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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14)화 (214/449)

제214화

“다 내 잘못이야. 네가 계속 바람을 쐬는데도 네가 싫어할까 봐 말리지 않았어. 이제부터 네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꼭 널 쉬게 할 거야.”

“…….”

“서열아, 아프지 마. 괜찮아. 태의가 오면 괜찮아질 거야.”

침대에 누운 장서열은 참회하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애타는 얼굴로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차마 아까 하려던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전 괜찮으니 태의는 부르지 말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태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총애를 등에 업은 그녀가 황제를 우매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구염락은 허락하지 않고 정색했다.

“몸이 안 좋으면 진맥을 봐야지. 아이처럼 굴지 마. 약은 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짐이 함께 마셔 줄 테니.”

구염락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녀가 병이 났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두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장서열은 이를 꽉 깨물며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과 그를 보며 느끼는 난감함을 억눌렀다. 그녀가 눈을 감고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 태의는 부르실 거 없어요.”

“안 돼.”

구염락의 태도는 몹시 강경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그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장서열은 이틀 연속으로 태의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 병이 난 게 아니에요. 전…….”

“병이 나지 않았어도 진맥을 봐야 해. 어쩌면 태의가 병을 찾아낼 수도 있잖아.”

말을 뱉자마자 구염락은 후회했다. 말이 씨가 된다질 않는가.

“그러니까 내 말은, 태의에게 병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된다는 소리야.”

“폐하, 태의가 도착했습니다.”

혜령은 발이 빠른 것이 특징이었다. 두 주인이 결론을 내기도 전 벌써 명을 받들었다. 그에 대해 구염락은 칭찬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장서열은 화를 참으며 붉은 휘장만 노려보았다.

황급히 앞으로 나선 호 태의가 장서열의 손목에 손수건을 올린 뒤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진맥을 보기 시작했다. 맥박은 세찼고 호흡도 거침이 없었다. 슬쩍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호 태의는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폐하께서는 마마께 병이 있기를 바라시는 건가? 아니면… 마마께서 폐하의 총애를 붙잡아 두려고 병이 났다고 어리광을 부리시는 걸까?’

이제 곧 내명부에 새 사람이 들어올 테니 현비가 이런 현명하지 못한 계책을 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호 태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폐하든 마마든 누군가 자신에게 어떤 신호를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곁눈질로 장서열을 봤다가 또 구염락을 몰래 쳐다보았다. 그러나 슬프게도 두 사람 모두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구염락은 호 태의에게서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서열이에게 무슨 지병이라도?’

구염락이 초조하게 물었다.

“진맥 하나 하는 데 무슨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는 게야! 심각한 병환이라도 발견한 게냐? 어제 진맥할 때는 멀쩡하지 않았느냐! 지금 제대로 진맥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

깜짝 놀란 호 태의가 황급히 손을 떼고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 소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마께서는 큰 병이 없으십니다. 소신이 우둔하고 의술이 미흡하여 혹여 오진을 했을까 두려운 마음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마마… 살려 주십시오…….”

장서열이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는 호 태의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 싱긋 미소를 지은 그녀가 호 태의에게 물러가라 명했다. 조금 전까지 긴장해 있던 구염락은 장서열이 웃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장서열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구염락은 이내 활력을 되찾았다. 침대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은 그는 그녀를 집중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장서열은 그런 구염락의 모습에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정말 미움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내쫓아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론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폐하,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주무세요.”

순간 구염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열이가 자신을 침대로 불렀다. 역시 서열이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혹시 병을 핑계로 주의를 끌어 나를 유혹하려고…….’

구염락은 배려심이 없었다는 생각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수줍음 많은 서열이가 움직이게 만들다니. 그는 이 죄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밤 반드시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마침내 장서열이 침대에 눕자 구염락은 취침 전 세면도 거른 채 순식간에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장서열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오늘은 반드시 그와 합방에 관해 충분한 대화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구염락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구염락, 멈춰!… 안…….”

그녀는 그렇게 또 밤새도록 시달렸다.

구염락의 폭력 성향이 침대 위로 옮겨간 게 틀림없었다. 그는 장서열을 단단히 제압했다. 구염락으로선 매우 가벼운 힘을 쓴 것이었지만 이는 장서열에게 거부할 수 없는 완력이었다. 정신없이 파고드는 구염락의 손길에 장서열은 몹시 괴로웠다.

마침내 구염락에게서 풀려나게 되었을 때 장서열은 숨을 쉬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지금의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하든 좋으면서 괜히 싫어하는 척하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어차피 구염락에게 말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밤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잠이 든 구염락과 달리 장서열은 번쩍 깨어났다.

몸에 생긴 흔적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허리부터 손목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을 뿐더러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자세는 그녀의 뺨을 불같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녀의 그윽한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장서열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구염락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에게 속절없이 유린당하던 느낌만 생각하면 아무리 그를 걷어차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오던 장서열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황급히 완정이 다가와 장서열을 붙잡아 주었다. 완정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숨도 쉬지 못했다

장서열이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조금도 힘이 없었다.

“…목욕물을 받아라.”

잠시 후, 탕에 몸을 담근 장서열이 몸에 새겨진 흔적들을 힘껏 문질렀다.

‘구염락은 뭘 하는 거지? 대체 누가 그런 음탕한 동작을 가르친 거야!’

그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그녀를 뒤돌려 세우던 구염락을 떠올리자 장서열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비록 그의 정비(正妃)는 아니었지만 엄연히 황실의 족보에 오른 비빈이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그런 건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장서열은 탕 속에 몸을 담근 채 분노했다. 몸에 생긴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농교는 완정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조심스럽게 한 발 다가갔다.

“마마, 탕에 들어가신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구염락이 지금 당장 자신의 침대에서 꺼져 준다면 즉시 나갈 용의가 있었다.

“만정은 얼마나 더 지나야 들어오지?”

완정은 마마께서 왜 갑자기 그걸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폐하의 총애를 빼앗길까 봐 염려하시는 걸까?’

“열흘이 더 남았습니다, 마마.”

그나마 마음이 홀가분해진 장서열은 다시 힘껏 몸을 문질렀다. 만정이 궁에 들어오면 더는 이런 비인간적인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녀는 비록 황제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었지만 그를 피할 수는 있었다.

장서열은 내일부터 만정이 궁에 들어올 때까지 병석에 눕기로 결심했다. 혹은 금수(锦绣)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든 말든 그가 다시는 자신을 함부로 범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차피 그의 태도도 언젠가는 업무를 처리하듯 냉담해질 테니까.

구염락은 시간을 가늠하며 잠에서 깨어나다가 옆자리에 아무도 없자 순간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의 가슴은 온통 손톱자국과 깨물린 자국으로 가득했다. 드문드문 피가 맺힌 상처는 이를 만든 사람이 얼마나 모질게 손을 썼는지를 짐작케 했다.

허나 어렸을 때부터 부지기수로 맞아온 구염락에게 이 정도 통증은 오히려 흥분만 배가시킬 뿐이었다.

“서열아.”

구염락이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장서열은 이미 욕실에서 나와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로 표정을 바꾼 후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폐하. 신첩이 옷 갈아입는 걸 도와드릴게요.”

불안해하던 구염락은 마침내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어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곳은 조로전이었다. 장서열은 사라질 수 없었다.

구염락은 너무 깊이 잠든 나머지 그녀가 일어나는 기척을 듣지 못한 스스로를 탓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그녀가 자신을 찾았다면 그는 모처럼 호감을 살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장서열은 지친 몸을 이끌고 구염락의 환복을 도와주었다. 그녀의 눈 밑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구염락은 오늘은 정말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설령 그녀가 원한다 해도 무엇보다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다독이리라 맹세했다.

그러나 구염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이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머리를 쥐어짜 낼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정오 무렵 조로전의 하인이 현비가 감기에 걸려 며칠간 조용히 요양을 해야 한다고 전해 주었던 것이다.

구염락은 무거운 짐을 벗은 사람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즉시 공무를 내팽개치고 조로전으로 향했다. 그는 태의원에 있는 모든 태의를 이끌고 행차했다.

조로전의 안주인은 승은을 입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 사흘이 채 되지 않아 태의원을 세 번이나 놀라게 했다. 심지어 그중 두 번은 태의원의 모든 태의가 움직여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는 중병에 걸려 머지않아 죽을 사람이었다.

* * *

“서열이는 어디가 아픈 게냐? 벌써 사흘 연속 태의를 불렀다고 들었다.”

충왕비가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덧붙이려다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어머니 충왕비를 바라본 서풍엽이 엄숙하게 말했다.

“어머니, 앞으로 현비마마의 일은 언급하지 마세요. 마마께 해가 될 뿐이에요.”

충왕비는 아들이 이제 단념한 것 같다는 생각에 감격했다. 마침내 아들이 상황을 이해하고 생각을 고쳐먹은 거라면 정말 잘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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