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장서열은 현천기를 보면서도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그리 깨끗한 영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꺼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장서열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현천기의 모습에 거의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태감으로까지 위장을 해?’
장서열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그의 두 다리 사이로 향했다.
‘설마 이미……?’
현천기가 갑자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보고 싶으십니까, 마마? 노비가 벗어서 보여 드릴까요?”
장서열은 실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경직된 시선으로 현천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결코 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안 될 것도 없지.”
은은한 향기가 현천기의 코끝을 감쌌다. 현천기는 마치 기이한 사냥감을 발견한 듯 본능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보시겠습니까?”
태자의 후궁이 외간 남자의 벗은 몸을 보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현천기는 일부러 장서열을 놀리고 있었다. 만약 장서열이 당황하여 피한다면 그는 그 광기 어린 성격상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게 뻔했다. 하지만 장서열은 조금도 그렇게 해 주고픈 마음이 없었다.
“안 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현천기가 정말로 옷을 벗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현천기는 벗지 못했다. 일부러 죽으려는 게 아닌 이상 감히 구염락에게 도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오직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절대로 구염락의 노여움을 살 수 없었다.
현천기는 흥미를 잃고 장서열을 희롱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이 여인은 갈수록 귀엽지가 않았다. 역시 여인은 혼인을 하면 사나워지는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괜히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말을 마친 현천기가 수줍으면서도 주눅이 든 표정으로 힐끗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귀신처럼 새하얀 얼굴로 진짜 태감인 양 굽신대는 모습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장서열은 절로 칭찬이 나올 지경이었다. 탁월한 연기력이었다. 과연 현천기는 높은 지위에 오를 만한 자였다. 게다가 그는 이번 생에서 구염락의 생지옥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왔다.
장서열이 ‘여짐친림(如朕亲临)’ 영패를 다시 거두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즉시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제가 이곳에 나타난 게 놀랍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비빈이라면 벌써 놀라서 소리쳤을 것이다.
“글쎄. 전하의 명이 아니라면 네가 어떻게 후궁에 나타났겠느냐?”
현천기는 모든 흥미를 잃었다. 이 여인은 언제나 보통내기가 아니어서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양측이 먼저 싸우게 놔둔 뒤 천천히 등장했을 것이다.
“완정을 안으로 데려가 쉬게 하라.”
장서열은 일사불란하게 사태를 수습했다. 그녀는 딱히 현천기를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본래부터 자신의 시중을 들던 소태감인 양 그를 대했다. 뒤돌아선 장서열의 뒷모습은 눈부시게 가냘팠다. 그녀에게 철저히 무시당하자 현천기는 돌연 원한이 샘솟는 걸 느꼈다.
‘이런 모습도 아무렇지가 않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그는 여전히 원한에 가득 차 있었지만 장서열은 그날로부터 벗어났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현천기 자신만이 그날 일을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현천기는 망가진 얼굴로 태자와 장서열 앞에 나타나 눈엣가시 같은 자신의 존재를 시시때때로 일깨워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몰골은 죄인에게 빠른 자백을 받아내는 효과가 있을 뿐 두 사람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태자는 여전히 그를 신하로, 장서열은 여전히 그를 낯선 사람으로 대했다.
과거에 매달려 있는 건 오로지 현천기 자신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 보였다. 현천기는 이런 자신이 어릿광대처럼 느껴져 속이 쓰렸다.
모든 일을 처리한 장서열은 하인들에게 자복궁을 떠나지 말라고 명했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던 그녀는 문득 현천기가 아직도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서열이 힐끗 현천기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떨군 그가 또 어떤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은 현천기에게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이미 공평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현천기는 확실히 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특히 신출귀몰한 능력과 위장술만큼은 대주국에서 가히 일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현천기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해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장서열이 말했다.
“현 대인, 태자 전하께서는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에게 과거지사를 추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에요.”
그녀는 태자의 눈 밖에 난 일에 얽매여 현천기가 자포자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순간 현천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죽은 생선처럼 섬뜩한 눈에 의아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장서열은 몸서리를 치며 괜한 말을 꺼낸 것은 아닌지 속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세상에 자신의 치부가 공개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현천기도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었다.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나와 있었던 사고일 뿐이에요.”
장서열은 ‘사고‘라는 두 글자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난 전하께서 당신을 어떻게 대하든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그런 모습으로 평생 내 앞을 지나다닌다 해도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구태여 그럴 필요 없어요.”
“…….”
“당신에게는 원대한 사명과 포부가 있어요. 난 당신이 그 일에 얽매여 능력을 훼손시키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다른 이가 당신의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는 나에 대한 원망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그건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힘들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어요.”
“…….”
“진심입니다. 전하는 감옥에서 살아 나온 사람에게 더는 죄를 묻지 않아요. 당신의 존재가 그걸 증명하죠. 당신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어요. 그러니 전하가 나 때문에 당신을 버릴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그런 주인이라면 당신이 이렇게 나타날 수도 없었겠죠. 현천기, 그런 위장술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넌 삐딱하고 오만한 말투가 더 잘 어울리지.’
유쾌하게 웃어 보인 장서열이 현천기를 향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방으로 돌아갔다. 지나간 일은 이미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현천기는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긴 옷과 머리카락을 스쳤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야심이 얼음을 깨고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강하게 거부하며 맞섰다.
밤의 장막이 드리우고 하늘에서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을 무렵, 현천기가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침내 과거의 야심이 오만하게 고개를 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현천기는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는 모든 것을 딛고 올라온 현 씨 가문의 후계자였으며, 복수보다 가문을 계승해야 할 사명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줄곧 추구해 오던 목표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난 지금 태감 복장을 하고 여기서 뭐하는 거지? 무얼 위해서 이런 역겨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더더욱 자신이 아니었다.
끔찍한 기억을 얻게 된 여인조차 모든 걸 다 털어내고 자신을 먼지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현천기는 자신이 사사로운 일에 얽매여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사람이라 생각지 않았다.
머리에 썼던 태감 모자를 바닥에 버린 그가 뒤돌아 떠났다. 그는 현천기였다. 더 이상 형부(刑部)의 일은 필요 없었다.
구염락은 현천기가 형부(刑部)를 떠나 원래의 직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살인마’가 사라지자 연경은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았다. 저승사자가 사라진 후, 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현 씨 가문은 동면에 들어간 독사처럼 아득한 조정 속에 몸을 숨긴 채 사람들을 지켜보며 웃었다.
* * *
자복궁과의 힘겨루기에서 처참히 패한 양비는 바짝 약이 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연장자임을 내세우며 계속해 장서열을 불러댔다. 그러나 장서열은 태연히 일상을 지속하며 병을 핑계 삼아 모든 부름을 일체 거부했다.
황후의 명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두 궁의 관계는 군사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장서열은 언제나 자신의 긍지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굳이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줄 필요가 없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여러 차례 벌어진 갈등을 지켜본 궁의 세력들은 고민 끝에 점차 저군전의 장서열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황후를 분노케 했다. 화가 난 황후가 손에 들고 있던 약사발을 던져 깨뜨렸다.
“이런 천하에 나쁜 년! 본궁은 그 계집이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악독한 여인을 어찌 황실에 남겨둘 수 있겠느냐! 여봐라! 본궁이 당장 그 천한 년을 폐할 것이다! 반드시 폐할 것이야!”
그러나 황후의 의지(懿旨, 황후의 뜻 혹은 그 뜻이 담긴 글)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태자도, 심지어 황제조차도 장서열에게 죄를 묻지 않는 마당에 황후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었다.
가극을 듣는 장서열을 끌어내려다 지친 후궁들은 직접 사람을 데리고 저군전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장서열은 손쉽게 그들을 물리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랫것들을 때리고 죽이는 야만적인 기세에 황제의 비빈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자복궁의 여인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온화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도 자복궁의 여인을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다.
화 마마는 장서열을 완전히 믿고 복종했다. 그녀는 언제나 허리를 낮추고 장서열이 무슨 말을 하든 싱글벙글 웃었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장 양원은 분명 귀비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출신이 고귀한 귀족 여인들 중 이토록 사납고도 영민한 여인은 없었다.
내명부는 잠시 평온해졌다. 하지만 조정에서 황제와 태자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전부 우왕좌왕했다. 한쪽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한쪽은 당대의 황제였다. 어느 편에 서든 궁지에 빠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