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98)화 (198/449)
  • 제198화

    “무슨 일이에요?”

    장서열이 구염락을 끌어안았다.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천성적으로 무자비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장서열은 자식을 죽이고 부모를 죽인 원수가 아닌 이상에야 많은 부분에서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장서열을 안아 든 그가 창가에서 벗어나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다시 당당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몸을 웅크린 채 침대에 누웠다.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별일 아니야… 풍윤이 나보고 비천한 놈이라더군. 사람을 보내 날 죽이려고 했어… 그래서 내가 그들을 모두 죽였지.”

    “폐하께서 정신이 나가신 게 아닌가요?”

    대체 구염락이 뭐가 부족하기에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구염락의 말투는 가벼웠다. 그는 장서열을 껴안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답했다.

    “아니… 풍윤은 나 때문에 서숭산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처럼 교양 없는 태자는 제거하고 황실의 품위에 걸맞은 똑똑하고 예의 바른 황자를 태자로 앉히려는 거야.”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제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구염락은 그리 난폭하지도, 호전적이지도 않았다.

    힘겹게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구염락이 이렇게 빨리 내쳐지는 건 옳지 않았다. 황제가 그를 진정 아들로 여긴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침묵을 유지하며 구염락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그 역시 황제를 깊이 존경했을 것이다.

    자신의 품에서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구염락을 바라보면서 장서열은 그가 아버지를 존경했던 어렸을 때의 마음을 진작에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이번 행동은 아무리 냉정한 구염락이라도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이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참담한 것도 당연했다.

    “폐하께서 경솔하셨어요.”

    구염락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싸늘한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럴 리가. 그에게 우리 목숨은 개미처럼 하찮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제왕이에요.’

    장서열이 계속해 말을 삼켰다.

    ‘비록 여인에게는 박했지만 당신은 역사적으로 나라에 커다란 기여를 한 제왕이에요. 황제는 당신에게 완벽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요. 중요한 건 냉정한 당신이 모든 신하의 존경을 받는다는 거예요.’

    장서열은 차마 구염락의 미래를 말할 수 없었다. 대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신은 육세지란을 평정한 공신(功臣, 나라나 백성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 점을 봐서라도 황제는 구염락을 제대로 대우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구염단신은 권 노야의 조카지.”

    구염락의 대꾸에 장서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줄곧 거대한 물결로 느껴졌던 왕조의 교체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아이들 장난 같이 느껴졌다.

    ‘만일 대주국의 제왕이 바뀌지 않았다면…….’

    황제가 붕어한 뒤 황위 계승자가 구염락인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장서열은 지금처럼 법이 바로서지 못하는 대주국이 아닌, 견고한 군권정책이 시행되는 구염락의 치세가 익숙했다.

    한편 구염락은 기분이 몹시 좋아져 있었다. 심지어 오늘 당한 암살 시도조차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장서열이 물었다.

    “약은 먹었어요?”

    단지 구염락이 걱정되어 한 말이었다. 병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자다가 목이 졸려 죽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서 구염락은 곁에서 잠든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구염락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정곡을 찔린 듯 장서열의 품에서 빠져 나오던 그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자신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한 탓이었다.

    ‘서열이 봤어… 다 봤기 때문에 약을 먹이려는 거야. 내게 정신병이 있으니까……!’

    황실의 자손에게 정신병이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구염락은 순간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은 정상과 광기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열셋째… 괜찮아?”

    순간 장서열의 품에서 빠져 나온 그가 두려움과 자책감, 그리고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만약 장서열의 눈 속에서 일말의 혐오라도 비친다면 바로 덤벼들 기세였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절대로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로 결심했다. 모든 걸 정리한다면 그녀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침대에서 뛰어내린 그가 주변의 모든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은 오로지 버림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구염락의 모습에 장서열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침대 벽에 몸을 기댔다. 왠지 이번 생에서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곧 다른 속셈을 품고 있었던 스스로에게 과분한 영광이었다.

    그녀는 이를 우쭐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세상일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바삐 움직이는 구염락을 바라보면서 그가 핏자국을 볼 수 없도록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구염락을 설득해 약을 먹인 후 잠들게 했다.

    그녀는 밖에 나가 구염락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며,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알렸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는 황권 아래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기도 했다.

    장서열은 자신이 누군가와 생사를 겨룰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녀는 구염락의 손에 죽은 몇 명의 태의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 * *

    구염락은 굳건히 태자 자리를 지켰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수법은 악랄했다. 소문에 의하면 늙은 신하 몇 명이 그를 이겨내지 못한 채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고도 했다.

    장서열은 줄곧 자복궁을 떠나지 않았다. 바깥에는 피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이는 그녀의 공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구염락이 까닭 없이 조심스럽게 구는 모습은 때때로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구염락은 마치 그녀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 여기는 듯 걸음걸이 하나까지 신경을 썼다.

    찬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계절이었지만 궁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인들은 미색을 뽐내며 궁을 활보했다. 어린 궁녀와 수녀(秀女) 몇 명이 죽었으나 워낙 조정에서의 싸움이 치열했던 탓에 이내 잊혀졌다.

    장서열은 훈훈한 방 안에서 가벼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가장자리에 동그란 털 방울이 매달린 옷은 그녀의 가녀린 자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평상 위에 앉은 그녀가 백돌을 집어 들고 앞에 높인 바둑판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잠시 책을 본 후 다시 한 수를 놓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화 마마는 어린 궁녀를 감독하고 돌아와 장서열의 곁을 지켰다. 장서열이 든 바둑돌의 움직임에 따라 화 마마는 때때로 긴장하고 안도했다. 마치 두 나라의 첩보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화 마마는 장서열의 대국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자 전하를 좌지우지하는 이 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습관처럼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화 마마는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주인이 빛나는 것만큼 아랫사람을 안심시키는 건 없었다. 이제는 금용의 할아버지가 돌아온대도 감히 양원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송씨 계집의 계산은 철저히 빗나갔다.

    장서열은 두 달 동안 저군전을 새롭게 바꿔 놓았다. 구염락의 곁을 지키는 일등대궁녀는 금서였고, 소리자의 곁에는 장서열이 보낸 소태감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소리자보다 훨씬 총기가 넘쳤다. 비록 태자와 쌓인 세월은 소리자에 비할 수 없었지만 두 태감은 똘똘 뭉쳐 소리자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소리자는 자신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 그에게 아첨하기 바빴던 사람들은 두 파로 갈라졌고, 그는 많은 일에서 첫 번째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소리자를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그가 구염락의 질문을 듣고도 몇 차례나 우물거렸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 구염락은 더는 그에게 묻지 않고 내감(内监)의 일등공을 불러왔다. 이제 온갖 일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건 일등공이었다.

    소리자는 도처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전하는 더 이상 자신과 금용을 감싸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건 시간 문제였다.

    소리자는 자신이 전하께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전하의 곁에 남을 수 있다 해도 자신의 역할이 점점 작아진다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는 밑바닥 생활이 무엇인지 아는 자였다. 이렇게 된 이상 결코 감정을 앞세워 지금껏 쌓아온 영광을 잃을 수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소리자는 결국 금용을 위한 노력을 그만뒀다. 금용을 보러 가지 않은 지도 벌써 보름이 넘어 있었다. 소리자는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는 자신과 금용을 구염락이 마뜩찮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편 금용은 발을 동동 굴렀다. 소리자의 발길이 뜸해지자 일상에 제약이 걸렸다. 처음에는 식사량이 줄어드는 정도였으나 이제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금용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다시 헐벗고 굶주리게 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겁에 질렸다. 패기를 잃고 다급해진 그녀는 생존을 위해 거듭 소리자에게 만남을 청했다.

    그러나 소리자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이미 둘 중 하나가 망가졌다면 그는 금용의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장서열에게 복종해야 했다.

    숯불을 다 쓰고 나자 찬바람이 휙휙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금용은 너무 두려웠다. 힘들게 얻어낸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물사(物司, 물품을 관리하는 관리)에게 부탁해 겨우 숯 몇 근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송 마마와 금수가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금용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장서열과 타협하기로 했다.

    아침이 되자 쌓인 눈이 녹았다. 마지막으로 눈이 내린 것도 벌써 보름 전 일이었다. 궁에는 외진 곳을 제외하면 어디서도 눈이 내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금용은 잔꾀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3품 궁녀복을 입은 그녀는 동상에 걸린 손을 거두고 자복궁의 궁녀를 따라 조용히 장서열을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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