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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16)화 (216/449)
  • 제216화

    장서열은 일순간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그저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었다. 구염락은 확실히 성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

    구염락은 못난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대로 뒤돌아 나갔다. 더는 그녀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이 돌아서자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떠오른 장서열이 황급히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셋째!”

    놀란 구염락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맨발로 융단을 밟고 선 그녀의 모습에 구염락이 얼른 되돌아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찬바람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려고!”

    장서열은 구염락의 붉어진 눈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정말 자신이 무슨 심한 말이라도 한 것인지 헷갈릴 뻔했다. 항상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구염락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 했다. 장서열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끌어당겼다.

    “폐하, 제 말을 오해하셨어요.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단지… 단지 폐하께서 너무 자주 관계를 원하시니… 버티기가 어렵다는 뜻이었어요…….”

    말을 잇던 장서열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진리가 있다면 그건 바로 구염락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에요.”

    장서열의 구염락의 손을 꼭 잡았다.

    “만약 매일 합방을 원하신다면 규칙을 정하기로 해요. 옥체를 소중히 하시고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죠? 전 폐하가 걱정되어 죽겠어요. 이렇게 일찍부터 기운을 소진하면 황권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거예요. 교육을 엉터리로 받았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내 걱정을 해 주는 거야?”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두 손을 잡고 침대 위로 끌어 앉혔다.

    “그래요. 다 큰 사람이 아이처럼 토라지는 게 어디 있어요? 전 제가 폐하를 화나게 한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말해 봐요, 대체 제 말의 어디가 잘못 됐기에 그러셨어요?”

    구염락은 그녀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장서열도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가 성질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푹 자요. 아직 젊다고 수면을 가볍게 여기면 안 돼요.”

    구염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 사실 그는 속으로 감동해 마지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윽고 구염락은 깊이 잠에 빠졌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는 것을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구염락은 장서열을 깨우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사실 그는 어젯밤에도 충동이 일었으나 몸이 불편한 그녀를 생각해 욕망을 억눌렀다. 그저 장서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구염락이 떠난 뒤로 실컷 자고 잠에서 깬 장서열은 바깥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봐라! 조 부인과 장 수위(守卫)는 도착했느냐?”

    서둘러 다가온 완정이 침대에서 나올 수 있도록 장서열을 부축했다. 완정 또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 마마. 부인과 도련님 모두 도착하셨고, 지금 농교가 전전(前殿)으로 시중을 들러 갔습니다. 부인께서는 급하지 않으니 마마를 푹 주무시게 두라고 하셨습니다.”

    장서열이 완정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깨우지 않았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웃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왠지 곁에 두는 동안 완정에게 나쁜 물을 들인 것 같다는 생각에 장서열이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어서 와서 내가 씻는 걸 도와라.”

    잠시 뒤, 장서열이 평상복을 걸치고 나타났다. 입궁 후 줄곧 입던 후궁의 복식이 아니었음에도 온몸에 흐르는 존귀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하인들에게 조 부인이 좋아하는 병풍을 세우라고 지시한 뒤 가족들을 전각으로 들게 했다.

    주사섬은 공손하게 시어머니와 남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시누이를 알현하기 위해 그녀는 따로 모친께 부탁해 궁에서 나온 노마마(老嬷嬷)에게 예의범절을 익힌 터였다.

    조옥언은 전각으로 들어서며 화려하고 웅장한 내부에 감탄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편전(偏殿)은 그저 편전일 뿐이라고 무시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실제 그 규모는 가히 정전(正殿) 못지않았다.

    딸이 잘 지내고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조옥언은 애써 그리움을 감췄다. 그녀의 도도한 표정만큼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편전을 둘러보며 조옥언은 장서열이 언젠가 자신의 선택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현비마마를 뵈옵니다.”

    장서열이 가까이 다가가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켰다. 벌써 일 년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감동에 찬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못난 자신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을 해 온 어머니였다. 다행히 어머니는 아직 자신의 앞에 이렇게 서 있었고, 전생에서처럼 딸의 과오 때문에 지위를 잃지도 않았다.

    “어머니…….”

    조옥언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은 채 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조옥언은 마음과는 달리 습관적인 훈계를 내뱉었다.

    “몇 살인데 우는 게야. 갈수록 어리광만 느는구나. 세상에 지금까지 잠을 자는 비빈이 어디 있단 말이냐. 어미가 가르친 규율은 다 잊은 게야? 감기에 걸리다니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느냐… 이제 정말로 날이 추워졌으니 더는 찬바람을 쐬어선 안 된다. 날이 차면 꼭 이불을 두껍게 덮고, 약도 제때 잘 먹고, 제멋대로 굴지 말고…….”

    “알아요, 압니다. 어머니처럼 항상 딸을 혼내는 어머니도 없을 거예요. 어렵사리 저를 만나러 오셨으면서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하시다니요.”

    장서열이 애교 섞인 골을 내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앞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아직 어린아이 같았다.

    조옥언은 매서운 눈빛으로 딸의 몸을 훑어본 후, 딸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게 확실해지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어서 네 올케를 만나 보렴. 아직 만나 보지 못했잖니.”

    주사섬이 얼른 앞으로 나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현비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홍복을 누리십시오.”

    장서열은 주사섬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속으로 감격했다.

    “새언니가 기품이 넘치는군요. 오라버니가 참 복이 많아요.”

    본래 여자들의 대화에 끼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먼저 말을 걸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네 올케는 수줍음이 많으니 더는 성가시게 굴지 말거라."

    장서전의 말과 표정에서 주사섬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주사섬은 더욱 송구스러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몰래 시누이를 훔쳐보던 그녀는 순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시누이는 온몸에 기품이 넘쳐흐르는 것도 모자라 온화하고 다정다감하기까지 했다.

    주사섬은 장서열의 시선에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이내 시누이의 눈 속에 어린 격려와 따스함을 느끼자, 그녀는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오라비가 새언니를 비호하는 것을 본 장서열은 싱긋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약간 의아해했다. 전생에서 오라버니는 새언니와 결코 사이가 가깝다고 말할 수 없었다. 냉담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친밀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무를 대하듯 새언니를 대하던 오라버니가 그녀에게 잘해 주게 된 것은 가문이 몰락한 뒤의 일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굳게 의지하고 살아가며 부인을 달리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오라버니는 가문에 위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실부인인 주사섬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장서열은 이에 매우 흡족했다. 이제 자신만 구염락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다면, 또한 구염락의 사람을 이유 없이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들 가족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올케가 과로로 쓰러지는 일도, 오라버니가 평생 후회 속에서 살아가는 일도, 어머니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길을 걷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기 씨와 장신성은 달랐다. 그들은 전생에서 자신과 가족들이 느꼈던 초라함과 곤궁함을 천천히 경험하게 될 터였다. 전생에서 자신이 그러했듯, 기 씨 또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마땅했다.

    장서열은 가족들 모두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덕분에 그녀는 구염락에 대해서도 관대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장서열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이룬다면 행운이지만 이루지 못한다면 운명이다. 그녀의 운명은 눈앞에 있는 가족을 일평생 평안히 지켜 주는 것이리라.

    “저만 쳐다보며 기뻐하지 마시고 어서들 앉으세요.”

    차를 들고 들어오던 농교는 부인과 도련님을 보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인께서는 자리에 앉지 않고 마마만 보셔도 기분이 좋으실 겁니다.”

    “별 소릴 다 하는구나.”

    조옥언은 장서열의 곁에, 주사섬은 말석에 앉았다. 조옥언은 또다시 딸에게 훈계를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딸아이가 여태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에 불만이 많았다.

    “폐하께서 너를 총애한다고 함부로 굴면 아니 된다. 지금이야 아무도 네게 뭐라 하지 않지만 나중에 후궁이 채워지면 네 꼴이 뭐가 되겠느냐. 알아서 모범을 보여야지, 그런 부족한 태도는 삼가거라. 스스로를 단속할 줄 아는 이가 존경을 받는 법이다.”

    미소를 머금고 어머니의 말씀을 듣던 장서열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입술을 뾰로통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스스로를 단속해 무얼 하겠는가. 어차피 이번 생에서는 구염락의 머리꼭대기 위에 오를 일도, 정권을 잡는 황후가 될 기회도 없을 것이다.

    조옥언은 고집을 부리는 딸아이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어미 말 안 들을 게야?”

    그러나 곧 주변에 선 궁녀들을 의식한 조옥언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자신이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나중에 체면을 구기는 건 결국 딸이었다.

    조옥언은 문득 딸이 궁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 많은 딸이 잠이라도 실컷 자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무슨 일이든 재차 생각한 후 행동하고 폐하를 잘 모시거라. 집에 있을 때처럼 무분별하게 굴지 말고.”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좋다. 네 올케가 돌봐 주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네 몸이나 신경 쓰거라. 계속 병을 달고 살면 사람들은 필시 박복하다고 험담을 할 게다.”

    장서열은 빙그레 웃을 뿐 어머니의 말을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의 험담은 신경 써 봐야 좋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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