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신첩,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구염락이 엄숙한 얼굴로 세 사람 곁을 지나쳤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면서도 차가웠다.
“일어나라.”
권여아는 용이 그려진 황색 도포가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코끝에 남자의 송묵향(松墨香, 소나무 재로 만든 묵의 향기)이 느껴지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만정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 철없이 구염락의 곁에서 웃고 떠들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의 목소리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앞으로 나온 장서열은 평소처럼 구염락이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그의 긴장한 뺨을 바라본 장서열은 남들이 보지 않는 사이 그에게 격려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 두 동생은 이제 막 궁에 들어왔습니다. 모두 폐하와 친숙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동생들이 놀라지 않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모르는 이가 보면 폐하께서 무서운 사람인 줄 알 것입니다. 계속 그러시면 동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폐하의 시중을 들겠습니까?”
그 말에 사람들을 등진 구염락이 장서열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 후 이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다.
“모두들 입궁하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짐의 시중은 들지 않아도 되니 이만 각자 돌아가 쉬어라.”
권여아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뒷모습이 돌아서려 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난 일 년 사이 그는 더욱 훤칠해졌을 뿐더러 얼굴선 또한 훨씬 또렷해져 있었다. 과거 의젓할 뿐이었던 그의 모습은 어느덧 제왕의 위엄으로 가득했다.
권여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이제 구염락의 모습에서 과거를 떠올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오라비보다 더욱 남자답고 백옥 같은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매끈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사내의 책임감이 더해진 얼굴은 오히려 훨씬 매력적이었다.
구염락의 시선이 권여아와 만정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떠나지 않는 두 여인을 보며 그의 눈 속에 어렴풋한 짜증이 떠올랐다.
구염락이 입을 열기 전, 장서열이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두 자매가 피곤할까 먼저 배려해 주시다니 역시 폐하께서는 참으로 자상하십니다. 신첩이 두 자매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런 다음 장서열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마음을 써 주셨으니 오늘은 먼저 처소로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앞으로는 폐하를 모시느라 바빠질 겁니다. 나중에 처소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폐하를 쫓아내고 싶더라도 두 자매 모두 꾹 참아야 하는 걸 잊지 마세요.”
순간 언짢은 얼굴로 장서열을 힐끗 쳐다본 권여아가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 몸이 피곤하여 이만 돌아가 쉬고 싶습니다.”
이에 만정도 얼른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도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 쉬겠습니다.”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린 구염락이 손을 저어 두 사람을 내보냈다.
“신첩, 물러가옵니다.”
권여아와 만정이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구태여 장서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권여아는 눈치 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태자 시절 구염락은 겉으로는 유순해 보였으나 결코 그의 의사에 반하는 걸 용납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고,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다.
다만 권여아에게 거슬렸던 것은 굳이 장서열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후궁이 되었다고 잘난 척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이라니. 그가 그렇게 빨리 장서열의 품계를 높여 주지만 않았더라도 현재 황궁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비빈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권여아는 별일이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장서열이 승은을 입은 후 승격되었다면 자신이라고 그러지 말란 보장이 없었다.
지금 내명부에는 오직 세 명의 여인뿐이었다. 그중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그녀가 회임을 한다면 황후 자리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었다.
궁녀가 만정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만정은 앞서 가는 권여아와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권여아는 높은 신분에 궁중 생활에도 익숙했으며 내명부에서의 지위 또한 만정보다 높았다. 게다가 만정은 엄밀히 말하자면 장서열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권여아가 구태여 만정에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만정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멀어졌다. 회랑을 걷던 만정은 권여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만정은 긴장을 풀고 가을비가 내리는 밤하늘을 향해 활짝 기지개를 켰다. 그녀가 곧 우산 밖으로 즐겁게 달려 나갈 차비를 하던 참이었다. 뒤에서 냉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마, 마마께서는 지금 귀인의 지위에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궁에는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시시각각 품행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만 부인께 누를 끼치게 되며, 만씨 가문 여식들이 혼처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정이 작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순식간에 밖에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왕 마마는 평온한 얼굴로 축축하게 젖은 땅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꿈에 부풀어 있는 어린 주인의 마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과연 총기가 남달랐던 현비를 떠올렸다. 황제는 결코 두 후궁을 자상하게 대하지 않았다. 두 여인을 눈여겨 볼 생각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이쯤 되면 현비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대로 현비가 권력을 쥐고, 그 뒤에서 만 귀인이 고분고분 의젓하게 행동한다면 앞으로 궁에서의 생활은 그리 괴롭지 않을 것이다.
만소는 만정이 나가 놀지 못하게 되자 차가운 눈으로 왕 마마를 잠시 쳐다본 뒤 몰래 만정의 옷을 잡아당겨 그녀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이어 기쁘고 쑥스러운 투로 만소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정말 젊으세요. 마마는 황제 폐하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면서요. 참 운도 좋으시지, 아까 노비가 보니 폐하께서 마마를 쳐다보시던걸요?”
만소는 두려워하면서도 흠모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 외로 황제는 준수하고 품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간 만소가 보아온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멋졌다. 만소는 주인을 가까이서 모시는 궁녀에게 승은을 입을 기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나를 좋아해 주실까?’
천하의 패권을 손에 쥔 남자의 여자가 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다.
만정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매인 만소가 먼저 물어 보았기에 그녀는 자매끼리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며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정말? 폐하께서 날 보셨어? 예전에 우린 꽤 친했지. 폐하와 서열 언니, 당자가 모두 어울려 함께 놀았거든. 서열 언니에게 하던 걸 생각하면 성격도 얼마나 좋은지, 난 이제껏 그렇게 자상하게…….”
시중을 드는 남자는 본 적이 없어.
만정은 문득 마지막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튼 폐하께서는 매우 자상하신 분이야.”
그 말에 만소가 의아해했다.
“그럴 리가요. 아까 조로전에서 폐하는 무척 냉정하셨잖아요.”
“일국의 황제니까 당연히 냉정해야지. 하지만 실은 매우 다정한 분이셔.”
말을 마친 만정은 속으로 그가 서열 언니에게 해 주는 것에 딱 절반만큼만 자신에게 잘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왕 마마가 만소를 훑어보았다. 만소는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는 걸 느끼며 부자연스럽게 뒤를 쳐다보았다. 빗속에 선 왕 마마의 싸늘한 얼굴에 순간 소름이 돋은 만소가 만정을 끌고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만소가 만정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왕 마마는 너무 무서워요.”
깊이 공감한 만정이 뒤를 힐끗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를 가르친 교양마마는 왕 마마의 말을 들어서 해가 될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만정은 마마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록 만정은 총명하지는 않았으나, 황궁에서 대놓고 냉담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하인이 결코 예사 인물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만약 왕 마마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비록 큰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할 지라도 원하는 바는 모두 이루면서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왕 마마는 이미 만소가 어떠한 인물인지 정확히 파악한 상태였다. 그녀는 돌아가는 즉시 만소를 가르친 이를 단단히 혼내리라 생각했다. 만일 만소가 또 한 번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더는 주인의 체면을 깎지 않도록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 * *
구염락은 장서열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쳤다. 밖에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염락은 창문을 열었다가 장서열을 생각해 다시 창을 닫았다.
소리자는 이미 상 위에 상소문을 올려놓고 있었다. 구염락은 탁자 앞에 앉아 붓을 들고 바쁘게 공무를 보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아직 날이 저물지 않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직 잠이 들 시간이 아니었다. 잠시 미간을 찡그린 장서열은 말없이 농교에게 수틀을 가져오라고 손짓한 뒤 수를 놓기 시작했다.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소리 없이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모래시계 속 모래는 계속해 끝을 향해 나아갔다. 촛불이 세게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자 집중하여 수를 놓고 있던 장서열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끝으로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촛불이 반쯤 녹은 것을 확인한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장서열은 농교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구염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안 구염락이 고개 숙인 그대로 미소 지었다.
“잠깐만. 이것만 다하고 함께 자자.”
그는 밤을 새면 안 된다고 말했던 장서열의 충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싱긋 웃은 장서열이 그의 손에 들린 붓을 치워 주었다. 탁자 위에 몸을 기댄 그녀가 바쁘게 일하느라 황제의 본분을 잊은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오늘은 권 비가 입궁한 날이니 규율에 따라 그녀의 거처에서 주무셔야 합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계속 여기에 계시다니요. 신첩이 그녀와 싸우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애교 섞인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본 장서열이 탁자에서 내려와 그를 보낼 준비를 했다.
“어서 이리 와요. 다시 머리를 묶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