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19)화 (219/449)
  • 제219화

    정심전은 급하게 정비 되었다. 과거 선황에게 총애 받지 못하였으나 신분이 높은 비빈들의 거처였던 정심전은 사대전(四大殿)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못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린 시절 구염락은 정심전의 한 귀퉁이에서 살았다. 선황이었던 풍윤제는 원한에 사무친 정심전의 여인들이 악랄한 수법에 정통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구염락을 이곳에 밀어 넣었다.

    그녀들은 풍윤제에게 다시 사랑받기 위하여 그의 오점인 구염락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운이 닿지 않아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심전은 근 일 년 동안 보수를 거쳐 다시 사대전의 위용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었다. 다만 사람들은 태후가 굳이 권여아를 이곳에 머물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황실의 처사에 반발한 나머지 아예 권여아를 구염락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혹은 과거 그녀가 선황을 위해 치른 희생을 현 황제에게 끊임없이 일깨우려는 의도이리라.

    장서열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심전을 보수하는 데 굳이 만 냥씩이나 되는 은자를 들였을 리 없었다. 여인이란 자고로 생존에 힘쓰는 한 권력을 향한 욕심을 버릴 수 없는 법이었다.

    장서열은 권력을 좇는 여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궁에서 자란 권여아는 나름의 생존 전략을 터득했을 터였다.

    장서열은 권여아가 권력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좋지 못한 말로를 맞이할 거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현재 권여아의 곁에는 온통 선황 때의 인물들뿐이었다.

    현재 정심전 정전 앞에 선 권여아는 분홍색 옷을 차려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채였다. 머리 위에는 꽃송이를 문 참새 비녀가 꽂혀 있었다. 이는 눈에 맺힌 눈물과 함께 부드러운 소녀의 단아함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수줍어 보이는 얼굴은 이미 그 미모가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권여아는 발랄한 분위기의 만정보다 더욱 고상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장서열의 미모와 견줄 수는 없었으나, 장서열과 만정 사이에서 그녀는 대갓집 규수의 풍모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방 마마는 바삐 움직이던 중 문득 권여아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 마마는 하인들에게 물건을 잘 정리하라 이른 뒤 발걸음을 옮겨 권여아에게 다가갔다.

    “마마, 다 지난 일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내명부에서는 오로지 마마께서만 정전(正殿)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현비나 만 귀인은 모두 편전(偏殿) 신세이지요.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먹으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분명 마마께 마음을 쓰고 계신 겁니다.”

    권여아는 초목이 무성한 뜰을 바라보며 옅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현비에게도 마음을 쓰고 있지.”

    ‘그렇게 빨리 비()의 지위에 올랐으니 머지않아 황후가 될 테고.’

    권여아가 쓸쓸한 시선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초목도 그녀의 씁쓸한 마음을 달래 주지 못했다. 그녀는 구염락이 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발 늦었다.

    권여아는 처음 조로전에 들던 구염락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 역시 구염락에게 잘해 주었지만, 이는 어렸을 때부터 장서열이 해온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권여아는 자신이 장서열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방 마마는 권여아의 기분이 여전히 좋지 않아 보이자 탄식하며 말했다.

    “조급해 하실 것 없습니다, 마마. 사람의 진면목은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마마께서는 총명하실 뿐더러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폐하만을 섬기고 계시니 언젠가는 그 진가를 폐하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그와 반대로 현비마마는 지금도…….”

    방 마마는 권여아가 입궁하기 전, 권 노야가 귀띔해 준 천향루의 일루춘을 떠올리며 권여아야말로 황제가 진정으로 황후로 염두에 둔 후궁이라고 생각했다. 폐하는 어서 현비의 실체를 알아야 했다.

    권여아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녀가 지금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거 장서열이 정혼한 몸이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게다가 만약 장서열과 서풍엽 두 사람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권여아는 눈물을 훔치며 기운을 냈다.

    “씻어야겠어. 곧 현비에게 인사하러 가야 하니까.”

    “마마, 태후마마께는…….”

    “안 갈 거야.”

    권여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궁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야만 고모인 태후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막 입궁한 신분이었다. 무엇이든 조급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반드시 정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천천히 행동에 나서야 했다.

    저녁이 되자 부슬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땅에 떨어진 가을비는 남에게 들킬세라 수줍게 흙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등불 위로 기름종이가 덮였다. 비가 내리는 정원의 저녁은 부드럽고도 화려했다. 온갖 꽃이 만발한 가운데 정원 속 찬란한 등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권여아와 만정은 각자 하인이 받쳐 주는 우산을 쓴 채 장서열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로전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만백성을 맞이하듯 장엄한 모습이었다. 편전에 들어서자 조금 전 주눅이 들 정도로 거대했던 위압감은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경옥전이나 정심전과 달리 조로전은 우아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꾸며져 주인의 높은 신분을 짐작케 했다. 특별히 과시하지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나른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전각이었다.

    장서열은 어두운 남색 궁장을 차려 입고 상석에 앉아 있었다. 머리에 꽂은 보채(寶釵) 양쪽으로 여덟 가닥의 봉황 꼬리 장식이 늘어졌다. 장신구는 반짝반짝 빛났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치장 없이 그저 옷매무새를 살짝 다듬은 모습이었으나 정교한 미모만큼은 감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흰 피부와 가느다란 허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일 뿐이었다.

    두 후궁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친절하지만 결코 친밀하지 않은 미소였다. 그녀는 선을 넘는 자매 관계는 허용치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화 마마는 현비에게 아무런 충고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정은 그런 장서열을 보며 행동을 더욱 공손히 했다. 그녀는 규칙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권 비와 함께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장서열이 일어나라 말했다. 웃고 있었으나 말투는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앉으세요. 차를 마시고 있으면 폐하께서 오실 겁니다. 두 자매는 이제 막 입궁했으니 환영회 겸 오늘은 함께 저녁을 들도록 하지요. 오늘밤은 권 비에게 경사가 있는 날이니 본궁이 이 자리를 빌어 축하드리고자 합니다.”

    장서열을 힐끗 바라본 권여아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장서열의 존재는 권여아에게 가슴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권여아의 가슴 속을 깊이 파고들어와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권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대꾸하기가 싫었다. 그녀는 누구든 이런 상황이라면 원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서열의 미소가 진심이라면, 대답하지 않는 권여아의 태도 역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장서열과 권여아는 암묵적으로 앞으로 서로 간섭하지 말자는 뜻을 여실히 드러냈다.

    장서열은 먼저 입궁한 것을 이유로 권여아를 제압할 생각이 없었고, 권여아 역시 높은 신분을 내세워 장서열을 업신여기려 들지 않았다. 서로 싸우느니 아예 교류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는 길이었다.

    만정은 잠시 멍해 있는 사이 갑자기 분위기가 으스스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망연한 얼굴로 장서열과 권여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만정은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각자 궁녀의 시중을 받으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이들은 마치 홀로 앉아 있는 것처럼 각자 조용히 구염락을 기다렸다. 그 편이 차라리 덜 불편했다.

    왕 마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만정의 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세 주인의 침묵을 모르는 양 두 손을 마주 잡고 꼿꼿한 자세로 구석을 응시했다. 기이할 정도로 공손한 모습이었다.

    방 마마는 조금 긴장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조로전이었고, 권여아가 계속해 정색을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초조해하던 방 마마의 눈에 문득 맞은편에 자리한 왕 마마가 들어왔다. 방 마마는 깜짝 놀랐다.

    ‘왕 마마가 귀비와 함께 순장되지 않았다니…….’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방 마마는 더욱 긴장하여 왕 마마의 주인이 된 만 귀인을 바라보았다. 더욱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왕 마마가 누구인가. 그녀는 박색인 여인을 단숨에 총애받는 비()로 끌어올린 인물이었다. 하물며 저렇게 어린 미인을 부각시키는 건 왕 마마에게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방 마마는 더는 권여아의 태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현비의 곁에 선 화 마마를 바라보았다.

    마침 화 마마 또한 왕 마마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리던 참이었다.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화 마마가 잠시 방 마마를 마주보다 다시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선황대에 내명부를 주름잡았던 왕 마마를 깜박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정은 자신의 곁에 선 왕 마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른 채 긴장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매우 긴장이 됐다. 앞으로 셋이 모일 때마다 매번 이런 분위기라면 적응하기가 힘들 터였다.

    만정은 마시던 차를 잠시 입 안에 조용히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삼켰다. 하지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인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움직이지 않는 왕 마마를 대신해 황급히 손수건을 꺼낸 만소가 만정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완정은 얼른 물과 수건을 가져와 만 귀인을 도왔다.

    만정이 막 정리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만정이 순간 긴장한 얼굴로 상석에 앉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위로하듯 만정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구염락을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권여아는 맞잡은 두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인 그녀가 장서열의 뒤에 섰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일순간 침착해졌다. 세 사람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구염락을 맞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