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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4)화 (194/449)
  • 제194화

    “뭐야?”

    “제게 남은 여한이 있다면 그저 황후마마께 화병을 선물해 드리지 못한 것뿐입니다. 덕분에 옥언이 마땅히 올라야 할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요! 물론 황후께서는 폐하를 사랑하실 겁니다. 문제는 폐하께서 어떤 여인을 취하든 흥미가 없…….”

    결국 분을 참지 못한 황제가 벽에 걸려 있던 검을 뽑아 서숭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평생을 대장군으로 살아온 서숭산에게 온종일 의자에 앉아 향락에 빠져 있던 황제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서숭산의 눈에 황권이란 지나가는 개만도 못했다. 물론, 과거 서숭산은 황제를 존중했다. 그러나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여인을 가로챈 순간부터 그는 그저 도둑에 불과했다.

    서숭산은 황제가 역겨움에 못 이겨 죽길 바랐다. 그래서 그가 역겨워할 만한 황자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과거 그에게 당했던 배신과 조옥언을 잃은 슬픔을 그대로 갚아 주기 위해!

    “서숭산! 고작 여인 하나로 이럴 필요가 있느냐!”

    황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검에 기대야 겨우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순간 서숭산의 안색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남의 여인을 빼앗았습니까? 그렇게 빼앗아 놓고 왜 소중히 대하지 않은 겁니까? 내 생명 같은 여인을 빼앗아 갔으면서, 도대체 왜 장난감처럼 하찮게 대했냔 말입니다!”

    비록 황제의 기운은 이전만 못했지만 황실을 대표하는 위엄만큼은 여전히 서숭산 못지않았다.

    “짐이 옛정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조옥언이 편히 살았을 것 같으냐? 조옥언의 딸은 양원이 되었다! 그리고 네 이놈!”

    “…….”

    “짐이 오늘날까지 구염락을 살려 준 것도 다 네놈에게 내린 은혜다!”

    바깥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던 구염락은 황제의 마지막 말에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목숨이야말로 장식품처럼 하찮은 것이었다. 그를 죽인다면 황제의 뜻을, 죽이지 않으면 형제의 정을 고려한 것이니 어느 모로 보나 값진 목숨이 아닐 수 없었다.

    구염락은 산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제의 신임을 얻어야만 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만하지 않고 노력하여 오늘에 이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검을 거둔 황제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원한을 드러내고 있는 서숭산을 바라보았다. 소년 시절 견고했던 두 사람의 우정과 위대한 이상, 군신의 마음을 논하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그렇게나 조옥언을 연모했다고? 하지만 네겐 다른 여인이 많지 않았느냐.”

    “그녀는 다릅니다.”

    “짐에게도 그녀는 특별했다. 만약 그때 짐이 포기하지 않았다면 조옥언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 것 같으냐? 네가 다시 조옥언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냔 말이다.”

    “과거 일을 따져 봐야 무슨 결론이 나겠습니까.”

    서숭산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제가 그녀를 데리고 갑니다.”

    “안 된다! 짐은 조옥언이 연경 밖으로 나가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아!”

    황제에게 조옥언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죽어야 하는 여인이었다.

    “따를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서숭산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문 밖에는 구염락이 서 있었다.

    ‘썩은 고깃덩어리에서 나온 벌레 같은 자식이 감히 나를 배신해? 주제도 모르고!’

    서숭산이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제 어미와 똑같구나!”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가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서숭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염락은 궁금해졌다. 대체 친모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듯 역겨운 존재처럼 서로에게 떠넘겨지는 신세가 되었는가.

    서숭산이 떠난 후, 구염락은 대전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체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복궁에 돌아가 잠시라도 장서열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를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의 곁에.

    * * *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가냘픈 무희들은 은은한 곡조에 맞춰 바람에 흔들리듯 옷자락을 흩날렸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여인의 춤사위가 가장 아름다웠다.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긴 소매가 꽃잎처럼 살랑거렸다. 이는 그녀의 유연한 몸놀림과도 잘 어울렸다.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운 미모는 같은 여인인 장서열까지 넋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장서열은 그대로 손을 뻗어 한 줌도 안 되어 보이는 무희의 가녀린 허리를 쥐어 보고 싶었다.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온 구염락이 관복을 입은 채로 말없이 장서열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평상에 기댔다.

    살짝 이마를 찡그리던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춤을 계속하게 했다. 그녀가 마치 고양이를 만지듯 품에 안긴 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다른 고양이와 달리 그가 원할 때만 귀여워해 줄 수 있는 귀하고 특별한 고양이였다.

    장서열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어루만졌다. 비록 그의 머리카락은 생각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가끔 색이 바랜 것이 섞여 있기도 했지만 깔끔하고 정갈해서 만질 때면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맹목적으로 순하게 구는 것은 역시 그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일 터였다. 어쨌든 자신이 그에게 쓸모가 있다면 장서열로서는 다행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장서열이 무희의 노골적인 춤사위를 무시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작 그런 미색은 몇 년 후 연잎을 밟고 추는 춤으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여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구염락은 웅크린 채 장서열의 품을 파고들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장서열의 손이 잠시 굳었으나 이내 그에게 다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그녀는 그가 마음대로 볼을 비비도록 놔두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잠시 잘 테니까 저녁 먹을 때 깨워 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허리를 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완정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점점 흥겨워지는 공연에 몰두했다. 그녀는 아가씨에게 응석을 부리는 태자를 볼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태자를 쳐다보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춤을 보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장서열은 춤과 노래를 멈추라 일렀다. 그녀의 시선은 무희들의 공연에서 벗어나 서서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마치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품에 안긴 이를 가볍게 쓰다듬는 동작은 부드럽고 나른했다.

    그의 호흡이 편안해지자 비로소 그녀는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저어 무희들을 물러가게 한 그녀가 창밖의 어느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가 불편한 듯 몸을 움직였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오랫동안 편히 쉬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딱딱하게 굳은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가 다시 편안하게 잠들자 비로소 그녀 역시 숨을 돌렸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화 마마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 양원이 금용을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질투 때문이라면, 조금 전 분명히 도를 넘은 무희에게는 어째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는 혹시 장 양원이 무희를 보지 못한 걸까 의아했다.

    * * *

    풍윤 40년 늦가을, 대주국에는 여러 경사가 이어졌다.

    육세지란이 평정된 후, 서북장군은 왕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오 년에 한 번 열리는 수녀 선발이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의 미인이 엄격한 선발을 통해 황궁의 저수궁(储秀宫)으로 모여들었다. 미래에 내명부를 채울 새로운 얼굴이었다.

    겨울 끝 무렵 주 씨 가문과의 혼사를 결정한 조옥언의 모든 신경은 온통 수녀 선발에 집중되었다. 만약 황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조옥언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모든 희망을 딸에게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딸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홍촉이 난처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또 다시 밖을 바라보며 넋을 놓은 부인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인, 서왕(西王, 서숭산)께서 또 오셨습니다…….”

    조옥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말리질 못하니 오고 싶으면 오게 둘 뿐, 매일같이 찾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만나 줄 필요는 없었다.

    조옥언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홍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헌데 운 나쁘게도 서왕께서 마침 부인을 만나러 온 장 대인과 마주쳤습니다. 장 대인은 왕야께 얻어 맞으셨고요… 아마 내일이면 온 연경 사람이 다 알게 될 겁니다.”

    조옥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뭘 어쩌겠느냐. 사실이 알려지는 건데 두려울 것 없다.”

    서숭산은 본래 얼굴이 두꺼운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유부녀를 유혹한다고 손가락질한다 한들 콧방귀도 끼지 않을 위인이었다. 조옥언이 염려하는 건 단지 이 일로 인해 딸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는 것뿐이었다. 조옥언은 입궁한 딸아이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내일 정도에는 서숭산과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홍촉은 다른 염려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모친인 조 노부인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일이 조 노부인의 귀에 들어가는 날 부인은 또 호되게 야단맞을 것이다.

    * * *

    낙엽이 떨어지는 궁은 여전히 울긋불긋했다. 산책을 하며 경치를 감상하는 동안 장서열은 딱히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입궁한 뒤 그녀는 바깥일에 거의 신경을 끄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소리자를 통해 서풍엽이 구염락을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구염락에게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으며, 그런다 한들 서로 더 불편해질 뿐이었다.

    장서열은 평소처럼 구염락의 업무에 맞춰 엽자패 놀이를 끝내고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생활은 한눈에 외울 만큼 매우 단조로웠다.

    한편, 내명부의 수많은 비빈들은 거만하고 느긋한 어린 양원에게 불만이 많았다. 장서열은 품계가 낮은 태자의 후궁일 뿐이었지만 황후보다 더한 호사를 누렸다. 아무리 황궁이라 해도 매일 극단을 불러 극을 감상하는 건 불가능했다. 모르는 이의 눈에는 그녀가 극단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으로 비칠 정도였다.

    더욱 중요한 건 태자가 벌써 두 달 연속으로 장서열의 거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일이 있어 자복궁에 가지 못할 때면 그는 반드시 소리자를 보내 소식을 알렸다. 평소 태자는 도를 넘을 정도로 냉랭했지만 자복궁의 후궁만큼은 지극히 총애했다.

    자복궁에서 나오지 않는 장서열에 대해 각종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사람들은 태자를 홀린 장서열이 총애만 믿고 방자하게 군다고 속닥거렸다. 그들에게 장서열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저군전 일등대시녀를 쳐내고 전각을 장악한 여인이었다. 장서열의 이야기는 저수궁의 아름다운 소녀들을 제치고 내명부의 주요 화젯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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