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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9)화 (199/449)
  • 제199화

    농교의 시선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금용에게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농교가 주인에게 고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장서열은 최근 바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할 일이 없으면 혼자 바둑을 두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바둑판에 놓인 대국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농교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양원마마, 금용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장서열은 한창 흥이 올라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기보(棋谱,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법을 적은 책)를 떠날 줄을 몰랐다. 농교가 애교 있게 입술을 삐죽였다.

    “마마, 노비는 마마 손에 들린 바둑돌보다 못한 사람이군요. 금용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그제야 제대로 알아들은 장서열이 답했다.

    “그래?”

    장서열은 금용이 의외로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잔머리를 굴리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들라 해라.”

    “네.”

    금용이 들어왔다. 상처가 다 나은 그녀는 많이 여위어 있었지만 덕분에 더욱 애틋해 보였다.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에 장서열은 왠지 돌로 제 발등을 찧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털썩 무릎을 꿇은 금용이 머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

    “노비, 양원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부디 노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노비가 우매하여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앞으로는 규칙을 엄히 지키고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그간 태자 전하를 모셨던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노비를 용서해 주세요.”

    말을 마친 금용이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주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바둑판에서 시선을 거둔 화 마마가 무릎을 꿇은 금용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저군전의 일등 궁녀는 이제 3품 여관(女官)이 되어 있었다. 당시 화 마마는 앞날이 창창한 금용에게 역으로 예를 차려야 했었다.

    불과 삼 개월이었다. 딱 삼 개월 만에 금용은 사실상 허점을 찾을 수 없는 말 한 마디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화 마마는 진심으로 장 양원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용을 다스리는 방식 하나만 보아도 장 양원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금용의 외모는 정말이지…….’

    화 마마가 힐끗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지금 뿌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금용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흑돌을 손에 쥔 장서열이 아래에 꿇어앉은 금용을 쳐다보았다. 서늘한 눈빛은 이전과 달리 반짝 빛났지만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굳이 심술궂은 말투를 숨길 생각도 없이 그녀가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난 뒤끝이 있는 사람이다. 남의 사정을 봐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화 마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음속에 흥분의 물결이 출렁였다. 역시 주인님이었다. 대놓고 속 좁게 구는 모습이 아주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금용에게는 기사회생(起死回生,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서 도로 살아남)할 가능성이 없었다. 장 양원은 그녀를 밑바닥까지 떨어뜨릴 것이다.

    농교가 살짝 눈을 치켜떴다. 확실히 아가씨는 그리 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가씨에게 미움을 사면 누구든 반드시 재수 없는 꼴을 당했다. 금용은 분명 아가씨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완정은 얌전히 선 채 연민에 찬 눈으로 금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마지막에는 주인과 의견을 같이 했다. 심지어 당시 기분이 좋지 않던 주인을 괴롭혔으니 금용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었다.

    장서열의 말에 금용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장서열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잘못에 대한 벌을 충분히 받았다. 그리고 태자 전하는 양원이 자신을 용서하면 된다고 했다. 장서열에게 용서만 받으면 그녀는 당장 전하를 모시러 저군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장 양원이 용서를 거부한 것이다.

    ‘내가 계속 저군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전하는 널 속 좁은 여인이라고 생각할 텐데, 걱정도 안 돼?’

    이윽고 금용은 장 양원이 매번 자신을 꺾어 놓았던 것을 떠올렸다. 교만한 마음을 감춘 금용이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간절히 애원했다.

    “마마,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십시오…….”

    바둑돌을 내려놓은 장서열이 변함없이 말을 이었다.

    “아니. 넌 지금도 잘 지내고 있으니 계속 그렇게 지내거라.”

    말을 마친 장서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바둑돌을 집어 들었다.

    금용은 당황했다. 그녀는 남소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도, 생활도 모두 각박한 그곳에서 그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미 몸이 다 나았기 때문에 더는 요양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저군전으로 돌아와야 했다. 반드시 돌아와야 했다.

    “마마, 마마! 노비를 용서해 주십시오. 노비가 마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노비를 살려 주세요. 앞으로 노비는 마마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간 노비가 전하의 시중을 들었던 것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태자 전하 납시오!”

    순간 대전에 정적이 흘렀다.

    금용의 눈이 번득였다. 딱히 구염락이 도착할 시간을 계산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온 것이다. 금용은 기쁨에 겨워 울기 시작했다. 전하께서는 그간 자신을 염려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본 장서열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기보를 내던졌다. 기보에 부딪친 바둑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와르르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궁녀와 태감이 깜짝 놀라 모조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금용이 겁에 질려 몸을 웅크렸다. 조금 전까지 평온했던 장 양원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전하께서 들어오는 이때에?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게 아닌가.’

    방으로 들어오던 구염락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궁녀와 태감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바닥에는 온통 바둑돌이 흩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장서열의 안색이 매우 나빴다.

    소리자는 이마에 상처를 단 채 바닥에 꿇어앉은 금용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그는 때마침 용서를 빌러온 금용과 마주친 걸 천운이라 여겼다.

    금용은 비록 몸을 회복했지만 여위고 가련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소리자는 순간 마음이 바짝 옥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리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금용을 돕는 일이었다.

    구염락은 하인들 틈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금용을 발견했다. 구염락은 황자로서 정통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결코 뼛속까지 냉정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직 소리자와 금용에 대한 정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남소원에서부터 구염락을 따랐고,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다. 그리고 장서열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구염락이 건너온 건 금용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밀실로 가던 길에 잠시 장서열을 보러 들린 것뿐, 이런 장면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상석에 앉은 장서열은 평소처럼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분노가 극에 달한 지금은 주변으로 그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구염락은 자신이 찾아올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아예 오지 않았던 것처럼 돌아 나가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장서열을 위로하고자 했다. 구염락에게 두려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화를 내는 장서열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무슨 일이지?”

    구염락이 과할 정도로 찬란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는 몰래 고개를 든 금용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를 본 장서열의 눈에 순간 강한 분노가 어렸다.

    ‘감히 내가 있는 곳에서 서로 눈을 마주쳐?’

    쾅!

    분노한 장서열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녀가 다가오는 구염락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화들짝 놀란 구염락이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가 안쓰러운 듯 장서열의 손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참 빨리 왔군요. 내가 당신의 어린 궁녀를 학대할까 봐 걱정되던가요?”

    장서열의 말에 구염락이 얼른 답했다.

    “아니, 난 저 아이가 여기 있는지도 몰랐어. 지나가다가 들른 것뿐이야.”

    장서열이 구염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침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그녀가 치밀어 오르던 분노를 가라앉혔다.

    구염락은 안도하며 한숨을 돌렸다. 만일 금용이 다른 사람 앞에서 사죄를 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유를 불문하고 금용을 두둔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장서열이라면 달랐다. 금용과 소리자는 반드시 자신을 존중하듯 그녀를 존중해야 했다.

    장서열이 금용을 쳐다보았다. 낙담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낙담을 해? 아직도 제 주제를 모르는군.’

    “열셋째.”

    갑자기 장서열이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자리에 앉혔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다정한 태도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는 일단 공포의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전하. 전하께서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 금용을 여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구염락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녀가 두 눈을 깜박이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물었다. 그녀의 숨결이 구염락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순간 구염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장서열의 표정을 살폈다. 감정의 동요가 없는 얼굴이었다.

    구염락은 씁쓸했다. 그는 장서열이 서풍엽에게 접근하는 여인들을 철저히 단속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서풍엽이 감히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곧장 충왕부의 지붕이라도 걷어찰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 장서열은 현모양처가 따로 없었다. 좋은 일이었지만 왠지 구염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구염락은 우선 불편한 마음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장서열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너만 있으면 돼.”

    사실 이 말은 서풍엽의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었다. 서풍엽은 언제나 이 방법으로 장서열을 다독였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몹시 기뻐했다.

    구염락은 다시 한번 장서열이 기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기쁘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물론 원하는 대답을 들은 장서열은 당연히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는 구염락의 마지막 말은 자연히 무시했다. 구염락은 훗날 제왕이 될 몸이었다. 황제가 많은 여인을 거느리는 건 당연하므로 그 말은 믿지 않았다.

    “정말요?”

    구염락은 장서열이 자신의 다짐을 듣고 기뻐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녀는 과거 서풍엽을 독차지하려 했던 것처럼 자신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얼른 장서열의 손을 잡은 구염락이 뜨거운 눈빛으로 진지하게 고백했다.

    “정말이야.”

    그는 여인이라는 존재가 대체 뭐가 좋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좋다한들 자신의 서열 누님과 비교가 될 리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장서열과 황권만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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