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어머니야말로 건강에 유의하세요. 곧 손주가 생길 텐데 안을 기력도 없으시면 어째요.”
“외손주가 생기면 더 기쁠 것 같구나.”
조옥언이 경고하듯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딸에게 총애를 믿고 기고만장할 것이 아니라 얼른 황손을 낳아야 한다는 걸 일깨워 주고 있었다.
장서열은 문득 상아(裳儿)를 떠올렸다. 구염락은 자손이 귀했고, 이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에서 그녀의 슬하에는 딸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최근 구염락의 열정을 생각하면 혹시 몰랐다. 장서열은 상아 외에도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지금으로선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었을 때 다시 상아를 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 걱정보다 조 씨 가문부터 먼저 걱정하세요.”
조옥언은 변함없이 유쾌한 딸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녀는 딸아이가 원치 않는 입궁을 시킨 자신을 탓하지는 않을지 줄곧 걱정해 온 터였다.
“몸조리 잘 하거라. 마음을 편히 갖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은 떠올리지 말거라. 얻을 수 없는 것을 마음에 품고 사는 건 옳지 않다.”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사리 만난 만큼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화제는 입 밖에 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장서열은 어머니와 올케를 붙잡아 두고 함께 식사를 했다. 장서전은 조석궁에 들어 구염락과 함께 했다.
장서열은 주사섬에게 좋은 물건을 잔뜩 하사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올케를 비호하면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자신을 보러 입궁하라고 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사섬은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살면서 자신과 교분을 쌓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귀하디귀한 황궁의 현비마마였다. 주사섬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감이 생겼다. 어쩌면 시누이의 말처럼 자신에게도 조금은 장점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날 저녁, 장서열은 적극적으로 구염락을 끌어당기고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구염락은 모처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사랑하는 이를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 * *
열흘 후, 눈 깜짝할 사이 가을 낙엽이 떨어졌다. 먼저 황실 족보에 오른 장서열 다음으로, 이날 내명부에는 후궁이 두 명 늘었다. 궁중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만정은 안절부절못했다. 지난 일 년간 장서열을 만나지 못한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만정은 자신에게 배정된 마마가 설명하는 궁중 법도를 듣는 둥 마는 둥 한 후, 곧바로 조로전으로 달려갔다.
만정은 조로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장서열을 불러댔다. 이를 들은 장서열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언니! 제가 궁 밖에서 어떤 맛있는 음식을 갖고 왔는지 맞혀 보세요! 원래는 갖고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제가 억지로 우겨서 가지고 온 거예요!”
장서열은 이미 함박웃음을 지은 채 만정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가 걸친 명주 치마는 금색으로 수놓아져 있었고, 치맛단에 매달린 두 겹의 동주(东珠, 귀한 보석의 이름)는 걸을 때마다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보석으로 이루어진 참새 모양 머리 장식에서는 작은 참새가 입에 문 여덟 가닥의 금실이 귀밑머리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넋을 잃은 만정은 부러운 기색으로 연신 감탄을 연발했다.
“언니가 너무 예뻐서 감히 바라보지 못하겠어요.”
물론 만정은 누구보다도 장서열의 미모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 했다. 심지어 그녀가 비(妃)가 된 이후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우아함까지 느껴졌다.
만정에게 장서열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었다. 서열 언니는 마땅히 황궁에서 만인의 추앙을 받는 것이 어울렸다.
만정에게 서풍엽이 마뜩치 않은 건 비단 그가 황자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자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열 언니는 세자비보다 황후가 더 어울렸다.
만정이 장서열을 향해 미소 지었다. 미소 속에서 약간의 수줍음과 겸연쩍음이 느껴졌다.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과 달랐다.
만정은 과거 장서열의 앞에서 내뱉은 뻔뻔한 말들이 떠올라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혹시라도 자신을 놀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장서열은 친히 앞으로 나가 어린아이처럼 구는 만정의 콧등을 꼬집었다. 만정을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모습이었다.
“말하는 것 좀 봐. 아주 입에 꿀을 발랐구나. 우리 정이도 이제 다 컸어. 예쁜 걸로 따지자면 너야말로 갈수록 어여뻐지는걸.”
예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던 만정이 다시 숭배해 마지않는 서열 언니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가 천진난만하게 평소처럼 장서열의 팔짱을 꼈다.
“언니, 제가 언니를 위해 뭘 가져왔는지 아직 맞히지 않았잖아요!”
장서열이 막 만정의 말에 대꾸를 하려 할 때였다. 바깥에서 궁녀 몇 명이 황급히 걸어왔다. 자신들의 어린 주인이 현비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본 그들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사죄했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장서열은 수척한 낯빛의 낯익은 소녀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안색을 굳혔다. 그녀가 냉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만 귀인(贵人, 비빈의 지위 중 하나)은 이제 막 궁에 들어왔으니 행여나 주인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너희가 시중을 잘 들어야 할 것이다. 노마마들은 특히 더 신경 쓰도록 하라. 주인의 미래가 곧 너희의 미래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하인들이 황공해 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현비마마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노비들이 반드시 성심을 다해 만 귀인을 섬기겠습니다. 마마께서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뒤에 선 화 마마가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새로 들어온 만 귀인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지만 현비가 기뻐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현비 또한 아직 어린 탓인지 궁중에 ‘자매의 정’이 없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됐다. 만 귀인은 이제 막 입궁했으니 너희는 가서 짐 정리를 하거라.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두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라.”
교양마마(教养嬷嬷, 후궁의 교육을 담당하는 마마) 두 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비마마께서 죄를 묻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노비들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수척한 소녀 역시 교양마마를 따라 물러갔다. 장서열은 이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무어라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만정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궁녀들을 몇 걸음 뒤로 물러가라 이른 뒤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만소(万素, 만정의 여동생)를 데리고 입궁한 거야?”
만소는 수녀 선발에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장서열이 손을 쓴 덕분에 궁녀도 되지 못한 채 곧장 궁 밖으로 내보내졌었다. 만정의 눈앞을 얼쩡거리며 괜한 골칫거리를 만드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정은 만소와 함께 입궁한 것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서열이 엄격한 얼굴로 묻자 사정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꼭 함께 입궁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만소를 데려가라고 하셨어요. 저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만소는 착하고 얌전하니 데려가면 저를 잘 돌봐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같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착하고 얌전해?’
천만의 말씀이었다. 만소가 정말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면 애초에 구염락을 홀렸을 리 만무했다.
구염락은 비록 냉소적이지만 원칙이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전생에서 만소가 제 발로 나서지만 않았다면 구염락은 그녀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결국 구염락은 꼴사나울 정도로 그녀를 총애하게 되었다.
장서열은 단지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궁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차피 만소를 향한 총애가 그녀와 충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만정은 달랐다. 전생에서 만정은 믿었던 동생에게 배신을 당한 이후 오랜 기간 의기소침했고, 하마터면 뱃속의 아이를 유산할 뻔했다.
“언니가 어딜 가든 죄다 따라다니다니, 네 동생도 참 맹랑하구나. 평소 경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 선행을 베푸는 건 좋지만 남을 경계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돼. 알겠니? 이제 궁에 들어왔으니 더욱 매사에 주의하고.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괜찮지만 권 비(权 妃, 권여아)와 있을 때는 특히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장서열은 이제 와 만소를 궁 밖으로 내쫓는 게 만정의 평판에 득이 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앞으로 사람을 붙여 만소가 어떤 물의를 일으키는지 지켜볼 참이었다. 감히 전생에서처럼 함부로 행동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절대 만소를 봐주지 않으리라.
만정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잖아도 궁에 들어오기 전에 어머니께서도 똑같이 말씀해 주셨어요. 언니도 어머니랑 똑같은 잔소리를 하다니요.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제가 언니에게 주려고 뭘 가져왔는지 얼른 맞혀 봐요.”
만정이 흥분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지만 퍽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루춘(一缕春).”
만정의 놀란 눈이 장서열을 향했다. 큰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철없이 귀여운 만정의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알았어요?”
만정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작은 입을 삐쭉 내밀고 발을 동동 굴렀다.
“가 언니도 정말 귀신같군요! 서열 언니라면 제가 뭘 가지고 왔는지 금방 맞힐 거라고 그랬거든요. 정말 얄미워 죽겠어요.”
만정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입궁 전 장서열과 만정, 헌원가 세 사람은 작은 식도락을 즐기곤 했다. 그중 장서열은 특히 천향루(天香楼)에서 만든 일루춘을 좋아했다. 반드시 먹어야 할 정도로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취향을 기억해 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서열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몰래 사방을 둘러보던 만정이 넓은 소매 안에서 여러 겹으로 싼 꾸러미를 꺼냈다. 하지만 내용물은 거의 부서진 것 같았다. 만정이 즉시 울상을 지었다.
“아이, 공들여서 겨우 갖고 들어온 건데 이렇게 부서지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가 언니 말대로 찻잎이나 가져올 걸 그랬어요.”
“괜찮아. 가지고 온 게 어디야.”
장서열이 일루춘 한 조각을 꺼내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떡 조각이 녹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으로 번뜩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일순간 무거워진 장서열의 시선이 만정을 향했다. 그러나 만정의 얼굴에서 이상한 구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서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