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얼른 앞으로 나온 완정이 장서열의 손에서 수틀을 받아 들었다. 농교는 젖은 수건을 가져와 장서열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간단하게 정리를 마친 장서열은 여전히 바쁘게 업무 중인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든 상소문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내 주필(朱笔, 붉은 먹을 묻혀 쓰는 붓)을 손에 쥔 그는 몇 자를 적은 뒤 다시 새로운 상소문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소리 없이 내실로 돌아와 평소처럼 씻고 잠이 들었다.
한참 뒤, 곁에서 쉬지 않고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깬 장서열이 몽롱한 눈을 떴다. 구염락을 향해 몸을 돌린 그녀가 다시 눈을 감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
구염락은 자신을 향해 돌아누운 그녀를 보며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코앞에 놓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붉고 단정한 입술이 발하는 유혹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장서열은 눈을 감고 있었기에 구염락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평소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줄로만 알고 다정하게 그를 토닥여 주었다.
“자요… 내일 일찍 조회에 나가야죠…….”
말을 마친 그녀가 짙은 남색 이불 속으로 하얀 팔을 쏙 집어넣었다. 그녀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린 채 조그만 얼굴을 베개에 비볐다. 그녀의 입가에는 편안한 미소가 가득했다.
구염락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구염락은 장서열을 깨울까 봐 줄곧 참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남긴 흔적들이 염려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가득한 그녀의 향기에 그의 몸은 서서히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그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한 것이다.
눈앞에 놓인 유혹에 구염락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정말로 내일부터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푹 쉬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구염락이 장서열을 흔들었다. 장서열은 잠꼬대로 중얼대며 이불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구염락은 더욱 몸이 달아올랐다.
“서열아… 괜찮아?”
“네…….”
구염락은 대사면을 받은 것만 같았다. 역시 괜찮을 줄 알았다. 서열이는 본래 건강한 데다 오전 내내 쉬었기 때문에 금세 기운을 회복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잠결에 소리를 낸 것뿐인 장서열은 얼굴을 이불 밖으로 내민 채 계속 잠을 청했다. 구염락은 즉시 이불을 젖히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안아 옮긴 뒤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빠르게 장애물을 풀어헤친 그는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엎치락뒤치락 밤새도록 그녀를 마구 괴롭혔다.
장서열은 처음에는 불편해 했으나 갈수록 신음을 내뱉었고 마지막에는 그만해 달라고 빌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아연실색했다. 아무리 빌어도 구염락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언제 기절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아직 완전히 잠에 든 것 같지 않았는데 곁에 있던 구염락은 이미 씻고 자리를 떠난 후였다.
깜짝 놀란 장서열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이 든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시 자리에 누웠다.
화 마마는 그저 기뻤다. 주인은 과연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리도 까다로운 폐하께서 마마께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다니.
구염락은 떠나기 전 장서열을 더 자게 두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고 수도 없이 귀한 물건을 상으로 내렸으며 중궁(中宫)의 인장까지 보내 왔다.
이는 비빈들이 사용하는 작은 인장이 아닌 황후가 사용하는 봉인(凤印)이었다. 봉인(凤印)을 줬다는 것은 그가 장서열 한 사람만을 황후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뜻했다. 화 마마는 기분이 너무 좋아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장서열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몸에 새겨진 흔적들과 시큰거리는 허리의 통증을 느끼며 장서열은 어렴풋이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구염락은 육욕(肉慾, 육체에 관해 느끼는 욕정, 성욕)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 어린 나이에 옥체라도 상하게 된다면 그녀는 만백성 앞에 죄인이 될 것이다.
장서열이 약재를 넣은 탕에 몸을 담갔다. 완정은 장서열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어린 완정의 미소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조금씩 두려움을 벗게 된 그녀는 최근 오직 인생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마마, 하늘에 제(祭)는 언제 지낼까요? 폐하께서 흠천감(钦天监, 천문을 맡아 보던 기관)을 시켜 열흘 안쪽으로 길일을 택해 보내셨어요. 지금 보시겠어요?”
농교가 탕 속에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료를 몇 방울 뿌리며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기쁜 일이에요. 폐하께서 마마의 품계를 올리시고 이렇듯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신 건 혹여라도 권 씨 아가씨가 입궁한 후 마마께서 억울한 일을 당할까 염려하신 거겠지요? 폐하께서 이리 신경 써 주시는 건 마마께 좋은 일입니다.”
아름다운 두 노비는 쉴 새 없이 재잘대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녀들은 장서열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과 동시에 주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한참을 떠들어도 주인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 장서열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잠든 것을 발견한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한 사람은 장서열이 편히 기대어 잘 수 있도록 뒤에 섰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둘 모두 주인에 대한 공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구염락은 무엇을 봐도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모두 거둔 그는 오늘 심지어 온화해 보일 정도로 멀쩡했다.
간밤에 장서열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전신에 힘이 솟는 걸 느꼈다. 그러나 쓸데없이 재잘대는 상소문들은 평소처럼 내던져 버렸다.
구염락은 여러 지역의 재해 상황을 처리하고 몇몇 관리의 승진을 허가한 뒤 농경 서적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오늘 조회에서 곡물 비축 창고를 옮기는 건에 대해 논의가 있었기에 이를 직접 살펴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오후까지 늦잠을 잔 장서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궁 후 처음으로 가극을 듣지 않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활을 집어 든 그녀는 약간 화가 난 얼굴로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궁술은 결코 녹슬지 않았다. 열 발 중 아홉 발이 적중했고, 활은 하나같이 안정적이었다. 빗나간 한 발은 간밤에 멈출 줄 모르던 구염락을 떠올린 탓이었다.
완정과 농교는 주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더욱 조심스럽게 시중을 들 따름이었다.
* * *
먼지 쌓인 저택 안, 현천기는 나무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방 안에 가득한 목재 가구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부하의 보고가 끝나자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현천기는 아무래도 큰 손해를 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벌을 감수하면서까지 황제와 서풍엽의 속을 뒤집으려고 했던 그에게 황제의 빠른 회복은 미처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심지어 황제는 오늘 더욱 기력이 넘쳤다고 했다.
곤장을 맞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신분만 노출시킨 꼴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까지 만회할 수 있다니, 역시 장서열이었다.
사실 현천기를 가장 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구염락의 눈빛이었다. 확실히 장서열은 유년 시절 구염락에게 매우 잘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희대에 길이 남을 지극한 정성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구염락은 장서열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첫 경험이 아닌 여인을 위해 낙홍(落红, 처음 성관계를 맺고 나오는 피)까지 미리 염두에 뒀었다.
이러니 이제 누가 감히 장서열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눈 깜짝할 새 비(妃)로 봉해졌다. 여기에 그녀의 뛰어난 수단까지 더해진다면 이제 그녀를 끌어내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현천기는 이해득실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자였다. 그는 이제 장서열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장서열을 도발한다면 필시 자신에게 불운이 닥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서열을 짜증나게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현천기는 마침내 그녀를 골탕 먹일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는 죽은 심장을 다시 살리는 심정으로 최근 몰래 여섯 명의 각로들을 음해하는 데 쏟았던 노력 중 일부를 장서열에게 떼어 주기로 했다.
현천기는 두 명의 미인을 교육시킬 생각이었다. 두 여인이 장서열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현천기는 몸에 생긴 상처의 아픔이 조금 가시는 걸 느꼈다. 그는 권력 외에 또 다른 생존 목표를 찾아냈다.
* * *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장서전은 모레에 현비를 알현하라는 명을 받았다. 오랫동안 감정에 흔들리지 않던 조옥언의 기품 있는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감격이 떠올랐다.
장서열을 입궁시킨 것에 대한 후회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조옥언은 딸아이가 반드시 뜻을 이루기만을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딸을 볼 면목이 없었다.
조옥언의 며느리가 된 주사섬(周思纤)도 함께 현비를 알현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녀는 평소 말수가 적은 자신이 혹시라도 실수를 저질러 현비의 명성에 먹칠을 할까 걱정이었다.
주사섬은 혼인 전 겁이 많아 모친을 따라다니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때 미리 식견을 쌓아 두지 못한 탓에 그녀는 수줍음이 많았고 매사에 앞장서 나서지 못했다.
주사섬은 송구스러운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면서 자신 같은 아내를 맞이한 장서전에게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남편처럼 품행이 올곧은 사람이 어째서 과거 귀족 아가씨들에게 재차 혼담을 거절당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주사섬은 남편이 자신보다 더 나은 여인과 혼인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를 지닌 것도 아니었으며 평소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남편을 난처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그녀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조 씨 집안의 유일한 남자가 된 장서전은 궁에서 내려온 명을 받들며 은혜에 감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킨 그는 명을 전한 이에게 상을 내렸다. 그의 눈에 무거운 빛이 감돌았다.
민감하게 남편의 변화를 눈치챈 주사섬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이건 큰 경사인데 어째서 좋아하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