는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니 자신이 어린애처럼 성질을 부려도 질책하지 않으리라.
권여아는 왠지 자신이 없었지만, 밖에 비가 내리자 내심 구염락이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녀는 방 마마가 계속 자신을 설득한다면 못 이기는 척 궁등을 밝히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미 한 시진이 넘게 권여아를 설득한 방 마마는 그녀가 꿈쩍도 하지 않자 더는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궁이라고 해서 황제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이니, 어쩌면 폐하께서는 옛 시절을 떠올리며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권 비가 이토록 소란을 피우는 건 그만큼 황제에게 진심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순간 권여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조상(早霜)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뛰어들었다.
“마마! 마마! 황제 폐하의 장등(长灯)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노비가 궁등에 불을 밝힐까요?”
권여아는 깜짝 놀라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이렇게 늦게 와 놓고 버선발로 나가 시중들어 주기를 바라는 거야?
방 마마는 권여아가 기뻐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정말로 황제가 오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마마, 정말로 궁등을 켜지 않으시려고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권여아는 조로전에서 구염락이 망설임 없이 제게 떠나라고 지시했던 일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상심했다. 그는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며 푸대접한 것을 반드시 부끄럽게 여겨야 했다.
‘어떻게 장서열이 보는 앞에서 날 그리 대할 수 있어!’
살며시 눈물을 닦은 권여아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주방에 가서 탕을 데우라고 일러라.”
방 마마는 그제야 웃었다. 주인은 그저 살짝 토라진 것뿐, 이제 폐하께서 살살 달래어 놓으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권여아는 가만히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조금은 우쭐해 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몇 번이고 달래 줘야만 못 이기는 척 그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정심전에 도착한 구염락은 칠흑처럼 깜깜한 전각을 바라보며 빗속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소리자에게 물었다.
“권 비가 잠든 게 아니냐.”
소리자가 즉시 공손하게 답했다.
“예, 폐하. 보아하니 벌써 침소에 드신 것 같습니다. 권 비마마께서는 입궁 후 줄곧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으니 피곤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권 비마마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조로전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소리자를 쳐다본 구염락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로전으로 가자.”
구염락이 몸을 돌린 후, 소리자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권 비마마, 저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다 자업자득입니다. 누구나 현비마마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궁등을 꺼 놓은 게 무슨 뜻인지 정녕 폐하께서 모를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조로전은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다. 비록 희미한 빛이었지만 구염락은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조로전으로 돌아온 구염락은 옷을 갈아입었다. 잠이 든 장서열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구염락은 잠시 장서열을 귀찮게 굴다가 곧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껴안고 잠이 들었다.
장서열은 조금 피곤했지만 그래도 구염락이 권여아를 만나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정심전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건 순전히 권여아의 능력이 부족한 탓일 뿐, 어찌 되었든 그를 보낸 장서열을 탓할 수는 없었다.
같은 시각, 정심전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분노한 권여아는 적지 않은 물건을 던지고 부쉈다. 겁에 질린 방 마마가 계속해서 그녀를 말렸다.
“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입궁한 후궁이 첫날부터 경거망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궁에서의 생활을 장담할 수 없었다.
“마마, 진정하십시오. 천만다행히 먼저 궁등을 끄신 건 마마이시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체면이 깎이는 일은 아닙니다.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마마!”
방 마마는 혹시라도 돌려 말했다가 권여아가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매우 직설적으로 주인을 만류했다.
방 마마는 이미 전각에 있던 모든 노비를 내보낸 후였다. 그녀는 오늘밤 권여아가 벌인 일이 부디 소문나지 않기를, 혹은 이야기가 너무 적나라하게 퍼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다음날, 화장을 하던 장서열에게 간밤에 권여아가 벌인 소동이 전해졌다.
“폐하께서 납셨을 때 이미 정심전의 궁등은 꺼져 있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피곤한 권 비마마를 ‘걱정’하시어 정심전에서 발길을 돌리셨다고 합니다.”
화 마마는 주인이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특정 부분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장신구를 고르던 장서열의 손이 잠시 주춤했다. 의아한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런 거지?’
권여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장서열은 붉은 비녀를 손에 쥔 채 동경(铜镜, 구리거울)을 바라보았다.
‘권여아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설마 구염락이 옛정을 생각해 자기를 가엾게 여길 거라고 생각한 건가?’
물론 그렇다고 해도 권여아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서열은 왠지 조금 우울했다. 이는 줄곧 단정한 언행으로 타인의 귀감이 되어 온 권여아의 모습과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전생에서 한 번도 불필요한 쟁탈전을 벌여본 적이 없고, 그저 바라만 보아도 호감을 주었던 귀한 여인이 그런 잔꾀를 쓰다니? 게다가 그 계략은 효과도 없었다.
장서열이 손에 든 비녀를 빙빙 돌렸다. 그녀의 직감은 이것이 바로 권여아를 해치울 절호의 기회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보아 자신이 구염락을 독점할수록 권여아는 더욱 이성을 잃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장서열은 권여아를 돌보아 주라고 구염락을 떠밀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틀어진 권여아는 분명 투정을 부려 구염락을 화나게 할 것이고, 그땐 자신이 손수 권여아를 괴롭히지 않아도 이미 그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될 터였다.
아무도 자신이 권여아를 몰아붙였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이라면 구염락에게 자신이 관용을 베풀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