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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08)화 (208/449)

제208화

향 하나가 사그라들 동안 구염락의 의식은 몽롱했다. 그가 분노에 찬 채로 잠에서 깼다. 붉은 침대 휘장을 본 그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무도 없어.’

일순간 그의 모든 근육이 긴장했다. 방금 꾼 꿈의 잔상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서열아… 서열아!”

목욕을 마친 장서열이 방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요?”

밤새 구염락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잠든 장서열은 그의 잠꼬대에 결국 잠에서 깼다. 그녀는 내친 김에 일어나 씻고 나오는 길이었다.

“몇 시인데 아직까지 누워 있어요? 다 준비됐으니 어서 가서 씻어요.”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든 구염락이 장서열을 껴안으며 두려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 바람에 장서열은 구염락과 함께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바닥에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젯밤에 이어 결국 오늘 크게 다쳤을 것이다.

구염락이 당황했다.

“괜찮아?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져서… 그러니까 난…….”

네가 사라진 줄 알았어.

장서열은 허리의 통증을 참으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날 지경인 건 오히려 자신이었지만 그녀는 우선 구염락을 위로해 주기로 했다.

“괜찮아요.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놀랐을 뿐이에요. 가서 씻어요. 곧 있으면 조회에 들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구염락은 괜찮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서 태의와 여의(女医)를 불러라! 당직을 서는 자는 모두 빠짐없이 오라고 하라!”

장서열의 손을 움켜잡은 구염락이 진지하게 말했다.

“서열아, 내가 다 잘못했어. 앞으로 정말 잘할게. 절대로 널 서럽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절대로!”

장서열은 구염락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항상 하는 습관적인 고백이겠거니 웃어넘기며 통증을 참았다.

장서열을 안아 든 구염락은 긴장한 얼굴로 자책하며 그녀를 침대 위로 옮겨 주었다.

“아까는 내가 너무 경솔했어. 어젯밤도… 경솔했고. 앞으로는 주의할게.”

장서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속는 셈 치고 믿어 보기로 했다.

“됐어요. 전 괜찮으니까 어서 씻고 조회에 드세요.”

물론 조회에 나가지 않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각하는 건 상당히 창피한 일이었다.

구염락이 미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꾼 꿈과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장서열을 울게 한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돌아가면 금용을 먼 곳으로 내쫓고, 장서열 외의 다른 여인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구염락은 상처 받은 장서열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꿈속에 등장한 또 다른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망할 자식은 서열이에게 대체 왜 그랬지? 심지어 그 여인들을 진심으로 좋아한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서열이를 홀대한 거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구염락은 그들 모두를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잠시 후, 바깥은 태의로 가득 찼다.

“폐하, 송 태의와 나머지 태의들이 도착했습니다.”

막 입을 떼려던 구염락이 순간 매서운 눈으로 소리자를 쏘아보았다.

“호 태의를 들여라.”

소리자를 보는 그의 눈빛은 매우 차가웠다. 구염락은 그들을 몇 번이나 용서했으나 그들은 계속해 장서열을 도발했다.

‘나조차도 손을 대기 아까운 서열이를 감히 네 놈들이 농락해? 내가 너희들을 가만 둘 거라고 생각하느냐?’

소리자는 구염락의 명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구염락은 송 태의가 사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정도의 말단 외원(外员)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이 년 전부터 구염락에 기대어 태의가 되었고, 이후 태의원에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의술 면에서는 다년 간 장서열을 돌보아 온 호 태의를 능가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소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송 태의의 이름만을 입에 올렸다. 구염락은 소리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 특히 몹시도 생생한 꿈을 꾸고 난 뒤였기에 구염락은 왠지 소리자와 금용이 정말로 장서열을 곤경에 빠뜨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서열이가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니까?’

구염락의 날카로운 시선이 칼날처럼 소리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호 태의가 여의(女医) 세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들을 본 장서열이 얼른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는 방금 넘어져서 다친 상처보다 어젯밤에 입은 상흔이 훨씬 많았다. 장서열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흔적을 타인에게 보여줄 마음이 없었다. 상대가 여의(女医)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조금 누워 있다 보면 금방 좋아질 거예요.”

순간 머릿속으로 소리자를 능지처참하고 있던 구염락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지금 몸이 온통 상처투성이잖아. 마땅히 태의에게… 보여야…….”

구염락은 점점 차가워지는 장서열의 표정에 점점 말을 흐렸다. 장서열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조회에 가세요. 태의들도 물리시고요.”

그녀는 완정에게 냉찜질을 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조로전을 나선 구염락은 황룡이 수놓아진 용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조로전을 나서자마자 겸손한 표정을 지우고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희미한 새벽이슬을 밟으며 그는 회랑과 노란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는 계단을 지나갔다.

찬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구염락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간밤의 꿈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꿈은 마치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어젯밤 느낀 기쁨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둠이 드리운 차가운 얼굴에는 초조하고 우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숙인 소리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구염락의 뒤를 따랐다. 방금 전 조로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폐하의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과거 구덩이에 묻힐 뻔했던 밤을 제외하면 소리자는 여러 해 동안 오늘처럼 자신을 혐오하듯 바라보는 구염락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혜령 역시 천천히 뒤를 따르며 황제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합방이 불만족스러웠던 거라면 가능한 한 빨리 화 마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 * *

조회가 시작되었다. 평소 딱딱하기 그지없던 조정의 분위기는 오늘따라 더욱 살벌했다. 황제는 본래도 싸늘했으나 오늘은 유난히 그 정도가 심했다.

대전에서 서풍엽을 본 구염락은 갑자기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구염락의 긴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구염락은 그간 장서열과 서풍엽이 보낸 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어젯밤 이후로 구염락은 마음을 넓게 갖기가 힘들었다. 구염락에게 서풍엽은 거의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서풍엽은 장서열을 안았었다. 그는 자신보다도 일찍 장서열에게 사랑받았다. 어젯밤 자신을 받아들인 몸은 과거 서풍엽과 함께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구염락이 분노에 찬 얼굴로 서풍엽을 노려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그는 이제 서열이는 완벽히 나의 것이라고, 너는 과거일 뿐 앞으로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서풍엽은 영원히 그녀에게서 버려지고 지워질 것이다.

구염락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짙어질수록 조정의 분위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앞줄에 선 대신들은 몸서리쳤고, 뒷줄에 선 대신들은 싸늘한 기운에 저절로 몸을 사렸다. 그들은 아버지를 해하고 즉위에 성공한 제왕이 끝까지 살기를 드러내는 모습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하필 오늘 상주(上奏, 신하가 황제에게 아뢰는 일)를 맡은 대신이었다.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여러 차례 황제에게 아뢰어야 할 내용을 고했지만 끝끝내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서풍엽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사나운 구염락의 시선을 느끼며 그보다 더한 씁쓸함을 삼켰다. 서풍엽은 구염락의 분노에서 어젯밤 그가 장서열과 함께였음을 알았다.

서풍엽은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인지 가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팽팽하게 입꼬리를 당긴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인사방(人事房)에는 서풍엽에게 비밀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황제는 어젯밤 조로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서풍엽의 울분은 결코 구염락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는 구염락이 장서열에게 입 맞추는 장면을 상상하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서풍엽은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는 구염락이 굳이 자신을 살려두는 저의를 궁금히 여겼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이라도 구염락이 장서열을 돌려보내 주기를 바랐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위장한 현천기는 대신들 사이에 섞여 구석에 서 있었다. 조금도 이상한 점을 찾아 볼 수 없는 눈빛은 매우 겸손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구염락과 서풍엽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장면인가!’

현천기는 하늘을 보며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간 강철 같은 구염락이 불리한 입장에 처하기만을 바랐던 그에게 이는 분명 통쾌하고 짜릿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현천기는 의아했다. 줄곧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즐겁지가 않았다.

그는 구염락과 서풍엽이 서로를 증오할 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그저 타인의 불행을 보며 즐기는 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천기는 구염락과 서풍엽 이전에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은 장서열의 남자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자복궁 마당에서 장서열이 건넨 말을 곱씹으며 현천기는 확실히 그녀가 많은 남자들을 무릎 꿇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납치 사건 이후 이 년 동안 벌어진 일은 전부 현천기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현천기는 장서열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장서열이 상상 이상의 반격을 가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모란이 수놓아진 그녀의 속옷을 들고 가끔씩 이를 바라보며 지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장서열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지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터였다.

눈 깜짝할 새 애석한 표정을 지운 현천기가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이미 구염락과 서풍엽과는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둠의 세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다시 장서열에게 겁을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현천기는 죽음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죽을 각오로 황권과 구염락을 구역질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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