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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03)화 (203/449)
  • 제203화

    이러한 국면에도 아랑곳없이 풍윤 40년은 유유히 지나갔다. 연말에 시행된 수녀 선발이 끝나자 간택된 여인들은 집으로 돌아가 입궁 준비에 들어갔다. 그 사이 효자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단정한 몸가짐으로 자다가 천수를 다했으므로 가히 호상(好喪,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장례)이라 할 만했다.

    태후의 유언에 따라 장례는 소박하게 거행되었다. 그녀는 모든 백성이 평소와 다름없이 즐거울 수 있도록 예정된 혼례를 그대로 진행케 했다. 태후는 백성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떠나길 원했다.

    조정에는 나이 든 대신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태후의 명복을 빌며 손수 제사를 올렸다.

    반평생 조정에서 고초를 겪은 효자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근검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과 동시에, 만백성 앞에 자애롭지 않은 아버지와 효도하지 않는 자식을 비판했다. 어떤 이는 조정을 주시하고 어떤 이는 과거를 추억했다.

    장서열이 조용한 자녕궁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주인이었던 태후는 일생 동안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며 살았다. 장서열은 효자황태후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후는 그 존재만으로 어머니로 하여금 자신을 기꺼이 입궁시키도록 만들었다.

    ‘좀 더 일찍 떠나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어쩌면 이번 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장서열은 발걸음을 옮기며 이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만족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녀는 으리으리한 주홍색 담벼락 위로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봄이 싹트고 있었다.

    * * *

    장서양은 제1방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각양각색의 천으로 기워진 낡은 솜옷을 걸친 그가 어깨를 감싼 채 몸을 덜덜 떨었다.

    봄이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추웠다. 그저께 내린 눈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생전 처음 동상에 걸린 장서양의 손가락은 무척이나 가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서양은 외형적으로 과묵하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눈에 그는 아무리 실의에 빠져도 타락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그는 이 길목에서 벌써 한 달째 장서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장서영에게 은자를 받아 내거나 혹은, 오라버니를 알아본 장서영과 함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한편 장서영은 마차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잡은 아리따운 소녀는 반쯤 핀 꽃봉오리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곁에 차를 따라 주는 시녀를 둔 그녀는 좋은 옷감으로 지은 봄옷을 입고, 가장 좋아하는 진주 비녀를 꽂고 있었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는 중이었다.

    갑자기 마차가 흔들렸다. 그 바람에 장서영은 하마터면 손에 든 차를 쏟을 뻔했다. 밖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엄하다! 웬 거지가 감히 조부(赵府)의 마차를 가로막는 것이냐!”

    장서영은 순식간에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일부러 길을 돌아왔는데 또 마주치다니!’

    놀란 장서영이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예상대로 길을 막고 있는 건 큰오라버니였다. 마부가 바뀌는 바람에 오늘은 길을 돌아가지 않아 마주치게 된 듯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하던 각 저택의 일꾼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 마차 주변을 에워쌌다.

    장서영은 창피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어째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처음에는 그녀도 세 사람을 동정하여 장신구를 팔아 은자를 보내곤 했다. 검소하게만 생활한다면 그들은 평생을 그 은자로 먹고 살 수 있었고, 이는 두 오라버니를 혼인시키기에도 무리가 없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은자를 요구했다. 세 사람은 장서영의 처지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조옥언은 만약 그들에게 한 번만 더 은자를 보낸다면 그녀를 쫓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큰오라버니와 어머니는 내가 조 씨 가문에서 쫓겨나기를 바라는 걸까? 정말로 첩이 되어 평생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살기를 바라는 거야?’

    장서영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머니와 큰오라버니가 자신을 은자로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그녀는 욕심을 버린 상태였다.

    이제야 겨우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조 부인은 그녀의 혼처를 물색하고 있었다. 조 부인이 건넨 혼처는 모두 정실부인 자리였고, 남자의 신분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비록 부유한 대갓집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그녀보다 신분이 높았다. 장서영은 그저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큰오라버니는 또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과 접촉하는 걸 모친인 조옥언이 싫어한다는 걸 뻔히 다 알면서도!

    “서영아! 큰오라버니야. 이리 나와 봐! 넌 정말 나와 어머니를 모른 척하고 도둑을 어머니로 모실 셈이야? 넌 용모 단정하니 충분히 부잣집에 시집갈 수 있어. 대체 집사 집안이 뭐가 나쁘다는 거야? 서영아, 조 부인에게 속지 마!”

    장서영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 일찍이 두 오라버니는 조부(赵府) 앞에 꿇어 앉아 부인에게 양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딸들의 혼사를 걱정한 조 부인은 남자들은 전부 내치고 여자아이 몇 명만을 거두었다.

    장서영은 그들보다 더욱 오랫동안 부탁한 끝에 겨우 조부(赵府)의 양녀가 될 수 있었다. 조 부인은 양녀로 들인 아이들에게 어떤 혼처를 원하는지 물었다. 만약 정실부인을 원한다면 신분이 낮은 대신 가장 장래가 유망한 사내를 골라줄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첩을 원한다면 고위 관료와 혼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양녀들은 모두 정실부인이 되기를 원했고 조 부인은 이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조 부인은 이들에게 계속해 여러 가지 재능을 익히게 해 주었다.

    과거 장서영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거문고 연주를 배우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 손에 들린 악기의 가격이 얼마나 값비싼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조 부인만큼 그녀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큰오라버니는 그녀에게 도둑을 어머니로 모신다고 했다. 장서영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부(赵府) 앞에 꿇어앉아 있었던 건 큰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 부인은 그를 거둬 주지 않았다.

    장서영은 조 부인의 결정이 옳다고 생각했다. 큰오라버니는 이미 장성해 스스로 먹고 살 능력이 있으니 굳이 조 부인에게 의지할 이유가 없었다.

    장서양은 누이동생이 계속해 마차에서 나오지 않자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서영아, 왜 이렇게 변한 것이냐! 조옥언이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는지 잊은 거야? 정말로 조옥언에게 네 혼사를 맡겨 우리 삼남매의 마지막 희망을 끊을 셈이냐!”

    화가 난 장서영이 결국 휘장을 젖히고 소리쳤다.

    “오라버니들의 희망은 저를 은자에 팔아넘기는 거잖아요!”

    장서영이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애처롭게 흐느끼는 모습은 꼭 어렸을 때처럼 곱고 예뻤다.

    “오라버니, 전 오라버니를 탓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오히려 저를 탓하고 있잖아요…….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요.”

    장서영은 스스로가 너무 불쌍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지금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조부(赵府)에서 쫓겨날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장 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할 만큼 했으나 가족들은 도통 돈을 아껴 쓰지 않았다.

    “이미 제가 알아봤어요. 어차피 은자가 있다 해도 오라버니는 국자감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오라버니의 학식이라면 어디에서든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데, 왜 계속 국자감만 고집하는 거예요? 서당에 가면 되잖아요!”

    “…….”

    “오라버니는 꼭 이 누이동생이 몸을 팔아서 은자를 얻어야만 속이 시원하겠어요? 전 부귀영화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정실부인이 되어 조용히 살고 싶다고요!”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자가 장신성의 서출 아들이지? 예전에는 사람이 괜찮아 보였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변했을꼬. 자기 누이동생을 팔려고 한대.”

    “난 예전에 저자를 도련님이라고 부른 적도 있어.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일 년 고생했다고 저 꼴이 됐군.”

    “조 부인이 어진 분이라 그렇지. 장신성을 위해 그간 그의 첩실들과 서출까지 죄다 먹여 살렸잖아. 서출들 교육은 또 얼마나 잘 시켰어?”

    “조 부인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조 부인을 모욕하다니.”

    “웃기지도 않군. 조 부인이 어디 그렇게 한가한 분인가? 자기들이 조 부인이 신경 쓸 만큼 중요한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야.”

    “배은망덕한 것들! 저런 꼴이 되어도 싸.”

    “가세. 저런 놈을 계속 봤다가는 우리 눈만 더러워져.”

    장서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예전이었다면 저런 천한 것들과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즉시 몸을 돌려 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에게 욕을 먹는 게 대수가 아니었다. 오로지 누이동생을 잡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영아,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게 마음 아프지도 않아? 서목이는 하는 일 없이 놀다가 요즘에는 거리에서 빈둥거리고 있어.”

    장서영은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그들의 생활고가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라버니가 제 몫을 했다면 전부 문제가 없었을 일이었다. 장서영은 왜 자신이 그런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장서양은 마치 그녀가 조부에 있기 때문에 가족들이 비참해진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장서양은 장서영이 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누이동생을 아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또한 할 수만 있다면 누이동생을 관 씨 가문의 정실로 시집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관 노야는 연경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다. 그런 가문에 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그 자체만으로 감지덕지였다.

    “서영아, 사람에게는 각자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어. 자신만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안 돼.”

    “그럼 저더러 평생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의 뒷바라지나 하며 살라는 거예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학문이 뛰어나잖아요. 거리에서 글씨를 써서 파는 게 대체 뭐가 나빠요? 오라버니만 마음을 바꾸면 가족들 모두 따뜻하고 배부른 생활을 할 수 있어요. 오라버니는 왜 끝까지 부귀영화만 고집하는 거예요!”

    장서양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자신이 나락에 떨어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좌상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분명 좋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모든 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서양은 다시 높은 곳에 서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내팽개친 사람에게 자신을 버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서 씨 가문의 아가씨 역시 자신을 버리고 장서전의 첩이 된 걸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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