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장서열은 태후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권여아는 비(妃)로 봉해졌기에 내명부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여인이었다. 그런 권여아에게 구태여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려 애를 쓴다면 괜한 부작용을 낳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어른인 태후의 뜻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가서 만정의 처소로 쓸 수 있도록 경옥전(琼玉殿) 편전을 치우라고 해라.”
“예, 마마.”
경옥전은 조로전과 가까운 곳으로 과거 귀비의 거처였기 때문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경옥전이 장서열의 거처인 조로전과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구염락은 자연히 만정을 편히 보게 될 것이고, 덕분에 그가 만정에게 애정을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장서열은 전생에서 만정이 보냈던 슬픈 일생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만정과 자신 모두 뜻대로 생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별안간 화 마마가 정말로 수방(绣房, 수를 놓는 일을 하는 부서)에 다녀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활기찬 얼굴로 뛰어들었다.
“마마! 경하 드립니다, 마마! 방금 폐하께서 마마의 품계를 높여 이제 현비(贤妃)마마가 되셨습니다! 진심으로 경하 드리옵니다, 마마!”
화 마마가 기쁨에 겨운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대전은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들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꿇고 축하 인사를 올렸다.
“경하 드립니다, 현비마마! 홍복을 누리십시오.”
멍하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서열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얼굴은 부드러웠으나 목소리는 득의양양했다.
“모두에게 상을 내리겠다.”
이제 권여아에게 무릎 꿇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었다면 권여아에게 절을 해야 했을 것이다. 장서열은 그녀가 입궁하면 아예 조로전 밖으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설마 권여아가 자신에게 절을 받기 위해 조로전까지 찾아올 리는 없지 않은가.
조로전에 즐거운 웃음꽃이 피었다. 주인의 지위가 빨리 오르는 것만큼 아랫사람을 안심시키는 건 없었다. 그렇잖아도 화 마마는 장서열이 저군전에서 조로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도 줄곧 품계가 높아지지 않아 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어젯밤 처음 승은을 입은 주인에게 품계를 높여 달라고 황제께 주청을 드리라 말할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화 마마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마침 폐하께서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이다.
화 마마가 눈웃음을 활짝 지었다. 근심으로 인해 생긴 주름이 펴지는 것만 같았다. 폐하께서는 역시 마마를 총애했다. 첫날밤 현비가 황제를 언짢게 만드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염락이 언짢을 리 없었다. 오히려 그는 매우 기뻤다. 그녀는 충분히 비(妃)가 될 만한 자격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구염락은 지난밤을 떠올리며 자중하던 마음을 잊고 만사를 제쳐 놓은 채 조로전으로 달려갔다.
구염락은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그는 어젯밤 일로 장서열에게 너무 미안했기에 흥분을 가라앉히는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장서열을 볼 때마다 피가 끓어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전과 달리 확실히 요즘에는 심각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채였다. 서둘러 수틀에서 고개를 든 그녀가 미소를 머금은 채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왔어요?”
그녀는 몸에 꼭 맞는 자색 치마에 얇은 연보라색 겉옷을 두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구염락은 이내 얼굴을 붉혔다.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자신과 보낸 밤에 만족했을지, 혹시 역시나 어린 사내는 시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스러웠다. 그 사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장서열은 손을 뻗어 구염락의 겉옷을 벗겨 주려 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 구염락이 다시 얼굴을 붉히며 손에서 힘을 뺐다. 만약 조금 전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을 그녀가 읽었다면 분명 자제력을 잃은 그를 싫어할 게 뻔했다.
고개를 떨군 구염락은 왠지 모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낯선 행동이 영 의아했다.
‘왜 이러는 거지? 설마 어젯밤에 내가 부적절하게 굴었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지난밤 그녀는 못나 보이는 방법을 쓸 새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염락에게 시달렸다. 물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렇다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가?’
장서열은 그만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넋을 잃은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황홀하고 격정적이었던 전날 밤을 떠올린 그는 부끄러움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구염락은 차마 장서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다시 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계속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이런 일까지 달래 줘야 할 정도로 그가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찌할 바 모르는 그의 모습에서 문득 전생에서의 자신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첫날밤을 보낸 그녀가 꼭 오늘날 구염락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민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잠자리에서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저녁은 드셨어요? 어선방(御膳房)에 채소 위주의 식사를 들이라고 얘기해 놨습니다. 싫으시면 전전(前殿)에서 식사를 가져오라고 하고요.”
“괜찮아. 난 채소 요리가 좋아.”
구염락은 고기는 영 내키지 않았다. 장서열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당연히 그가 채소 요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저와 함께 식사하느라 폐하께서 고생이 많으세요. 농교, 식사를 들이거라.”
구염락이 자연스레 장서열의 뒤를 따랐다. 그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습관처럼 그녀의 뒤를 따르려 했다. 결국 장서열이 주의를 주었다.
“폐하, 먼저 씻고 오셔야죠. 곧 식사하셔야 하잖아요.”
당황한 구염락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씻으러 갔다.
그가 나올 때쯤 음식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화려한 색상의 접시와 각양각색의 음식은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구염락의 눈길은 옆자리에 쏠려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반쯤 받치고 앉은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안쓰러워 보였다. 구염락은 그녀의 눈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눈치챘다.
구염락은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장서열의 손을 쥐자 그녀가 구염락을 향해 방긋 웃었다. 동시의 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그녀의 웃는 얼굴이 두려웠다.
장서열은 입궁한 뒤 언제나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억지로 웃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전에 서풍엽에게 그랬듯 뾰로통한 모습이나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없이 그를 포용할 뿐인 그녀에게 구염락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아파?”
물론 구염락은 그녀를 질책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의 팔을 문지르며 지난밤 그가 남긴 옅은 자국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뿐이었다.
장서열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녀가 어색하게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구염락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좀처럼 반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오랜만에 강경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프냐니까.”
살짝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눈처럼 새하얀 피부 위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장서열은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먼저 완정과 하인들에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라고 지시했다.
“이제 괜찮아요.”
고개를 든 구염락이 소년의 티를 벗은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서열아, 너… 내게 만족해?”
구염락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 장서열의 뺨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두 번의 생을 살고 있는 그녀라도 이토록 대담한 발언에는 마음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서열에게서 답이 없자 구염락은 순간 긴장했다.
“서열아.”
그는 자신의 첫날밤이 너무 미숙하지는 않았는지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무언의 압박에 짓눌린 장서열이 결국 아주 미세한 각도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말했다.
“폐하, 식사하세요.”
그러나 구염락은 너무 긴장한 탓에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만일… 서열이가 서풍엽처럼 진중한 사람을 더 좋아하면 어쩐다.’
생각할수록 조급한 마음에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 인간이 왜 자꾸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대놓고 말하라는 거야? 수치심도 없나 봐!’
전생과 현재의 생을 통틀어 감히 그녀에게 이런 노골적인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다. 과거 서풍엽과의 관계는 너무 빠르게 끝난 탓에 딱히 비교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장서열은 정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절박하고 진지한 얼굴을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숙인 장서열은 편치 않은 마음을 참아가며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염락은 즉시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꾹 다물고 있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답에 마음 가득 충만함을 느낀 그가 그제야 수줍음을 아는 사람처럼 얼굴에 어색한 홍조를 띠었다.
동시에 온몸에 야만적인 피가 소용돌이치는 것을 감추기 위해 그는 빠른 속도로 입 안에 음식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장서열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를 따라 식사를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는 일부러 대범한 척하기 위해 마지막에는 밥을 더 달라고까지 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장서열은 손을 씻는 구염락의 시중을 들었다. 그는 창가 근처 책상에 앉아 다시 진지한 얼굴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침착한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했다. 대주국에 그가 있다면 백성들은 영원히 정토(净土,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의 세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장서열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믿음직스러운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는 곧 탁자로 이동해 수를 놓기 시작했다. 남녀의 사랑을 차치하고라도 구염락은 정말로 훌륭한 제왕이었다.
촛불이 흔들리고 밤이 깊어 갔다. 채찍 소리가 네 번 울려 퍼졌을 때 장서열이 탁자에서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눈을 비비자 눈가에 붉은 흔적이 남았다. 나른한 눈빛이 매혹적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