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귀비의 거처인 경옥전(琼玉殿)은 매혹적인 주인을 알려 주듯 호화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황후와 달리 천하의 모범이 될 필요가 없는 귀비는 마음껏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몸이 약간 불편하여 아직 씻는 중이었다.
귀비와 한담을 나누러 찾아온 여섯 비빈은 자리에 앉아 저수궁의 아리따운 소녀들을 입에 올렸다. 세월이 흘러 곧 뒤로 물러나야 하는 그녀들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화제였지만, 그들은 최대한 너그럽고 관대한 척 어린 소녀들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총애를 다툴 필요가 없다 해도 꽃 같은 소녀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분위기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철없는 아이가 황제의 눈에 들어 기고만장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속 시원히 욕하지도, 때리지도 못하게 될 테니 차라리 지금 욕이라도 실컷 하는 편이 나았다.
“소문 들으셨어요? 어젯밤 자복궁의 그 잘난 후궁 때문에 밤새 태의원이 난리였다고 합니다. 하는 짓만 보면 비(妃) 못지않아요.”
서른 살이 조금 넘은 이 여인은 예쁘다기보단 관리를 잘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양비(良妃)께 묻지 않을 수 없겠군요. 비(妃)라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감히 오밤중에 태의원을 번거롭게 만들 수 있는지 말이에요.”
양비가 부드럽게 웃었다. 서른 살 남짓 된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는 비빈들 중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축에 속했다. 차분한 표정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매우 듣기 좋았다.
“장 양원이 아프면 태자는 긴장할 수밖에 없지요. 가끔씩 규칙을 어기는 것도 괜찮습니다.”
짙은 남색 궁장을 한 여인이 즉시 답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어여쁜 눈매를 가진 여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일 년만 지나면 장 양원이 규칙을 어기는 걸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거예요.”
순간 여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사이가 좋은 여인이 빈정대며 말을 받았다.
“어머, 꼭 어린 아가씨가 잘못을 저지르기만을 바라는 사람 같군요. 최소한 아직까지 장 양원은 딱히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으니 뭐라 할 수 없어요.”
태자는 내년이면 주공의 예(周公之礼, 부부가 합궁, 동침하는 것)를 치를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태자는 많은 여인을 취하게 될 것이며, 자연히 여우 같은 장 양원에 대한 총애도 식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웃전에서도 장 양원을 엄히 다스릴 수 있었다.
“맞아요. 다들 장 양원에게 미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해요. 하루에 극단을 두 번이나 불러서 끝도 없이 노래를 듣는 건 오직 그 아이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양비가 온화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애석해 했다.
“장 양원은 정식으로 선발을 거친 게 아닌 데다가 웃전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 예의를 모르는 면이 있어요. 황후마마께서 그녀를 잘 가르쳐야 할 텐데요.”
“태자가 언짢아할까 봐 걱정이죠.”
여인들이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옹졸한 기색이 드러났다.
대태감의 부축을 받은 귀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마치 계속 그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인 양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장 양원은 아랫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아마 장 양원은 괴로워서라도 자복궁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예요.”
여인들이 웃는 낯으로 귀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장 양원이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장 양원은 괴롭지 않아도 자복궁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들은 밉살스럽고 개성 강한 어린 아가씨를 만나려야 만날 수가 없었다.
귀비가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저수궁의 규수들 중 만씨 가문의 아가씨가 특히 장 양원과 친한 사이라지요? 여러분이 궁금하신 듯하니, 한번 불러보도록 할까요?”
귀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던 여인들은 그 말에 장난감을 발견한 양 어서 그 아이를 데려오자고 재촉했다.
그리하여 저수궁에서 열심히 규율을 익히고 있던 만정은 뭇 여자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며 경옥궁의 궁녀를 따라 나섰다.
고개를 숙인 만정은 몹시 안절부절못했다. 나이가 많은 데다 지위와 권세까지 높은 여인들 앞이었다. 만정은 무릎을 꿇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귀비의 목소리에 겁에 질린 만정은 감히 거역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든 뒤, 소심한 눈으로 계단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양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천생 미인으로 타고난 참한 소녀군요. 가히 만씨 가문의 명성을 이을 만합니다.”
양비는 어리석지 않았다. 만정의 뒤에는 결코 눈 밖에 나서는 안 될 예부상서가 있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게 아닌 이상에야 양비가 자진해서 만정을 도발할 리 만무했다.
그 밖의 여인들 역시 모두 총명한 사람들이었다. 무릎을 꿇은 만정에게 칭찬이 쏟아졌다.
모두들 자신의 친딸을 대하는 양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정이 행여나 황제의 여인이 된다면 미모와 높은 신분까지 더해져 최소한 빈으로 봉해질 것은 자명했다. 그때가 되면 만정은 그녀들보다 기세등등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귀비는 만정의 모습에 불쾌한 듯 입술을 오므렸다가 순식간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소녀로구나. 그런데 소문을 듣자하니 태자 전하를 모시게 되었다지? 본궁과 자매의 연을 맺을 수 없다니 안타깝구나.”
만정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는 만씨 가문에서 큰 공을 들인 결과였다.
태자의 생모는 현재 궁에 없었고, 황후는 문을 닫아 건 채 손님을 사절했다. 만정을 태자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만정의 모친에게는 장서열이 있었고, 장서열이 황제에게 부탁한 덕분에 만정은 저수궁의 소녀들 중에서도 첫 번째로 태자의 여인이 되었다.
눈치 빠른 비(妃)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장 양원과 자매가 되겠군요. 듣자하니 두 사람은 예전부터 친한 사이라지요? 앞으로 궁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겠어요.”
말을 마친 여인이 입을 가리고 싱긋 웃었다. 그들은 과연 두 자매의 사이가 언제까지 좋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궁에는 사이좋은 자매가 그리 많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두 사람을 지켜볼 시간이 많았다.
구염락은 아직 태자에 불과했다. 황제의 여인인 그녀들이 실세인 동안 두 사람을 괴롭힐 기회는 충분했다.
만정이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저 양원마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양비가 온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두 사람 중 누가 도움을 받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장 양원은 지금 4품일 뿐이지만 너 역시 신분이 높고 인품과 외모가 모두 뛰어나니 장 양원보다 높은 품계에 봉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장 양원이 너의 보살핌을 받게 될 게야.”
분명한 목적을 가진 말이었으나 만정은 그저 부끄러운 웃음을 지어 보일 뿐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귀비가 입을 열었다.
“초혜전에 있을 때 태자와 사이가 좋았다지? 앞으로 태자께서 다른 사람보다도 널 더 아끼실 테니 참으로 얻기 힘든 복이로구나. 거기에 친한 벗까지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러게 말입니다.”
여인들은 앙큼하게 웃었다. 이들은 곧 펼쳐질 재미난 광경을 하루빨리 볼 수 있기만 기대했다.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길고 긴 궁중에서의 무료한 나날을 버틸 수 없었다.
만정은 여인들의 비웃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단지 칭찬을 늘어놓는 귀비를 힐끗 쳐다봤다가 어린 사슴처럼 깜짝 놀라며 뺨을 붉혔을 뿐이었다.
여인들은 모든 것을 통달한 눈길로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어린 소녀를 쳐다보았다. 만정은 신분과 미모를 보아 훗날 전도유망한 여인이 될 것이 분명했다. 황제와 함께 저물어 가는 그녀들의 눈에 눈부신 나날을 앞에 둔 소녀가 기꺼워 보일 리 없었다.
그들은 만정이 이간질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다만 장서열과 총애 다툼을 일삼은 뒤 그녀가 오늘을 기억하며 원망에 사무쳐 자신들을 원망하지 않도록 결코 심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귀비는 만정에게 몇 마디를 더 건넨 뒤 상을 하사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같은 시각, 자복궁으로 밀봉된 녹색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경옥전에 있던 여인들과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전부 묘사되어 있었다.
소리자가 말했다.
“양원마마, 태자 전하께서 이를 양원께 보여드린 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때마침 장서열은 극을 보고 있었다. 소리자의 말에 그녀가 녹색 봉투를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소리자가 물러갔다.
그러나 소리자가 떠난 뒤에도 장서열은 봉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만정이 비빈들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만정이 그 요망한 계집을 데리고 입궁한 것이다. 게다가 만정은 매사 그 여우 같은 계집을 신경 쓰고 있었다. 장서열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서 장서열의 설득 이후, 만정은 더 이상 만소를 옹호하거나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만소는 만 대인을 부추겨 정실부인의 자녀가 되는 데 성공했고, 언니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이유를 들어 만정을 따라 입궁했다.
장서열은 정말로 그런 입에 발린 말을 믿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착한 척을 했으면 그 총명한 만 부인조차 만소의 본모습을 몰라 봤단 말인가.
장서열은 모처럼 화가 끓어올라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으로 해바라기씨를 부쉈다.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괜히 손을 댔다가는 만정에게 동생을 괴롭힌다는 오해를 살 것이다.
* * *
만소는 언니가 다시 저수궁으로 돌아오자 반갑게 맞이했다.
“언니!”
푸른 치마를 입고 만정과 같은 비녀를 꽂은 만소는 얼핏 보면 서녀(庶女, 첩의 딸)가 아닌, 만정의 친자매 같았다.
만소를 본 만정이 기쁘게 달려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경옥전에서 얻은 좋은 물건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문 앞에 선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만두었다.
동생을 끌고 안으로 뛰어 들어간 만정이 기쁜 얼굴로 품 안에 있는 상자를 열어 만소에게 보여주었다.
“예쁘지? 난 이제껏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비녀는 본 적이 없어. 어때, 잘 어울려?”
방 안에 동생만 있는 틈을 타 만정이 비녀를 꽂고 만소에게 보여주었다. 만소의 시선이 기대가 가득한 만정의 눈으로 향했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만정의 피부는 진주처럼 하얗고 윤기가 흘렀다. 새하얀 손가락을 든 만소가 만정의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비녀를 어루만졌다. 조금만 힘을 주면 손가락이 긁힐 듯한 느낌에 만소가 얼른 손을 거둬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정말 예뻐요. 언니. 그런데 얼른 집어넣는 게 좋겠어요. 누군가 눈독이라도 들이면 어떡해요?”
만정이 웃는 낯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감히 누가 가져가겠어. 이건 귀비마마께서 내리신 상이라 다른 것들과는 달라.”
만정이 혼자 신나서 말했다.
“마침내 서열 언니의 것과 견줄 만한 비녀가 생겼어! 언니가 보면 분명 엄청 놀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