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구염락은 이미 정방(净房)에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뒤였다. 하지만 붉은 촛불 아래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가느다란 허리를 본 순간, 그는 또 다시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감히 경솔하게 행동할까 두려웠던 그는 평소 그녀의 앞에서 보여준 온화하고 다정한 모습을 지운 채 차가운 눈으로 주렴 밖에 놓인 향로를 응시했다.
활짝 핀 꽃처럼 아리따운 소녀의 주위로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붉은 비녀와 장신구가 사라진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모든 동작은 손짓 하나하나까지 우아했다.
장서열은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정리를 마치고 뒤돌아선 그녀는 구염락이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자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서 뭐 해요?”
구염락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 속에 어린 냉기가 사라지고 막 유순한 표정이 떠오르려던 순간, 갑자기 통제할 수 없는 뜨거운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밤 그녀는 어딘가 달랐다. 그가 안을 때마다 언제나 고요하고 조용하던 느낌과 달리 분명 곳곳에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 그녀에게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속옷이 붉은색이라는 것뿐이었다. 장서열은 오늘 걸친 옷이 특별히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염락의 눈에 그를 위해 붉게 단장한 그녀는 만개한 꽃과 같았다.
농교와 완정은 비녀와 장신구를 정리한 뒤 절을 하고 물러갔다. 뒤를 이어 혜령이 물러가자 소리자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절을 올린 뒤 혜령과 함께 주렴 밖으로 물러갔다.
붉은 촛불이 일렁거렸다. 향기가 감도는 방 안에는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구염락과 여유로운 장서열만이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는 이와 반대였다. 장서열은 구염락과의 첫날밤이 무척 어색했지만 이미 성숙한 사내였던 그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밤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차가웠다. 잠자리에서 어떠한 열정도 느껴지지 않던 사람이 바로 구염락이었다.
전생과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한 장서열이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구염락을 응시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붉은 침대 위를 바라본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조금씩 긴장하고 있었다.
가르쳐야 할 입장에 놓인 장서열이 먼저 손을 뻗었다. 격려의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마마들의 가르침을 무시한 채 그를 남자로 만들기 위해 막 첫 걸음을 떼던 순간이었다.
줄곧 꼼짝도 하지 않던 구염락이 순식간에 야성을 드러낸 사자처럼 장서열을 침대로 몰아붙였다. 그의 눈은 온통 충혈되어 있었다.
모두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구염락은 본래 거칠고 냉혹한 제왕이었다. 오랜 시간 상냥한 그를 보아온 탓에 심지어 장서열조차 그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는 평소처럼 한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지만 이를 신호로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 버렸다.
그녀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 그가 입맞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강하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장서열처럼 완벽한 여인과 함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구염락이 그녀를 놓아주었을 때, 장서열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죽을 듯한 환희에 젖어있을 때 그녀는 죽을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녀의 불그스름한 뺨으로 색기가 묻어났다. 멈출 줄 모르는 그의 열정에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었다.
이제 막 마음을 가라앉힌 구염락의 눈에 다시 사랑하는 여인이 들어왔다. 다시금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제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장서열은 영원히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고 느꼈다.
흥분한 그의 손이 다시 이불을 들추려 할 때였다. 장서열이 돌연 차가운 눈으로 구염락을 쏘아보았다. 굳이 구염락에게 미움 받을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그녀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놀란 구염락이 얼른 이성을 되찾았다. 그가 장서열을 껴안았다.
“서열아,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장서열은 몹시 피곤했다. 심지어 방금 그가 자신을 안으려 했을 때 흠칫 놀랐을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 그는 완전히 통제 불능이었고, 그녀는 정말 죽을 듯이 아팠다.
장서열은 다음에는 반드시 구염락에게 약을 먹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최소한 아까처럼 이성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짐승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이 갓 씻은 포도처럼 촉촉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장서열과 마주보았다. 비록 고통 어린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기운 없는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다.
더는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던 구염락이 장서열을 품에 꼭 껴안고 달래 주었다.
“내가 심했어. 앞으로는…….”
생각해 보니 ‘안 그런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 이렇게까지는 안 할게.”
구염락은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사과에 꼭 진심을 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행동하는 구염락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로 통제력을 잃은 건 좋게 말하면 그만큼 그녀를 사랑한다는 뜻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그만큼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장서열은 두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무의식에는 언제나 그에게 져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됐어요. 이제 그만 자요. 저도 이만 잘게요.”
구염락이 장서열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혀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장서열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구염락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계속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어진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한데 엉켜 있었다. 하지만 두 머리카락은 주인이 누구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장서열의 머리카락은 검고 윤이 났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그렇지 못했다. 구염락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장서열의 것과 겹치지 않도록 얼른 자신의 것을 등 뒤로 넘겨버렸다.
구염락의 시선은 장서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잠시 후, 어느새 그는 그녀의 곁에서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처음으로 마음 편히 쾌락을 맛본 구염락은 긴장을 풀고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누워 있는 침대가 서서히 사라지며 봉장(凤装, 황후가 입는 옷)을 갖춰 입은 장서열이 보였다.
구염락은 용포를 입은 자신이 살짝 수줍어하는 장서열의 손을 이끄는 모습을 보았다. 군신들이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황후 책봉을 위해 붉은 융단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천단(天坛, 천제를 지내는 제단)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만백성 앞에 선 장서열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구염락은 용상에 앉아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장서열의 손을 잡고 올라오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걷는 도중 치마가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그녀가 넘어졌다. 이에 구염락이 황급히 달려 나가려 할 때, ‘그’가 먼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구염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따뜻한 장면은 그간 자신이 수도 없이 상상해 온 황후 책봉식과 똑같았다. 아름답고 단정한 장서열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지켜주는 모습. 두 사람은 분명 평안한 일생을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진 광경은 구염락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구염락이 분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이 수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귀찮게 여기며 그녀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구염락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장서열의 손을 잡고 붉은 융단 위를 걷는 ‘또 다른 자신’은 분명 그녀에게 증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꿈인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싫은 내색을 하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장서열이 제단에 오르자 ‘그’는 미련 없이 손을 놓고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제단 너머 담장을 바라보았다. 만일 황후 책봉에 반드시 황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는 절대로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구염락은 당장이라도 저자를 끌어내 목을 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구염락이 ‘그’에게 달려들기 전,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듯했다. 장서열은 한층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얼굴로 땅에 끌리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의 그녀는 달빛 아래 홀로 조로전 입구를 바라보며 애처롭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구염락이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지만 잡히는 건 허공뿐이었다. 뒤돌아선 장서열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구염락은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는 장서열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장서열을 위로해 줄 수 없다면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을 직접 끌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못된 자식! 서열이를 슬프게 만들다니!
구염락은 과도할 정도로 화려한 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곁에 다른 여인이 누워 있었다. 구염락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놀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서열이에게 이토록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지?
가까이 다가간 구염락이 ‘그’를 밀며 당장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의 뺨을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구염락은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뜻밖에도 번쩍 잠에서 깼다.
“폐하, 왜 그러세요? 잠이 안 오시나요?”
아리따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구염락은 순간 ‘그’가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서열이가 금용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뻔히 알면서 그녀를 궁에 두다니! 이것이야말로 서열이를 화병으로 죽게 만들자고 작정한 게 아닌가!
금용의 따귀까지 후려친 구염락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조로전을 향해 뛰어갔다. 서열이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침대에 누워있던 구염락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냉기가 가시지 않은 눈을 번쩍 뜬 그가 낯선 붉은색의 휘장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그가 칼을 뽑아 들고 곁에 있는 사람의 목을 노리던 그 순간, 손은 텅 비어 있었다.
구염락의 뒤척임에 장서열이 습관처럼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자, 어서 자요… 저 피곤해요…….”
나긋나긋한 말투와 따스한 온기가 얼음장 같은 구염락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장서열의 목을 조르려던 그는 그녀의 몸에 남은 뚜렷한 흔적들을 발견한 후 온통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토록 자제력을 잃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서열이 눈을 깜빡였다.
“왜 아직 안 자요… 얼른 자요. 조금 있으면 조정에 나가야 하잖아요… 말 들어요…….”
장서열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몸을 가까이 기댔다. 그녀를 껴안으려는 건지 아니면 밀어내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심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