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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200)화 (200/449)

제200화

구염락의 대답에 장서열이 짐짓 동정 어린 시선으로 금용을 바라보았다.

“그럼… 신첩이 금용에게 혼처를 정해 줘도 괜찮을까요?”

말을 마친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어떻게 발버둥치는지 똑똑히 지켜봐 주마.’

구염락은 아무래도 좋았다. 장서열의 입에서 ‘신첩’이라는 호칭이 나온 순간 이미 그의 피는 끓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마음이 달아오르는지 알 수 없는 채로 흥분에 휩싸였다.

“그렇잖아도 나이가 차면 금용을 궁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어. 네가 그 일을 맡아 준다면 정말 좋을 거야.”

자신의 주변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서열 누님은 역시나 정말 착했다. 그녀가 금용의 혼사를 책임져 준다면 금용에게는 몇 번의 생을 거듭해도 받지 못할 큰 복이 될 터였다.

순간 사색이 된 금용이 황급히 앞으로 튀어나와 장서열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마마! 전 혼인하기 싫습니다. 평생 전하와 마마를 모시고 싶습니다! 제발 노비를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마마를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노비를 보내지 마세요… 제발요, 마마…….”

금용이 계속해 바닥에 쿵쿵 머리를 찧었다. 그녀는 장서열이 명을 거둬 주기만을 바랐다.

소리자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는 놀랍고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속 깊숙이 감춰둔 아픔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금용이 혼인하게 된다면 소리자는 그런 그녀를 축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구염락은 금용을 보며 벌컥 화를 냈다.

“일어나라! 대체 무슨 망발이냐. 양원이 너의 혼사를 주관해 주는 건 큰 복이거늘, 어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바닥에 머리를 찧는단 말이냐. 누가 보면 양원이 널 괴롭힌 줄 알 것이다. 네가 그리 나오면 양원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

장서열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 내가 네게 호의를 베풀고 있잖아.’

장서열이 얼른 조심스러운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전하, 혹시 제가 말을 잘못했나요? 금용이 혼인하기 싫어하다니…….”

그녀의 안쓰러운 얼굴을 본 구염락이 즉시 답했다.

“아니, 잘못이라니. 금용에게 좋은 배필을 찾아 주고 싶은 건 내 뜻이기도 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러려던 참이었어.”

대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일시에 조용해졌다.

금용이 태자의 여인이 되기를 꿈꿔왔다는 걸 저군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이를 뒷받침하듯 태자는 줄곧 금용과 소리자를 특별하게 대해 왔다. 모두가 금용의 꿈이 이루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태자에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만일 전하께서 금용을 맞이할 생각이 없다면…….’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일이 참으로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개 대궁녀가 얻는 것에는 결국 한계가 있지 않은가.

금용은 놀라서 쓰러질 것 같았다. 이번에는 태자의 발밑에 엎드린 그녀가 몹시 비통하게 머리를 쿵쿵 찧었다.

“전하, 전하! 노비는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평생 주인을 모시고 살게 해 주세요…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전하, 제발요…….”

“…….”

“마마! 다시는 건방지게 굴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마마… 이렇게 간청 드립니다.”

장서열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어여쁘게 우는 금용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더욱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제야 노비답구나.’

장서열이 하인을 배려하는 주인처럼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 충성하기 위해 궁에 남길 바라는 마음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널 궁에 외로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장서열이 금용의 곱고 연약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금용의 마음을 저버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혹 금용을 태감과 대식(对食, 궁녀와 태감을 명목상의 부부로 맺어주는 것)하게 한다면… 하지만 이것조차 섭섭하게 여기는 건 아닐지 정말 난감하군요.”

순간 소리자의 마음에 한 줄기 섬광이 비쳤다. 만약 금용이 궁을 나가지 않고 남아 있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께 금용을 거둘 마음이 없다면, 금용의 대식(对食) 상대는 아마도…….

소리자는 장서열에게 감사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금용과 자신을 맺어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금용의 원망스러운 눈길이 장서열에게 향했다.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빌었건만 끝까지 날 놓아 주지 않다니!’

장서열이 평온한 얼굴로 금용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호의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금용, 이것도 싫으냐? 난 전하를 섬기는 네 충심을 높이 사고 싶구나.”

구염락이 감격한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사 자신을 위해 마음을 써 주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금용와 소리자까지 돌봐 주고 있었다.

“이 일은 전부 네게 맡길 테니 뜻대로 해. 난 전전(前殿)에 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겠군.”

구염락은 떠나기 아쉽다는 얼굴로 장서열을 한 번 바라본 뒤, 흐뭇한 마음으로 자복궁을 떠났다.

태자가 떠나자 자복궁의 분위기는 즉시 바뀌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다는 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금용을 혼인시키겠다는 태자의 말만큼 자복궁을 안심시키는 건 없었다.

화 마마는 장서열을 향해 절을 올리고픈 심정이었다. 역시 자신의 주인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다니!’

이제 금용이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금용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곧 싱거워졌다. 태자의 등장 직후 금용의 무릎 아래 담요라도 깔아 줄까 고민하던 사람들은 편히 마음을 놓았다. 태자의 마음에 금용이 없는 게 확실해진 이상, 이제 금용은 다른 궁녀들과 다를 바 없는 하인이었다.

눈물을 닦은 금용이 원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장서열을 쏘아보았다. 모든 것을 잃은 이상 금용은 두려울 게 없었다.

“이제 만족해요? 당신이 원했던 결과가 바로 이런 거였잖아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못살게 굴어요?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또 누군가 나타날 거예요. 그 여인들을 다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찰싹!

농교가 금용의 따귀를 후려쳤다.

“무엄하다! 어디서 감히 마마께 헛소리를 하느냐! 다시 남소원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반격하려던 금용은 장서열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장서열이 자신을 또 매질하여 남소원에 갖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차마 더는 선을 넘을 수 없었던 금용이 몸을 움츠렸다.

‘그래야지. 아무리 원한이 깊어도 부디 겉으로 드러내지 말거라. 천천히 화병이 들어 죽어야 한다.’

장서열이 싱긋 웃었다.

“난 널 제거하려는 게 아니다. 태자께서 배필을 찾아 주려 할 만큼 널 불쌍히 여기시니 오히려 난 네가 참으로 부럽구나.”

“…….”

“됐다. 이만 물러가라. 이전에 네가 저지른 잘못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마.”

금용은 반박하고 싶었다. 달려가 장서열의 저 악독한 얼굴을 할퀴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장서열 같은 뻔뻔한 사람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장서열을 자극할 수 없었다.

“노비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마.”

금용은 대야에 눈을 담아온 농교가 이를 자신의 머리에 부으려 하자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장서열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보(棋谱)를 다시 집어 들었다.

“물러가라.”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금용이 억울함을 참으며 물러갔다. 부랴부랴 앞으로 달려온 화 마마가 아첨을 늘어놓았다.

“마마, 정말 대단한 수를 쓰셨습니다!”

장 양원의 대처는 평판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의 자신감 그 자체였다.

“하지만 금용은 마마께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그러나 장서열에게 금용이 두려울 리 없었다. 이제껏 금용의 유일한 버팀목은 구염락이었다. 뒷배를 잃은 궁녀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인생을 똑바로 살았다 말할 수 없었다.

장서열은 특히 사람을 괴롭혀 죽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금용만큼은 결코 쉽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구염락과 금용 사이에 반드시 흉터를 남길 생각이었다.

전생에서 금용이 했던 짓을 되갚아 주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생을 사는지, 그리고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자 했다.

“마마, 아무래도 금용을…….”

장서열이 살짝 시선을 돌리자 놀란 화 마마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노비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 아이를 잘 지켜봐라. 혹시라도 괴롭힘을 당하다 죽는 일이 없도록.”

장서열은 일단 금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대로 남은 생을 금용과 싸우는 데 허비한다면 실패한 일생이 될 뿐이었다. 자신의 적수라면 마땅히 그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장서열은 문득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건 바로 한 각로( 阁老)의 딸이었다.

보살처럼 넓은 마음과 영리한 머리를 가진 여인. 지금도 장서열은 그 아이의 웃음 하나로 꽃이 만개한 듯 세상이 환해지고, ‘언니’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악독했던 자신조차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걸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는 최후에 금용이 탄탄대로를 걷는 데 일조했다.

심지어 장서열은 멍청하게도 그 아이에게 손수 혼례복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 애초에 그 아이가 대놓고 발톱을 드러낸 후 승자가 되었다면 장서열은 크게 원망하지 않고 결과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어느 것 하나 나을 게 없는 계집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하늘 아래 자신보다 잘난 이가 없었던 장서열에게는 분통이 터지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장서열은 더더욱 금용을 죽일 수가 없었다. 곧 금용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굳이 그녀를 살려둔 이유를.

* * *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장서열은 해묵은 걱정거리 하나를 해결한 덕분에 요 며칠 기분이 무척 좋았다. 오랫동안 치장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녀는 모처럼 몸단장에 신경을 썼다.

깔끔한 물색 비단옷을 입은 그녀가 모피 방울 장식으로 허리를 조였다. 치마에 주름을 잡자 순식간에 겨울옷이 봄옷처럼 싱그럽게 변했다. 맵시 있고 늘씬한 몸매가 더욱 매혹적으로 돋보였다.

구염락은 새삼 감탄하며 장서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꾸준히 노력한다면 서풍엽에게 그랬듯 그녀 역시 자신에게도 애틋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풍엽을 질투할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그가 억지로 빼앗아온 사람이었다.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야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금용은 무척 바빠졌다. 그녀의 주변에 머물던 모두가 사라졌다. 송 마마는 더 이상 금용을 찾지 않고, 화 마마에게 은자를 바치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썼다.

금수(锦绣)와 금화(锦画) 역시 더는 금용에게 굽신거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금용을 버리고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금서를 찾아가 비위를 맞추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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