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한편 권서함은 침묵을 지키며 대전에 서 있었다. 그는 오늘 구염락의 적절치 못한 태도에도 매우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역시 속으로는 어리둥절했다. 어차피 황제의 합방은 비밀이 아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구염락의 행동은 정말 이상했다.
다만 권서함은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늘날 용상에 앉은 구염락은 과거 장서열의 뒤를 쫓아다니던 아이로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버림받은 황자였다. 그 아이가 어느덧 저렇게 성장해 제위에 오르고, 심지어 최후에 장서열을 얻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구염락은 이제 장서열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에 반해 과거 장서열과 함께였던 서풍엽은 이제 그녀를 한 번 보고 싶어도 영영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권서함은 실없는 생각을 떨쳐 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장서열은 더 이상 자신이 넘볼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걱정해야 할 일은 누이동생인 권여아가 입궁한 뒤의 상황이었다. 권서함은 여인들의 전쟁이 단순히 치고 박는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의 고모인 태후가 버티고 있기에 권여아의 처지도 예전처럼 난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권서함은 장서열이 있는 이상 권여아의 장래가 그리 평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권여아가 입궁할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는 누이동생에게 일러줘야 할 것들을 모두 일러주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권여아에게 달려 있었다.
권서함은 누이동생이 지나치게 교만하게 굴지 않기를, 구염락이 장서열과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항상 잊지 않기를 바랐다.
“폐하! 작년에 선발한 수녀들을 입궁시키는 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한 각로(韩 阁老)는 똑같은 말을 이미 열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일각에 퇴청을 고했을 그는 오늘은 웬일인지 도통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심사숙고해 주시옵소서, 폐하!”
수녀들은 모두 열일곱 꽃다운 나이로 각 가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아이들이었다. 하늘을 찌를 만한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이들은 결코 입궁을 포기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구염락의 눈빛이 순간 제자리를 찾았다. 이를 본 한 각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구염락이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운 눈초리로 조정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그에게 여인을 대령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젯밤 그런 불쾌한 꿈을 꿨던 그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는 계속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들은 재차 똑같은 주청을 올려댔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어젯밤 처음 합방을 치른 그에게 다음날 바로 선황제가 고른 여인들을 입궁시키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구염락은 그들의 눈에 자신이 그토록 여인에 굶주린 사람으로 보이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서열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는 여자에게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한 각로가 분명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오해였다. 한 각로는 어떠한 사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집안에는 입궁시킬 만한 여인이 없으므로 오히려 그가 적극적으로 주청을 올리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작년 수녀 선발에서 간택된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황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황제가 뜻밖에도 사망하자 대신들은 새 황제가 된 구염락에게 그녀들을 후궁으로 맞이하라고 종용했다. 그렇게 된다면 황실은 이들 가문을 달래는 한편 조정에서 새 황제의 위신을 세울 수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이것이야말로 새 황제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선황의 죽음으로 눈앞에 있던 부귀영화가 물거품이 된 후, 다시 딸이 입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신하는 없었다. 새로 즉위한 어린 황제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거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생의 전반부 내내 남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구염락은 황제가 된 뒤부터는 누구에게도 휘둘리려 하지 않았다. 용상에 앉은 구염락이 원하는 건 신하들을 복종시키고, 올바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랏일과 후궁을 들이는 일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후궁을 미끼로 조정 대신들을 매수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런 황제가 되느니 차라리 바보 병신이 되는 게 나았다.
구염락이 주청을 거절하자 조정 대신들은 경악했다. 분명 어렵지 않을 거라 여긴 탓이었다.
“폐하…….”
구염락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감히 제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며 방자하게 구는 신하와, 죽음을 걸고 간언하면 제왕을 이길 수 있다고 으스대는 문신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구염락은 끝까지 승낙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한 각로와 뜻을 함께 하던 대신들 역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가 어찌 이렇게 제멋대로란 말인가.’
‘백 번 양보해 선황을 시해한 혐의를 차치하고라도 신하들의 의견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성격은 정말 견디기 힘들군.’
‘태자로 옹립할 당시만 해도 멀쩡했던 자가 어째서 제위에 오른 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저리 뒤틀린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대주국의 문신들은 수년간 제왕의 잘못을 시정하는 일을 맡아 왔으며, 세 치 혀로 사람을 잡는 데 정통한 이들이었다. 결국 여섯 명의 각로(阁老)들이 앞으로 나와 엄중한 말투로 물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수녀들의 거취를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입꼬리를 한껏 올린 구염락이 경멸에 찬 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제왕이 명성을 위해 신하와 타협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염락은 결코 풍윤제가 고른 여인들을 데려다 장서열을 역겹게 할 생각이 없었다.
“국암사는 규모가 매우 크지. 스무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예부상서 만 대인이 얼른 앞으로 나왔다.
“그렇습니다, 폐하. 국암사는 충분히 크니 선황께서 간택한 수녀들이 그곳에서 선황의 명복을 기원할 수 있다면 이는 국암사에도 큰 영광일 것입니다.”
구염락이 안색이 변한 여섯 명의 각로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연실색한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수녀들이 황실이 아닌 다른 가문과 혼사를 맺게 된다면 적게나마 이득을 얻게 되겠지만, 국암사에 들어간다면 어떠한 장래도 기대할 수 없었다.
만 상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은 집권 세력과 철저히 척을 지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만 상서는 딸 만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만정은 작년 수녀 선발에서 장서열의 도움을 받아 미리 구염락의 후궁으로 내정됐다. 이미 입궁한 장서열과 아직 입궁하지 못한 권여아를 제외하면 그의 딸 만정은 내명부의 세 번째 후궁이었다.
내명부에 정식 주인이 세 명뿐인 것은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만일 만정이 황제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훗날 귀비(贵妃)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그는 황제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앞장 서 나서야 했다. 중요한 건 어쨌든 황제가 그 여인들을 후궁으로 들일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구염락은 신하들이 얌전해지자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신하들이 기꺼이 국암사로 딸을 보내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굳이 딸을 희생시켜가며 충성심을 보여 주겠다면 구염락으로선 굳이 이를 막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딸을 희생해도 이름 한번 알리지 못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그들을 눈여겨보았을 뿐 일단 이번 일은 덮었다.
“폐하, 소신 아뢸 것이 있습니다…….”
구염락은 신하의 보고를 들으며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사불란하게 공무를 처리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꿈속에서 본 쓸쓸한 그림자와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다른 여인은 필요치 않았다. 누구도 장서열을 울릴 만한 가치가 없었다. 구염락은 이제껏 한 번도 그런 불결한 생각을 품은 적이 없다고 자부했다.
조회가 끝난 뒤 구염락은 조로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밝은 대낮에 여인을 찾지 않는 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밀실 앞에는 구염락을 알현하려는 몇몇 신하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서풍엽과 현천기도 있었다.
마치 의도적인 듯 현천기는 서풍엽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살짝 떨어진 곳이었다.
사람들이 공손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며 기다리는 사이 현천기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다 조용히 서풍엽에게 다가갔다. 입가에 불쾌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조회는 좀 어떠셨는지요? 마음이 아파서 견디지 못하겠다거나… 혹 불쾌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서풍엽이 현천기를 쳐다보았다. 이전의 부드러움이 사라진 눈빛은 날카로운 충왕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현천기는 모진 고문을 당한 뒤로 오히려 상대방이 분노에 찬 표정을 지을수록 더욱 즐거워했다.
현천기가 악랄하게 입술을 핥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어젯밤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덕분이겠지요.”
순간 눈 속에 드러난 살기를 감춘 서풍엽이 고개를 숙였다. 현천기는 주변의 공기가 더욱 상쾌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후회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신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악귀 같은 현천기에게 이 정도는 약과에 불과했다. 아직 서풍엽의 마음을 후벼팔 것들이 남아 있었다. 서풍엽처럼 지체 높은 세도가의 자제가 보여 주는 원한은 지금보다 훨씬 흥미진진할 것이다.
“서열이의 향기는 정말 좋지요. 은은하고 부드럽고요.”
현천기는 흠뻑 취한 사람처럼 코를 벌름거렸다.
“부드러운 피부가 정말 향기로웠습니다. 엄밀히 말해 세자는 내가 양보한 걸 먹은 거나 다름없…….”
손을 들어 올린 서풍엽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현천기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다. 그가 감히 구염락이 있는 밀실 앞에서 손찌검을 할 거라고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현천기가 반격에 나섰다.
잠시 후, 새 황제의 신흥 세력이었던 두 사람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모인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자의 명성을 불사하고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