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만정은 어서 비녀를 장서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분명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만정은 장서열이 몹시 부러웠다. 그녀는 타고나길 아름다웠지만 후궁의 의복을 입고 황궁의 진주 비녀로 장식한 후로는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물론 서열 언니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단색 옷에 비녀 하나만 꽂아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만정은 그토록 기품 있고 다정한 장서열이 고작 양원의 신분인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만난 황제의 비빈들은 그녀의 지위가 장서열을 넘어서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태자 전하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서열 언니 한 사람뿐이었다. 장서열이 입궁한 그 순간부터 만정은 이미 장서열 다음가는 여인이자 착한 동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만정이 머리 위에 꽂은 비녀를 어루만지며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 그녀는 이것이 장서열의 것보다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열 언니라면 분명 그녀의 것이 제일 좋다고 칭찬해 줄 터였다.
만소는 만정의 바보 같은 모습에 더욱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양원마마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다음에 양원께서 언니를 부르시면 꼭 꽂고 가서 보여드려요.”
만정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바보라니까.’
만소는 속으로 비웃었다. 언니가 달고 간 것이 귀비가 직접 하사한 비녀라는 걸 알게 되면 장 양원은 질투할 게 뻔했다.
저수궁에 들어온 만소는 궁에서 장 양원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만정은 매번 장 양원을 만나러 갔다. 멍청하게도 웃전에서 탐탁잖아 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막역한 사이일지라도 한 남자를 사이에 둔다면 곧 독약 같은 사이로 발전하기 십상이었다.
이는 만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만정은 순진하게 장서열이 예전과 변함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작 상대는 만정이 입궁한 것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을 텐데도.
* * *
청산의 강물이 고립된 암초를 때렸다.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층층이 이는 물결은 달빛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였다.
암초 위에 선 권서함은 기다란 활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남색 도포가 바람에 흔들렸다. 옅은 남색의 머리끈 위에는 광채가 없는 야광주가 박혀 있었다. 권서함이 침착한 눈빛으로 활을 쏘았다. 또 명중이었다.
그의 옆으로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서비절(西飞绝, 서숭산의 아들)의 화살 역시 과녁의 중심에 꽂혔다.
서비절은 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곱게 자란 연경의 도련님을 단번에 쓰러뜨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불었지만 권서함은 끄떡없었다.
예전에도 그러했다. 그때도 권서함은 이렇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그를 속이고 모든 화살을 명중시켰다. 언뜻 보기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자였다.
대주국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실력이 이 정도까지 향상되다니. 서비절은 못 본 사이 그가 더욱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궁술이 늘었구나. 대주국에서 태자 전하와 나를 제외하면 널 능가할 사람은 없을 거다.”
호위병을 향해 활을 던져 버린 서비절이 말했다. 권서함은 경건한 모습으로 일련의 수궁의식(收弓仪式, 활을 거두는 의식)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하인에게 활을 내주었다.
평온하던 서비절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일그러졌다. 심지어 저자는 취미 삼아 활을 잡고 있지 않은가. 서비절은 분노했다. 권서함은 늘 그랬다. 무슨 일이든 가벼이 하는 척했지만 언제나 남을 압도시킬 만큼 뛰어났다. 서비절은 권서함이 불쾌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손을 닦은 권서함이 암초 위에서 내려왔다. 그의 단정하고 준수한 외모는 훤칠하고 딱딱한 서비절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권서함은 서비절의 말에 언제나 사족 없이 조용히 활을 쏘던 장서열의 자태를 떠올렸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고 믿는 서비절을 완벽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입궁한 장서열과는 이제 다시 궁술을 겨룰 수 없었다. 권서함은 아쉬운 마음으로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왠지 예전만큼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서비절이 침묵을 지키는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그는 실력을 인정하는 이와 평생 가는 친구가 되곤 했다. 태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함께 오대천의 찻집으로 향했다. 서비절이 지나가듯 물었다.
“조옥언은 어떤 여인이지?”
서비절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는 최근 아버지 서숭산의 행보에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권서함이 알게 되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서비절은 아버지가 자신의 친모를 정실부인으로 올릴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옥언이라는 여인은 몹시 신경이 쓰였다. 만약 그 여인이 아버지의 정실이 된다면 훗날 아버지에게는 새로운 적자가 태어날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번만큼은 너무 비이성적으로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조옥언이라는 여인도 다른 여인들처럼 외로움에 못 이겨 아버지에게 사심을 품고 접근한 게 아닌가?’
권서함은 낙엽이 쌓인 계단을 올랐다. 가을 낙엽을 밟는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조국공의 적녀지.”
차갑게 코웃음 친 서비절이 불쾌한 듯 입술을 들썩였다. 거만한 말투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상이 쌓은 공적으로 겨우 관직을 받아 사는 공국부(公国府)? 그럼 그녀의 자녀 중 내세울 만한 인물은?”
서비절은 조옥언의 자식들 중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만약 문제될 게 없다면 서비절은 그 즉시 조 부인에게 손을 쓸 생각이었다. 자신을 건드리면 어떠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게 해 주리라.
권서함이 서비절의 거만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서출로 태어나 서숭산의 예비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또한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을 터였다. 그가 정도를 지키며 지금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허나 안타깝구나…….’
권서함이 무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
“조 부인의 여식은 태자가 가장 총애하는 양원이고, 자제는 현재 제일군 소속이지. 또 황제 폐하께서는 이 년 전 조 부인을 위해 지금까지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위지 대사마를 축출하셨다.
서북 세력을 누르던 위지 대사마가 실각한 덕분에 변경의 수비가 느슨해졌고, 그 덕분에 서왕께서 공을 세우고 업적을 쌓을 기회를 얻은 것이지. 네 아버지께서는 그리하여 왕(王)이 된 것이다.”
서비절의 미간이 구겨졌다. 권서함이 이렇게 길게 말할 정도라면 결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이 폐하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내가 알려주고 싶은 건, 폐하와 왕야께서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음에 품어 온 여인이 바로 조 부인이라는 거다.”
서비절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눈에 일순간 낭패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권서함은 여전히 느긋했다.
“네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조 부인은 네 아버지에게 마음이 없거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제 태자 전하의 후궁이 된 양원마마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조 부인은 재가(再嫁, 재혼)하지 않아.
네가 섣불리 조 부인 앞에 나서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랬다면 네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을 테니까.”
권서함의 날카로운 지적에 서비절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권서함이 그토록 강조하는 조 부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생각하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두 사내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비절은 권서함이 뜻밖에도 자진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당자와 함께 다가오던 서풍엽이 권서함을 발견하고 서로 자연스럽게 공수(拱手,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하는 인사법)했다. 서비절 역시 서풍엽을 보자마자 거만한 표정을 거두고 공수했다.
“세자.”
“서 공자.”
서풍엽이 마주 인사했다. 또래의 다른 소년들보다 중후하고 점잖은 모습이었다.
서풍엽의 뒤에 선 당자는 예전처럼 가볍게 굴지 않았다. 일 년간의 전장 생활과 그 후 일어난 일들은 평소 제멋대로 행동하던 당자를 과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네 사람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각자 길을 떠났다. 누구도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서비절은 서풍엽 일행이 멀어지자 의아한 듯 권서함에게 물었다.
“세자가 좀 이상하지 않아? 전장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군.”
권서함은 대답 없이 속으로 탄식했다. 그리도 아끼던 여인을 떠나보냈으니 어디라도 달라지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그는 무정한 하늘과 예측할 수 없는 세상사를 탓했다.
* * *
폭설이 대주국 절반을 뒤덮었다. 은백색으로 변한 세상은 만 리 밖까지 온통 새하얬다. 웅장한 산천은 눈을 뚫고 우뚝 솟아 있어 사람을 두렵게 했다.
하지만 궁중 여인들은 아름다운 바깥의 설경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녀들은 눈이 내린 황궁도 몹시 예쁘다고 생각했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느껴지는 전각들과 높낮이가 다른 화초들은 모두 눈송이가 만들어낸 천연 분경(盆景, 화분 위에 돌이나 모래 등으로 자연의 풍경처럼 꾸민 것)이 되어 새하얗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저수궁의 소녀들은 입궁 후 내린 첫눈에 대해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채, 후에 아름다운 궁의 주인이 될 상상을 하며 근심 걱정 없이 신나게 설경을 즐겼다.
높은 신분을 지닌 만정은 남몰래 눈덩어리를 쥐며 놀았다. 새하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즐거워하는 큰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반면 황제의 여인들은 이러한 경치가 전혀 새롭지 않았다. 첫눈을 보며 옛일을 추억하는 소수의 여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방에 틀어박혀 수를 놓거나 거문고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복궁은 예외였다. 장서열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책을 했다. 은회색 여우털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나날이 기품 있고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눈 덮인 후원에 선 그녀의 모습은 새하얀 세상에 내려온 유일한 신인 듯 아득했다.
털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장서열이 목에 두른 겉옷을 여미다가 문득 완정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보내 줬느냐?”
완정의 눈에 빛이 어렸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반짝였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탓에 농교처럼 장서열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네. 보냈습니다, 마마. 만 수녀(秀女, 궁에 뽑혀 들어간 여인을 이르는 호칭. 만정万静)께서는 이미 따뜻하게 입고 있으니 마마께 염려 말라 전하셨습니다.”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랫사람들이 만정을 등한시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사람을 시켜 그녀를 챙겨 주었다. 그녀가 보낸 것은 옷이 아닌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