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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18)화 (218/449)
  • 제218화

    “…정말 맛있다.”

    “정말요?”

    만정이 매우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오늘따라 천향루에서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오더라고요. 하마터면 입궁 시간을 놓칠 뻔했다니까요.”

    만정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입궁일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걸 들킨 것만 같았다.

    장서열은 굳이 만정을 놀리지 않고 싱긋 웃었다. 행복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만정을 보자 왠지 마음이 아팠다.

    여인의 생활이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갈 때, 이는 행복을 운명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걸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장서열과 만정은 모두 운명의 가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 언니, 저 가 볼게요.”

    갑자기 떡 꾸러미를 내려놓은 만정이 차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왜 그렇게 급해? 좀 앉았다가 가.”

    장서열의 말에 만정이 쑥스럽게 말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온종일 언니 옆에 붙어 있으면 안 된다고요. 언니는 내명부를 총괄하느라 바쁘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건…….”

    만정이 장서열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연합해서 권 비를 괴롭힌다고 생각할 거래요.”

    손가락으로 권 비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 만정이 얼른 손을 내렸다.

    “사실 권 비를 상대하는 건 언니 하나로도 충분한데 말예요.”

    “쉿! 앞으로 입단속 잘해. 잘못하면 나중에 네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돕지 못할 거야.”

    혀를 날름 내민 만정은 올 때와는 달리 점잖은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다. 만정이 떠나자 농교가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만 귀인은 예전과 다름없네요. 근심 걱정 없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외모도 훨씬 예뻐졌고요. 특히 눈을 찡그리며 웃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요.”

    화 마마가 농교를 쳐다보았다. 궁에서 지낸 근 일 년간 돌려 말하는 법을 배우다니 제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장서열의 답변은 예상과 달랐다.

    “그렇지?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물론 만정은 어여뻤지만 이번 생에서 구염락의 눈에 들 수 있을지의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궁녀들과 괜히 만정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말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정심전(静心殿)은 어떠하냐?”

    대신 장서열은 권여아가 정심전에서 어떠한 풍랑을 일으킬지 지켜볼 참이었다. 화 마마가 즉시 답했다.

    “태후마마께서 아침에 사람을 보내 정심전을 치우도록 명하셨습니다. 권 비는 아직 자녕궁에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았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 권여아는 명문세가 출신으로 신분에 걸맞은 덕과 재능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또한 권여아는 황제의 행동이 불합리하다 여길 때는 마땅히 충언을 올릴 줄 아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장서열은 권여아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권여아가 공연히 쓸데없는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장서열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미안한 마음 때문에라도 이번 생에서는 그녀를 그냥 두고 볼 참이었다. 그리고 권여아는 생각 없이 태후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굴 사람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권여아를 높이 사지는 않았다. 다만 권여아가 태후와 결탁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믿었다.

    오히려 태후야말로 이제는 권 비에게 잘 보여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권 비처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성을 잃고 선을 넘는 행동을 할 리 없었다.

    장서열이 걱정하는 건 권여아보다 만정 쪽이었다.

    ‘만소 그 몹쓸 것이 따라 들어오다니!’

    한편 화 마마는 장서열에게 만 귀인과 거리를 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만 귀인은 물론 현비보다 아름답지 않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눈에 들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조금 전 현비가 만 귀인을 따뜻하게 대하던 모습을 떠올린 화 마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비는 혹시라도 만 귀인이 총애를 독차지하게 될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화 마마는 궁중에 ‘자매의 정’ 같은 건 없다는 걸 모르는 주인에게 일단은 괜한 시비를 걸지 않기로 했다.

    * * *

    한편, 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 중인 경옥전(琼玉) 편전은 바쁘고 부산스러웠다. 모든 것이 새로이 준비되고 있었다.

    금가루로 장식된 경옥전 편전은 정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으리으리하고 눈부셨다. 청령석이 깔린 바닥은 반들반들한 지면 위에 그대로 사람이 비칠 정도였다.

    우뚝 솟은 전당을 받친 네 개의 기둥 위에는 명인이 무려 육 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시킨 추봉오천(雏凤傲天, 봉황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만정은 까마득히 높은 기둥 위에 새겨진 봉황 무늬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했다. 봉황의 몸은 털 한 올 한 올까지 모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었다. 야명주가 상감된 눈은 넘쳐흐르는 생동감으로 인해 실제로 살아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네 칸으로 나뉜 방의 입구에는 진주와 자수정으로 만든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깊은 바다에서 끌어 올린 구슬들은 하나같이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네 쪽 벽면에 걸린 주렴은 까마득한 폭포수가 흘러내리듯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으며, 대전에 놓인 홍목 자단(紫檀, 목질이 단단한 고급 가구 재료) 가구들은 만정이 평소 사용하던 것들보다 훨씬 진귀했다.

    만정은 정중앙에 황금 관목 연탑(软榻)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연탑은 3층 청령석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만 앉을 수 있는 높이로, 만정의 키보다 컸다. 또한 전체가 붉은 대추색이었으며 상단에는 천운공금(天云贡锦)으로 짠 부드러운 이불이 깔려 있었다.

    중앙에는 두 자리를 사이에 두고 작은 앉은뱅이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옥돌과 바둑판이 놓여 있었는데, 옥돌은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하나하나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본능적으로 손을 움츠린 만정이 앞으로 머물게 될 궁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지금까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마마의 설명에 의하면 경옥전의 모든 물건들은 저마다의 유래가 있을뿐더러 물건의 윤곽 하나까지도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어색하게 귀비탑(貴妃榻) 옆에 선 만정은 자기도 모르게 몸에 걸친 평범한 의복을 가렸다. 선황제의 귀비가 화려한 생활을 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사치를 부렸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만정이 넋을 잃고 있자 이전에 귀비를 모셨던 왕 마마가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마마, 씻으실 시간입니다. 비록 오늘 저녁은 폐하를 모시지 않지만, 예법에 따라 저녁식사 후 조로전에 들러 현비마마께 문안을 드리고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만정은 왕 마마의 엄숙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모든 게 신기하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왕 마마는 새 주인의 태도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가 신기해하는 건 고작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 곧 이 풍경에 익숙해지거나 후에 정전(正殿)의 기세를 보게 된다면 어차피 편전은 볼품없어질 게 뻔했다.

    왕 마마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일단 충분히 구경을 시킨 뒤 만 귀인을 정전에 데려가도 늦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만 귀인은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지를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한편 만소는 편전에 들어온 뒤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경옥전의 궁녀와 태감들은 모두 손발이 빠르고 영민했다.

    그들은 만소가 만정의 시중을 들기도 전에 이미 물건의 정리를 마치고 만정의 질문에 대답했다. 잠깐 사이 만소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네 명의 궁녀가 이미 대시녀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대신했음을 깨달았다.

    만소는 서둘러 만씨 가문에서 함께 입궁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궁중 예절을 가르쳐 준 두 명의 교양마마가 엄숙한 왕 마마의 뒤에 서 있는 것을 제외하면, 어린 시녀 두 명은 자신처럼 이곳의 기세에 눌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만소의 온몸이 흠칫 떨렸다. 만소는 무거운 압박을 떨쳐 내며 황급히 만정의 개인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왕 마마는 그런 만소를 힐끗 바라본 뒤 다시 평온한 얼굴로 만정의 발끝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모습이었다.

    만정은 이러한 신경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알아챘다 해도 어차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아직 궁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궁중 생활에 익숙한 이들에게 모든 걸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연 눈썹을 찡그린 만정이 잠시 주저하다 믿음직한 왕 마마에게 물음을 던졌다.

    “내가 정말 경옥전에 사는 게 옳은 걸까? 이곳은 서열 언니가 머무는 조로전보다 더 화려한 것 같아…….”

    왕 마마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엄숙한 눈은 여전히 만정의 발끝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미간에 생긴 주름만큼은 또렷했다.

    “귀인마마, 마마께서는 입궁하셨으니 이제 현비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심하십시오. 이곳은 현비마마께서 마마를 위해 친히 골라 주신 거처입니다. 경옥전은 조로전에서 가깝고 폐하의 침소와도 가까운 곳이지요. 마마께서는 그저 현비마마의 은혜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다른 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 마마는 선황제의 후궁이었던 귀비를 모신 사람이었다. 후에 황후가 건강을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나자 궁중의 모든 대소사는 귀비의 몫이 되었다. 그 밑에서 시중을 들었던 왕 마마는 귀비를 대신하여 잡무를 처리했다.

    당시 귀비는 황궁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그녀의 소생인 이황자는 풍윤제의 깊은 총애를 받아 가장 강력한 태자 후보로 거론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황이 승하한 후 귀비는 그와 함께 순장(殉葬, 지배층이 죽었을 때 그를 따르던 첩, 신하, 하인 등의 산 사람을 묻던 장례법)되는 말로를 맞이했다. 주인을 잃은 왕 마마는 자녕궁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할 수 없이 경옥전에 남아 어린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왕 마마는 만 귀인의 미래를 기대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경옥전은 화려했지만 사실상 모든 권세는 조로전에 있었다. 내명부의 실세인 현비는 태자의 후궁이었던 시절부터 선황의 비빈들을 제압했고, 태자의 곁에서 수년 동안 시중을 들던 소리자와 금용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

    현비가 있는 한 왕 마마는 맹목적으로 만 귀인을 떠받들며 스스로 죽음을 자초할 생각이 없었다. 현비에게 빌붙어 아첨할 것인지, 아니면 밟고 위로 올라갈 것인지를 선택하기 위해 왕 마마는 좀 더 만정의 운을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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