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210)화 (210/449)

제210화

소식을 들은 구염락은 평온한 얼굴로 혜령에게 두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둘 다 참으로 한가한가 보군. 그럴 거면 차라리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허리를 숙인 현천기는 무릎을 꿇고 완벽히 복종하는 자세로 조용히 엎드렸다. 조금 전 서풍엽을 자극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풍엽도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현천기처럼 정성스럽지는 않았으나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는 그가 비록 구염락을 이상적인 제왕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육세지란(六势之乱)에 대처하던 과감한 결단력만큼은 높이 산 덕분이었다.

또한 인정하기 싫었지만 과거 장서열의 뒤를 쫓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구염락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만약 장서열을 빼앗아 가지만 않았다면 서풍엽은 구염락의 오늘을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구염락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둘 모두 그에게는 불쾌한 존재였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하필 불쾌한 두 존재가 그의 앞에 쌍으로 나타난 것이다. 구염락은 그들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현천기는 진심으로 무릎을 꿇은 채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는 뜻밖에도 화를 참지 못한 서풍엽을 원망했다. 조금 약을 올렸다고 감히 황제의 앞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서풍엽은 진노한 황제가 당장 그들을 죽여 버릴 수도 있다는 게 두렵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서풍엽은 몹시 괴로웠다. 그는 아직도 구염락이 장서열을 몰래 황궁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여인이었다는 사실이 거슬린다면, 그리하여 역시 여인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혹시라도 옛정을 생각한 구염락이 그녀를 놓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애경(爱卿, 황제가 신하를 부르는 호칭)이 매우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군. 얼마나 대단한 중대사이기에 주먹질까지 오간 게지?”

사대부로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서풍엽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되는 건 현천기의 입을 찢어 놓지 못한 것뿐이었다. 애초에 현천기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장서열이 입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떠올린 서풍엽은 이내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폐하, 소신… 단독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풍엽은 조금이나마 희망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순간 비린 냄새를 맡은 고양이처럼 현천기가 번뜩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며 지나친 관심을 삼가기로 했다.

힐끗 서풍엽을 바라본 구염락이 망설임 없이 손을 저어 현천기를 내보냈다. 두 사람이 싸운 연유에 대해서는 어차피 누군가 보고를 할 터였다. 구염락은 과거 손을 댈 수 없는 존재였던 서풍엽이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과연 자신에게서 장서열을 빼앗아 갈 수 없을 만큼 나약해졌을까.

“폐하, 만일 가능하시다면…….”

잠시 침묵하던 서풍엽이 결연하게 말했다.

“언젠가 그녀에게 싫증이 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그녀를 궁 밖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구염락은 문득 웃고 싶었다. 서풍엽은 지금 황제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해도 되느냐 묻고 있었다. 이를 누가, 어떻게 승낙하겠는가. 구염락은 자신이 눈을 감는 날 그대로 장서열을 수절시켜 평생 자신을 그리워하게 만들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구염락을 거슬리게 한 건 서풍엽의 눈에 자신이 장서열에게 무심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 구염락은 다른 사람이 그리 생각하는 건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풍엽은 아니었다.

‘설마 서열이를 사랑하는 건 본인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짐은 단지 갖지 못한 장난감을 빼앗은 것뿐이고?’

물론 구염락이 장서열을 빼앗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이제 그의 것이었고, 그가 볼 수 있는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게 된 그녀의 존재로 인해 구염락은 더는 생의 어둠도, 무의미함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제 장서열은 살아있는 한 그의 것이었다. 구염락은 대체 서풍엽이 무슨 근거로 마땅히 그녀가 그의 소유인 듯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풍엽은 장서열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듯 깊이 사랑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구염락은 정말로 그에게 죽음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바보가 아니었다. 서풍엽을 죽여 장서열이 평생 그를 기억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구염락은 서풍엽을 천천히 괴롭혀 줄 작정이었다. 장서열의 기억 속에 서풍엽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유감스럽다는 감정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며, 최후에는 그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서풍엽은 다시는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구염락은 은근한 불안과 증오를 느꼈다.

“짐은 그대가 어진 신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선을 넘는 말은 삼가도록 하라. 그런 발언이 그녀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터.”

구염락이 조용히 말했다. 조회 때 그를 죽일 듯 쳐다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물러가라. 짐은 오늘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를 보태려 입을 열었던 서풍엽은 끝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원망할 자격조차 없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서풍엽은 쓸쓸히 물러갔다.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구염락이 혜령을 쳐다보았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혜령은 곧 황제의 뜻을 알아차렸다. 폐하는 지금 자신에게 이 상황을 몰래 퍼뜨리라고 눈치를 준 것이었다. 서풍엽이 황제의 면전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황제는 포용력 있게 그를 용서했다.

혜령은 눈치가 빠른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는 장서열이 비호하는 하인답게 대태감이 될 자질이 있는 자였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리자는 매우 언짢았다. 하지만 기회는 스스로 쟁취하는 자의 것이었다. 소리자는 혜령보다 황제의 심중을 잘 헤아리는 자였다. 그는 기필코 이번 임무를 혜령보다 더욱 뛰어나게 완수하리라 마음먹었다.

현천기는 이미 전과가 있는 데다 장 소의에게 미움을 산 몸이었다. 그는 세자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끌려 나가 곤장을 맞았다. 현천기는 서풍엽을 죽도록 원망했다.

* * *

구염락은 온종일 몹시 바빴다.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장서열의 앞날을 위해 그는 반드시 입지를 튼튼히 다져야 했다.

그는 언제나 장서열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묻어두었을 뿐 만사를 제쳐두고 그녀를 찾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에 목을 매는 모습을 그녀가 온전히 좋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구염락이 쉬는 틈을 타 소리자는 눈치껏 금서를 들여보냈다. 금서는 차를 올리던 중 무심결에 말을 꺼냈다.

“소의마마께서는 약을 바르시고 식사를 하신 뒤 잠시 낮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악관(乐官)의 연주를 듣고 계십니다. 마마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이셨습니다. 또한 마마께서는 폐하의 안부를 물어보셨습니다.”

금서의 말에 구염락은 오전 내내 곤두서 있던 긴장이 일순간 풀리는 걸 느꼈다. 그녀는 어젯밤 경솔했던 자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안부를 물었다. 간밤의 일을 생각하자 구염락은 온몸에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린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수히 많은 역경을 헤쳐 왔다. 정말로 이러한 과거를 잊었다면 그는 즉시 어리석은 제왕이 되어 장서열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구염락이 달려드는 바람에 살갗이 살짝 벗겨졌을 뿐, 장서열은 몸에 큰 이상이 없었다. 몸에 남아 있는 흔적에 비하면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전 내내 쉬고 약을 바르자 불편한 것도 없었다.

긴 의자 위에 비스듬히 앉은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실을 나눴다. 대추색 의자 위로 묶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늘어졌다. 웃음을 머금은 그녀는 가느다란 실을 잡으며 농교가 읽어주는 서신의 내용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의 서신에서 새 올케 이야기가 전해졌을 때 장서열은 문득 인생무상을 느꼈다. 인간은 본래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두 번의 생을 살면서도 끝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나무빗을 든 완정이 장서열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완정의 눈에 장서열의 몸에 남은 희미한 흔적들이 들어왔다. 완정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폐하께서는 겉보기에는 차분해 보이지만 사실 참으로 심한 분이구나. 평소에는 아가씨께 감히 손도 대지 못하는 분이 이리도 아가씨를 괴롭히다니. 어찌 벌써부터 이리 문란하게 군단 말인가. 지금도 이러한데 폐하께서 좀 더 자라면 아가씨께서 어떻게 견디실지…….’

금실을 다 나눈 장서열이 화 마마에게 어린 호랑이 도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농일(弄一)이 책자를 받쳐 들고 화 마마를 지나쳐 들어왔다.

“소의마마께 보고 드립니다. 인사사(人事司)에서 두 후궁의 처소를 정해 올렸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장서열이 실을 고르던 손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만정의 처소는 어디지?”

농일이 공손하게 답했다.

“네, 마마. 효월헌(晓月轩)입니다.”

문득 장서열의 손이 멈췄다. 효월헌은 자녕궁과는 바짝 붙어 있고, 황제와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물론 조로전과의 거리도 멀었다.

장서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 정한 것이냐?”

냉랭한 물음에 농일이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마마. 자녕궁(慈宁宫)에서 인사사에 사람을 보내 정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 잘못된 것이라도 있는지요?”

매우 조심스러운 농일의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장서열이 다른 것을 물었다.

“권 씨 아가씨의 처소는?”

농일이 서둘러 책자를 펼쳐보며 말했다.

“정심전(静心殿)입니다.”

장서열은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심전은 궁에서 가장 초라한 전각 중 하나로 올해 막 수리를 시작해 아직도 사람이 거처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거리 또한 황제와 가깝지 않았다.

그러나 정심전은 과거 구염락이 오랫동안 거주한 곳이었다. 태후는 권여아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구염락이 옛 처소의 추억을 떠올리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려운 시기에 그를 도와준 권여아를 잊지 말라고 시시각각 일깨우는 걸까?’

장서열은 참으로 교묘한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권여아는 조용히 그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처소를, 만정은 장서열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처소를 얻었다. 이는 만정이 장서열의 입김에 의해 총애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수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정의 처소가 너무 멀다면 그만큼 장서열이 신경을 쓰기 어려워진다. 그럼 그녀가 자신을 돌봐 주지 않는다고 느낀 만정이 이에 불만을 품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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