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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15)화 (215/449)

제215화

“풍엽아, 여 각로(余阁老)의 여식은 어떠하냐?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한 규수란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풍엽이 공손하게 답했다.

“어머니. 소자, 갑자기 군부의 업무가 생각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다시 어머니께 문안드리러 오겠습니다.”

충왕비는 서풍엽을 붙잡고자 입을 벌렸지만 끝내 말을 뱉지 못했다. 그녀는 아들을 억지로 혼인시키는 못된 어머니가 아니었다.

충왕비는 새삼 집안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무력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그녀가 바라던 풍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세의 흐름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이들의 앞날이 그리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로 흘러가게 두어야 했다. 사람은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 존재였다.

‘풍엽이는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 뭘 어쩌려는 걸까.’

충왕은 첩실들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많은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충왕비에게는 오직 서풍엽 한 명뿐이었다.

충왕비는 혹시 자신이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충왕과 혼인하는 것으로 평생의 모든 운을 다 써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장서열은 병이 났다. 아니, 병이 난 척했다.

구염락의 무절제한 욕구에 질려 버린 그녀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꾀병을 부렸다. 정오에 태의를 데려온 구염락이 진맥을 보게 했지만, 태의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감기에 걸렸으므로 조용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속으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저녁마다 일삼던 행동을 떠올리자 죄책감은 곧바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차피 구염락은 싫다고 말해 봐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므로 그녀로서는 병을 앓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제는 구염락이 예법을 어기면서까지 일찍 찾아와도, 장서열은 황제에게 병을 옮기면 안 된다는 핑계로 ‘할 수 없이’ 다른 침대에서 자야 했다.

그녀는 이것이 둘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는 밤마다 구염락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진 그녀는 곧장 안색부터 좋아졌다.

오후에 문병을 온 태후는 장서열을 보며 비웃었다. 병에 걸린 그녀를 고소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장서열은 개의치 않았다. 후에 입궁한 권여아에게 중궁의 일을 분담시키겠다는 발언에도 장서열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바보도,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는 며느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없이 너그러운 척을 하고 있을 뿐 결코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궁에서 권력을 잃는다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태후는 장서열이 영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화가 났다.

‘역시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황후가 될 그릇은 아니군. 아무리 총애를 받아 봐야 벌써부터 이렇게 병을 앓는다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장서열이 병이 난 이상, 태후는 더 이상 아랫것들을 동원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 수 없었다. 사실 귀찮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기껏 준비해 둔 죄명을 장서열에게 뒤집어씌우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아픈 후궁이 제왕을 현혹시켰을 리 없지 않은가.

‘의지할 곳 없는 황제와 그의 애첩이라…….’

태후는 권여아가 입궁하면 모든 상황이 달라지리라 믿었다. 구염락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장서열은 한순간에 총애와 부귀영화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 * *

구염락은 저녁이 되자 어김없이 장서열의 처소로 건너왔다. 조로전 문 앞에 걸린 궁등(宫灯)이 망가진 건지 바람이 불어 꺼진 건지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어떤 것도 조로전에 드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병이 난 장서열을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장서열은 이쯤 되자 자신의 넘치는 매력에 감탄을 해야 할지 아니면, 비빈의 처소에 달린 궁등(宫灯)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구염락을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셨어요, 폐하… 신첩이 몸이 좋지 않아 일어나지 못하는 걸 용서하세요.”

장서열은 체념했다. 어찌 됐든 그가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구염락은 괴로운 심정으로 병석에 누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병에 걸린 것보다 더 조바심을 냈다.

목욕 후, 그는 침대 옆에서 극진한 효자처럼 장서열의 시중을 들었다. 구염락은 그녀가 어디를 가든 혼자 가게 두지 않았다.

장서열은 꾀병을 부리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구염락이 화장실에 가는 자신을 뜨거운 시선으로 응시할 때 더욱 그랬다. 그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그가 이상한 취미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장서열은 수치심을 참아가며 다시 구염락에게 안긴 채 침대 위로 돌아왔다. 자신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구염락을 바라보던 장서열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이 폐하를 모시지 못하고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행여나 폐하께 병이 옮지 않도록 옥체를 보전하십시오. 금수(锦绣)에게 폐하의 시중을 들게 할 테니 그만 전전(前殿)으로 돌아가세요.”

장서열을 바라본 구염락이 손에 든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셨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병이 났는데 짐이 어디를 가겠어. 손 이리 내, 닦아 줄게.”

구염락이 열심히 그녀의 손을 닦아 주며 말했다.

“어째서 병이 난 거야… 내가 널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겠지. 조 부인이 이 사실을 알면 짐을 얼마나 원망하겠어… 참,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지?”

“…….”

“교지를 내렸어. 조 부인과 서전이 내일 입궁할 거야. 아직 새 올케를 보지 못했잖아. 보고 싶을 것 같아 함께 불렀으니 이번 기회에 만나 보도록 해.”

순간 감동한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기운 그녀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어머니에게 입궁을 명하셨다고요?”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장서열의 마음을 헤아렸을 뿐이었다.

“네가 병석에 누운 것을 알면 조 부인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구염락은 장서열의 병이 나은 뒤 조 부인을 부르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마음 쓰는 모습을 보자 다시 한번 꾀병을 부린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구염락은 그녀에게 매우 잘했다. 심지어 서풍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가. 그녀는 문득 두 살이나 어린 그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손톱 하나하나까지 보물 대하듯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구염락을 보며 장서열은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지는 걸 느꼈다.

사실 구염락이 자신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 자신의 운명이 얄궂은 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아이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다니,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구염락은 침대 위에서 돌변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거리낌 없이 굴던 그의 행동을 떠올리자 잠시 너그러운 마음을 품던 장서열은 다시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교양은 구염락의 과격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인사사(人事司) 마마들의 가르침을 포함해 그녀가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개방적이라면 껴안을 때 조금 대담한 정도에 불과했다.

허나 구염락은 그렇지 않았다. 장서열은 자신이 마치 그에게 있어 욕망을 분출하는 대상이 된 것 같아 수치심을 느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안색이 좋지 않자 얼른 몸을 앞으로 기울여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서열아, 또 아파?”

이마를 마주한 뒤 살짝 뒤로 물러선 구염락은 걱정과 함께 든든한 기쁨을 느꼈다. 그에게 부부가 살을 맞대는 행동은 서로에 대한 동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구염락은 비밀리에 교제 중인 태감과 궁녀가 이렇게 이마를 맞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후에 태감이 죄를 저질러 죽자 어린 궁녀는 비통해 하다가 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그때부터 구염락은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으로써 함께 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녀가 접촉을 허락한 건, 그녀 또한 자신이 평생을 책임질 낭군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장서열은 작은 동작에도 얼굴을 붉히는 구염락을 보며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일 뿐, 대화를 잘 나눈다면 분명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연하의 부군을 바라보던 장서열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는 구염락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앉으세요. 할 말이 있어요.”

장서열이 손에 힘을 꼭 쥐었다. 그녀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설득에 임할 생각이었다.

잡힌 손을 바라보던 구염락은 순간 그녀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만약 장서열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구염락은 그녀와 다시 간절히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는 길이라 믿었다.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구염락을 보면서 장서열은 마지막 망설임을 지웠다.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열셋째. 제대로 쉬지 못한 게 벌써 며칠째예요?”

구염락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매일 쉬고 있잖아.”

장서열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더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열셋째… 폐하. 폐하는 아직 성장하는 중이라 충분한 수면이 필요해요. 절제할 줄도 알아야죠. 특히 침… 침소에서는 더더욱 정도를 지켜야 해요. 너무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되고 너무 많은 것을 탐닉해서도 안 돼요. 폐하께서는 앞으로 황실의 후사를 이으셔야 하는데 지나치게 힘을 소모하면 자손에게 좋지 못해요. 제 말, 이해하시죠?”

말을 마친 그녀가 진지하게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 비치던 광채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그가 장서열에게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싫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침대 옆으로 몸을 옮긴 그가 장서열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올라오는 슬픔을 억누르며 그가 물었다.

“혹시 내가 네게 많이 부족해?”

그의 목소리에는 먹먹한 애절함이 묻어 있었다.

“나도 느꼈어. 네가 울었을 때 진심이었다는 거.”

문제는 그렇게 우는 모습까지 구염락의 눈에는 사랑스러워 보였다는 데 있었다.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거 알아. 난 널 안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나는 금방 자랄 거야. 그러니까 서열아…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눈물 한 줄기가 예고 없이 구염락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간 정신이 멍해진 장서열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구염락이었다. 이미 장성한 구염락. 그런 그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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