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금용은 하룻밤 사이에 안면을 바꾼 저군전의 하인들이 몹시도 낯설었다.
이제 그녀는 작은 일을 하나 처리할 때에도 굳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귀한 옷은 빨래를 맡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보냈던 옷이 모두 엉망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금용은 장서열에게 달려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방이 점점 작아지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는 이유가 모두 금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용은 머리를 싸매고 어떻게 하면 금서에게서 일등궁녀의 자리를 다시 빼앗아 올지 궁리했다. 소리자는 이미 자신을 도와줄 수 없으므로 금용은 어떻게든 꾀를 내어 태자의 곁을 되찾아야 했다.
금용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금서에게는 죽음뿐이었다. 금서는 이미 장 양원을 선택했고, 장 양원에게 충성하여 얻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금용을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장 양원이 금서의 뒤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금서는 장 양원을 통해 태자의 기호와 취향을 익힐 수 있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금서는 태자의 시중을 드는 것이 생각만큼 무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금서는 금용을 음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덕분에 최근 며칠간 금용과 금서는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송 마마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금용이 가진 패는 장 양원에 의해 모두 사라졌다. 이제 금용은 장 양원에게 납작 엎드려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황궁에서 이러한 일은 본래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주인이 자신의 궁에서 자신의 하인을 징벌한 일인 데다 태자가 이를 용인한 이상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하지만 궁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득세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특히 스스로를 손윗사람이라 여기는 여인들이 그러했다. 그녀들은 장서열의 기분을 망치고 싶어 했으며 특히 장서열이 궁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걸 원치 않았다.
최근 황제와 태자의 대립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태자가 총애해 마지않는 장 양원의 불행은 뭇 궁중 여인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처소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장서열을 괴롭힐 구실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또한 황제가 조정에서 태자에게 당한 창피를 되갚아 주기 위해, 그 명분을 들어 막무가내로 저군전에 쳐들어가고자 했다.
각 궁에서 빈번하게 사람을 보내 저군전을 염탐하기 시작하자 화 마마는 서서히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궁에서 잔뼈가 굵은 노인이었다. 비록 전전(前殿)에서 시중을 들지는 않았으나 그녀 역시 최근 조정의 불안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마당에 다른 궁의 하인들까지 걸핏하면 들락거리니 화 마마로서는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둑을 둔 후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산책을 즐기는 고상한 취미를 유지했다. 또 다른 궁에서 보내온 계집을 내쫓은 뒤, 초조함이 극에 달한 화 마마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마, 아무래도 귀비마마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어떨까요? 만약 귀비마마께서 정말로 납시기라도 한다면…….”
“시어머니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다.”
최근 구염락은 업무를 마치는 시간이 점점 늦었고, 피로로 인해 붉게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장서열은 누구와도 할 얘기가 없었다. 외부와는 왕래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화 마마는 장 양원처럼 느긋하게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황제와 태자의 대립도 모자라 양쪽의 후궁까지 다투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그녀들은 분명 장 양원에게 불효를 따질 것이고, 양원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금용처럼 천한 계집과는 차원이 다른 간사한 주인들이었다.
장서열은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설령 누군가 언짢은 얼굴로 찾아온대도 산책을 할 시간에는 산책을 하고, 노래를 듣는 시간에는 노래를 들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유독 몸이 근질근질했던 양비는 결국 여덟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병약한 몸을 이끌면서까지 장서열을 찾아왔다. 마침내 소나무 밑에 앉아 있는 장서열을 발견한 그녀가 질투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과연 태자의 총애를 독차지할 만하군.’
양비는 마치 천성이 그러한 양 더욱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존귀한 웃전이 직접 아랫사람을 찾아와 친절히 행동하고 있으니, 아랫사람은 즉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마땅했다. 그래야만 양비도 솟구친 질투심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서열은 뜰에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자복궁의 뜰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악대와 함께 양비 무리까지 들어오자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양비의 행차에 사람들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태자의 후궁과 황제의 후궁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장서열이 양비보다 전도유망하다 해도 당연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장서열은 양비를 바라보며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태자의 친모도 아닌, 그저 손윗사람일 뿐인 양비가 설마 저군전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왜, 태자라도 유혹하려고?’
굳이 먼저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양비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양비의 속내가 뭘까 생각했다. 아마 자신을 놀려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괜한 트집을 잡아 혼내고 망신을 주려는 속셈일 것이다.
장서열은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태자를 홀로 독점했다는 구설수에 오른 것도 모자라 불효자라는 낙인까지 찍히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불같은 성격을 과시하며 악랄한 여인이 될 수도 없었다.
양비가 가까이 다가오자 장서열은 허리춤에서 ‘여짐친림(如朕亲临, 짐을 대하듯 이 자를 대하라)’ 영패 열 개를 끌러 자신의 주위에 빙 둘러 놓았다. 그런 다음 양비를 향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마마를 뵈옵니다.”
장서열은 대범하게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해 노래를 감상했다.
양비의 얼굴은 즉시 사색이 되었다. 본래도 병약한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양비가 마치 괴물을 보듯 장서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양비가 화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일부러 소란을 피우러 온 게 아니라면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먼저 영패를 꺼내놓지 않았다면 양비는 문안인사를 오지 않는 것을 트집 잡아 한 시진은 족히 자신을 꿇어앉혀 놓았을 것이다.
영패 두 개를 더 끌러낸 장서열이 다시 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사방팔방이 모두 안전했다. 장서열과 양비 외에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양비가 데려온 건장한 마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 본 양비의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졌다. 양비가 빈정대며 입을 열었다.
“양원은 좋은 물건이 참 많군. 설마 또 있는 건 아니겠지?”
‘이 망할 계집에게 웬 영패가 그리 많아!’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것의 몇 배는 더 있습니다. 자복궁을 한 바퀴 두르고도 남지요.”
그 외에도 ‘면사금패(免死金牌, 죽을죄를 사면하는 금패)’까지 있다는 말을 장서열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마마께서도 노래를 들으러 오셨나 봅니다. 앉아서 함께 감상하시지요.”
물론 양비는 장서열과 한가하게 노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장서열을 잡아 끌어내 귀비 앞으로 데려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현재 황후를 대신해 내명부를 총괄하고 있는 귀비가 장 양원을 폐위시킨다면 제아무리 태자라도 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장서열 주변에 깔린 ‘여짐친림(如朕亲临)’ 영패를 앞에 두고 양비는 결코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문 양비는 병약한 몸으로 머리를 굴려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이미 자복궁에 온 이상 순순히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것이다.
어차피 서로 우호적이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 굳이 착한 척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양비가 즉시 입을 열었다.
“무엄하다! 장 양원, 네가 간이 부었구나. 감히 폐하께서 하사한 영패를……!”
“여봐라! 양비가 폐하의 영패를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당장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나가 매우 쳐라!”
이 분야에 관해 장서열만큼 정통한 전문가는 없었다. 이는 누군가가 가르친다고 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럴 때면 장서열조차도 자신의 재능에 식은땀이 났다.
양비가 어떠한 신분인지 장서열이 모를 리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장서열은 마땅히 손윗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차피 태자까지 황제와 파국을 맞이한 마당에, 굳이 황제의 후궁과 화평을 유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쳐라!”
자복궁은 장서열의 처소였다. 지리적 열세로 양비 무리는 단숨에 제압당했다. 심지어 화 마마도 모르는 낯선 노비들이 우르르 나와 양비 측 사람들을 제압했다. 이어 양비의 입까지 틀어막은 그들은 정말로 그녀를 끌고 나가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약간 놀랐지만 궁중 암투의 고수답게 즉시 평정을 되찾았다. 화 마마와 농교, 완정은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비 측 사람들과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던 와중 갑자기 모든 게 진압되었다. 적들은 이미 끌려 나가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
화 마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분은 양비… 양비마마인데! 양원이 때리라고 했다고 정말 때리다니!’
농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가씨가 어렸을 때처럼 잔인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농교의 뒤에 몸을 숨긴 완정은 아가씨처럼 선한 주인이 어쩌다 궁에 들어와 매질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가씨가 때리는 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건 다행이었다. 그녀는 그저 남이 맞는 것을 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완정은 문득 자신이 못된 생각을 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몸을 떨며 장서열을 바라보던 그녀는 주인의 곁에 웬 귀신같은 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온통 창백한 데다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이제 막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놀란 농교가 얼른 쓰러지는 완정을 붙잡았다. 때마침 농교도 그를 본 후 완정과 함께 까무러칠 뻔한 참이었다.
현천기는 자신의 외형이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그의 빼어난 외모를 예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히죽히죽 웃었다. 창백한 손가락으로 바닥에 놓인 ‘여짐친림(如朕亲临)’ 영패를 받쳐 든 모습은 정말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