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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7)화 (197/449)
  • 제197화

    현재 만정은 다소 특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번 수녀 선발에서 태자의 후궁은 총 세 명이 지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만정과 달리 나머지 두 명이 정해지지 않아 자연스레 사람들의 이목은 만정에게 집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만정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괜한 사람들에게 만정이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었다.

    장서열은 계속해 앞을 향해 걸었다. 찬바람 속에서도 사시사철 푸르던 나무들이 모두 두꺼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비록 꽃을 피우지는 못하지만 절로 수수한 매력이 느껴졌다.

    장서열의 뒤를 따르던 농교는 완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고 천천히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수궁은 어때? 소문처럼 그렇게 예쁘고 재능 있는 여인들이 많아?”

    완정은 그들에게 재능이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예뻤어요.”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들은 모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완정이 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아가씨만큼 예쁘지 않았어요.”

    처음 저수궁에 간 완정은 잠시 놀랐었다. 미래의 주인들에게 둘러싸인 완정은 수줍은 성격 탓에 순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만일 자신이 자복궁을 대표해서 왔다는 걸 떠올리지 못했다면 완정은 아마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저수궁의 소녀들은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도 좋았다. 완정은 여태까지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예쁜 여인들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만정 아가씨도 그들 사이에 있으니 돋보인다고 할 수가 없었다.

    농교가 완정에게 무엇인가 더 물으려 할 때였다. 평소 금서와 함께 다니는 궁녀 하나가 돌연 쏜살같이 달려왔다.

    “마마! 양원마마!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는데… 어서 가 보십시오! 무슨 연유인지 전하께서는 돌아오신 뒤로 홀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십니다!”

    어린 궁녀는 눈으로 덮인 바닥을 달려오면서도 신기하게 미끄러지지 않았다.

    잠시 뒤, 장서열의 앞에 무릎을 꿇은 다른 궁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마마를 뵈옵니다. 금서 언니가 노비에게 마마를 모셔 오라 했습니다. 마마께서 반드시 계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을 마친 궁녀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완정은 탄복한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은 궁녀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도 그렇게 뛰어와서 아직도 말할 기운이 남아 있다니. 궁 밖에서 들어온 자신은 그녀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장서열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구염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서는 그녀가 직접 고른 아이였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전전(前殿)으로 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서열이 저군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서가 서둘러 장서열을 맞이했다.

    “마마! 마마…….”

    순간 자신의 결례를 깨달은 금서가 얼른 절을 올렸다.

    “양원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오시자마자 내전(内殿)으로 뛰어드시곤 문까지 잠그셨습니다. 이 공공조차도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태의를 들여보냈지만 모두 얻어맞고 나왔습니다.”

    동시에 장서열의 눈에 멍든 얼굴로 선 태의가 들어왔다. 금서가 얼른 덧붙였다.

    “마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저건 그나마 약과입니다. 더욱 심하게 맞은 태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나갔습니다.”

    순간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장서열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이 입구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소리자에게 향했다.

    장서열은 확실히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몰려들었다. 이는 분명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심지어 구염락은 업무를 마치고도 곧장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번 일을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문득 장서열의 머릿속에 과거 구염락이 애첩을 산 채로 땅에 묻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갑자기 소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치 이제야 장서열을 본 사람처럼, 조금 전까지 침묵하고 있던 그가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마, 마마… 어서 들어가셔서 전하를 봐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어찌된 일인지 몸을 부르르 떠시고 또…….”

    이상한 낌새를 느낀 금서가 얼른 말했다.

    “마마, 먼저 시위에게 태의를 데리고 들어가라고 하십시오. 노비는 혹시라도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금서는 장서열을 등에 업고 금용 대신 저군전을 총괄하는 궁녀가 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장 양원에게 변고가 일어나는 걸 결코 두고 볼 수 없었다. 일이 잘못 된다면 다시 금용이 돌아와 먼저 그녀부터 죽일 것이다.

    소리자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마마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요. 전하께서 좀 더 참으시도록 두십시오. 마마께서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마땅합니다.”

    순간 장서열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소리자는 교활한 자였다. 그는 마치 금서의 말을 따라하는 척 교묘하게 장서열을 모욕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장서열은 오로지 자신의 안전만 중시하고 태자의 안위는 돌보지 않는 여인이었다.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서 소리자와 금용은 똘똘 뭉쳐 자신을 공격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이전부터 구염락과 쌓아 온 세월이라는 게 있었다. 구염락이 발에 채는 돌멩이만도 못한 그녀를 냉대하고 소리자와 금용을 싸고돈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방에 들어가든 말든 장서열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조금 전의 행동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만에 하나 운이 없어 전생에서 생매장된 총비(宠妃)의 전철을 밟게 된다 해도, 황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인이라며 자신을 추서하게 될 것이다.

    “이 공공, 자네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어. 이게 재미있나?”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앞으로 나아간 장서열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걸었다.

    순간 깜짝 놀란 농교와 완정이 그녀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마! 마마, 문을 여세요! 마마!”

    소리자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정신을 차렸다. 겁 없이 방에 들어간 장서열이 앞으로 무슨 밑천으로 금용의 적수가 되겠는가. 전하는 한 번 눈이 돌아가면 부모도 몰라보는 사람이었다

    피에 굶주린 양 거칠고 난폭한 전하를 보면 누구라도 겁에 질릴 터였다. 규방에서 자란 장서열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려 뜻밖의 재난을 당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용모를 잃은 장서열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만약 장 양원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더욱 쉬웠을 것이다. 전하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여인을 헐뜯을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소리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문을 두드리는 두 시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안에서 살려 달라는 비명 소리가 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 * *

    장서열이 한걸음 내딛었다. 눈부신 대전 안은 봄처럼 따뜻했다. 그러나 본래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할 탁자와 의자는 전부 내동댕이쳐져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높은 병풍과 벽에 걸린 작품들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마치 약탈이라도 당한 듯 엉망진창이었다.

    대전에는 바닥 위에 찍힌 핏자국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으로 조용히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장서열이 침착하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땅에 끌리는 자주색 치마가 바닥에 묻은 핏자국에 물들었다. 긴 머리를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가녀린 그림자가 고요히 안으로 향했다.

    하나씩 휘장을 걷어 올리며 외전과 내전이 연결되는 문 앞에 당도한 장서열이 문을 밀어젖혔다. 열린 창문을 통해 한줄기 싸늘한 바람이 들어와 정면에 놓인 담황색 침대 휘장을 걷어 올렸다. 그 사이로 피에 굶주린 흑표범의 핏빛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장서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본능적으로 달아나려던 그녀는 일순간 목숨을 아까워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절로 조소를 흘렸다.

    문득 열려 있는 창문과 불이 꺼진 화로를 본 장서열이 먼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그녀는 침대 위 구염락이 갑자기 달려들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순간 또렷해진 구염락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장서열은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구염락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의 현재 상태와 그가 줄곧 복용해 온 약을 떠올리며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약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미래에 구염락은 거의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장서열은 굳이 무모하게 움직이지 않고 창가에 서서 침대를 응시했다. 의연한 척했지만 실은 너무 긴장한 탓에 차마 구염락을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만에 하나 구염락이 자신을 향해 돌진한다면 곧장 창문을 통해 도망치자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눈 한번 깜작이지 않고 구염락의 반응을 기다렸다.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창문을 넘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서…….”

    갑자기 불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순간 정신을 집중한 장서열이 재빨리 손을 창문 위에 올렸다.

    “서열아……!”

    마치 버려진 새끼가 그리워하던 어미를 만난 듯 달콤하고 서글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장서열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잡았던 창문도 놓은 채였다.

    억울한 표정으로 장서열을 향해 달려든 구염락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그가 반복해 말했다.

    “서열아… 서열아…….”

    장서열의 손이 반사적으로 구염락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끼는 어린 동물을 대하듯 무척이나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장서열은 구염락의 과도한 애정에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구염락의 커다란 몸이 그녀의 품속을 힘껏 파고들었다. 그녀의 옷깃을 꽉 움켜쥔 모습은 마치 그녀가 도망갈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구염락의 모습에 장서열은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서열은 생각했다. 대체 자신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크기에 그가 이토록 무방비 상태인걸까.

    좋지 않았다. 이러면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염락이 아끼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눌러 죽이고 싶어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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