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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3)화 (193/449)
  • 제193화

    두 팔을 쭉 뻗은 장서열의 몸에 청록색 옷이 걸쳐졌다. 좌우에 선 궁녀 두 명이 그녀의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허리에 나비매듭을 묶어 주었다.

    화 마마의 이야기를 듣고도 장서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직 서리가 가시지 않은 바깥의 흐린 날씨를 향했다. 하품을 한 그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꿇어앉아 있겠다니 그냥 두어라.”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는 금용의 속내를 장서열이 모를 리 없었다. 장서열은 금용이 원하는 대로 실컷 하게 놔둘 작정이었다. 열심히 밤을 샜다는데 그 노고를 헛수고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소리자는 예상치 못한 장서열의 대응에 기함했다. 게다가 전하께서 자복궁 앞에 꿇어앉아 있던 금용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는 사실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잠시 후, 고열에 시달리던 금용이 결국 억지로 돌려보내졌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소리자는 밀실 밖에 서 있었다. 젊고 깨끗한 얼굴 위에 분노와 안타까움, 그리고 무기력함 따위가 뒤섞였다. 그동안 장서열을 과소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수수방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장서열에게 하찮은 하인들도 생각만큼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려 주겠다고 결심했다. 소리자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구염락의 시중을 들며 참을성 있게 기회를 기다렸다.

    정오 직전, 황제의 동향을 보고하는 이가 찾아왔다. 그는 권여아가 궁을 나갔으며 후에 2품 양제에 봉해질 예정임을 알렸다. 또한 이에 상심한 황후가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휴식을 갖게 되었으며, 그 사이 귀비가 내명부를 관장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것이 바로 소리자가 기다리던 그 기회였다. 먹을 갈고 있던 소리자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마치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듯 얇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마마와 돈독한 정을 유지하시어 황제 폐하의 눈에 드시다니, 역시 귀비께서는 영명하십니다. 내명부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목이지요. 폐하의 마음을 얻었으니 귀비께서는 반드시 재기하실 겁니다.”

    소리자는 계속해 먹을 갈며 그저 있는 사실을 나열한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구염락의 머리는 온통 권여아가 얻게 될 지위에 가 있었다.

    ‘2품이면 서열이보다 높아.’

    고개를 숙인 구염락은 다시 바쁘게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소리자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흘리고, 내일 또 사소한 이야기를 흘리다 보면 언젠가 전하께서는 못된 장 양원이 가여운 금용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장 양원이 금용의 눈치를 봐야 했다.

    * * *

    장서열은 화 마마의 강압에 못 이겨 무료한 얼굴로 손톱을 손질했다. 윤이 나는 맑은 손톱 위에 색깔이 입혀지자 일순간 광택이 돌았다.

    “풍한에 들었다고?”

    장서열이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그녀는 마치 정원에 있는 꽃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알았다.”

    장서열은 일개 궁녀일 뿐인 금용이 과연 의원을 불렀을지 궁금했다. 물론 그녀는 금용을 데리고 천천히 놀아 줄 생각이었다. 온몸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는데 응당 받아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구염락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가한 틈을 타 고양이를 놀리듯 데리고 놀아 줄 것이다. 마침내 금용이 스스로를 죽일 때까지.

    손톱을 바라보던 장서열은 문득 자신이 과거처럼 치장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방금 물들인 손톱이 예쁜 건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한숨을 쉰 그녀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을 내려놓았다. 치장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손톱에 입힌 색이 다 굳기도 전에 주인이 움직이는 것을 본 농교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마마,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궁의 물건들은 역시 예뻤다. 색상과 광택은 이전에 아가씨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깨끗했다.

    화 마마가 장서열의 손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색채를 더했을 뿐이었지만 가늘고 흰 손은 나이 든 화 마마조차 한 번 만지고 싶을 정도로 어여뻤다. 그러니 태자 전하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 * *

    군대의 깃발이 열을 지어 펄럭였다. 서북 대장군은 황제의 명을 받고 오시(午时, 오전 11시~오후 1시)에 연경으로 돌아왔다. 차가운 땅에서 온 오만여 명의 정예병들은 그 존재만으로 연경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태자는 황제를 대신하여 친히 마중을 나가는 것으로 서북 대장군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과거 연경의 귀족 자제로 이름을 날렸던 서북 대장군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수많은 백성들이 열렬한 기세로 서북 대장군을 환영했다. 이제는 전쟁의 신이 되어 버린 태자와도 제법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서숭산은 올해로 열일곱이 된 아들 서비절(西飞绝)을 데리고 대주국의 태양인 태자를 알현했다. 무릎을 꿇은 서숭산은 이를 악문 채로 ‘태자 전하‘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가 비밀리에 키워낸 황자가 서북 전쟁에서 뜻밖에도 그를 배신했으니,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했다.

    황금색 망포를 입은 구염락은 문무백관을 데리고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한 서숭산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맞이했다.

    군중 한가운데 서 있던 권서함의 시선이 서비절을 스쳐 지나갔다. 서비절 또한 매서운 눈길로 권서함을 훑어보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서비절의 손이 순간 부르르 떨렸다. 마치 호랑이 두 마리가 부딪친 듯 맹렬한 기세였다.

    가장자리에 선 현천기는 따분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자고 있었다. 하지만 문무백관이 앞으로 걸어 나갈 때 그는 자연스레 이에 합류하며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 *

    입궁한 서숭산이 황제를 알현하고 있을 때, 연경 변두리에 위치한 국암사에서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불전 앞에 서 있었다. 눈앞에서 촛불이 꺼지자 마침내 화가 난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이를 꽉 깨물었다.

    “서숭산! 내가 당신의 코앞에 있는데 날 보러 오지도 않아?”

    이어 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산발적으로 싸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드디어 모든 절차를 마친 황제와 서숭산이 조석궁의 대전에서 서로 마주했다. 황제가 먼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널 왕으로 승격시킨 건 내 뜻이 아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성지를 꽉 쥔 서숭산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숭산은 이제 황제를 자신의 적이라 칭하는 게 썩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패기 넘치던 그 사내가 아니었다.

    황제는 오랜 시간 타성에 젖어 있었다. 그는 제위에 오른 뒤 더욱 안하무인이 되었을 뿐, 지위에 맞는 기품과 도량은 기르지 못했다. 서숭산은 자연스레 과거와 변함없이 매력적인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연경에 들어올 때 그에게 추파를 던진 젊은 아가씨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앞에 선 황제는 이제는 살이 붙은 중년의 사내에 불과했다. 아마도 황제는 말을 타는 법도 잊었으리라. 소문에 의하면 다른 나라에서 진상한 말도 황실의 마장에서 키워지고 있을 뿐 황제가 직접 타본 일이 없다고 했다. 이쯤 되면 말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서숭산, 행여라도 조옥언에게 엉뚱한 마음을 품을 생각은 마라. 이제 너도 결코 젊다 말할 수 없는 나이다. 그런 일로 구설수에 오르면 서북에 있는 네 자녀들이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느냐.”

    “하하!”

    순간 서숭산의 웃음소리가 우렁차게 대전을 울렸다. 차가운 서북 땅도 그의 성격까지 얼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소인은 이미 상처(喪妻, 아내가 죽음)하여 홀몸이고, 조옥언은 이혼을 하였습니다. 홀로 된 남녀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적인 일까지 폐하께서 굽어 살필 필요는 없지요. 설마…….”

    서숭산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황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폐하께서도 상처(喪妻)할 예정은 아니시겠지요?”

    황제가 분노했다.

    “무엄하다! 서숭산, 그간 좀 나아졌을까 기대했건만 교양이 없는 것은 여전하구나! 조옥언이 널 싫어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줄 아느냐?”

    “그것은 단정할 수 없지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녀가 이제 저처럼 거칠고 열정적인 남자를 좋아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황제는 당장이라도 서숭산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유년 시절 이렇듯 막돼먹은 인간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벗으로 지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자는 걸핏하면 친구의 아내를 모욕하는 무뢰배였다.

    서숭산 역시 과거 형제의 의를 맺을 정도로 절친했던 벗이 영 탐탁지 않았다. 황제는 과거 서숭산이 조옥언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잔인하게 그의 사랑을 가로챘다.

    물론 서숭산은 어린 시절 여러 여인을 거느린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만큼은 그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배신했고, 심지어 서숭산에게 진심이 없다며 조옥언과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조옥언을 향한 서숭산의 진심이 얼마나 간절한지, 그리고 이를 위해 서숭산이 어떠한 희생을 치렀는지까지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던 황제였다.

    당시 서숭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자 했고, 일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절친한 벗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황제는 조옥언을 가로채고 친구의 신뢰를 저버렸다.

    ‘대주국이 이런 망나니에게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서북 변경을 맡겼다니!’

    황제는 서숭산이 괘씸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분명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게 틀림없었다.

    “옥언을 모욕하지 마라! 네 곁에 여인이 부족한 것도 아닐 터,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지금 국암사에 갇혀 있지 않느냐!”

    “그 여인은 폐하의 여인이니 소인이야 알 턱이 없지요. 태자 전하를 낳은 여인인데 당연히 폐하께서 더욱 잘 아실 것이 아닙니까? 갑자기 그 여인을 입에 올리시는 걸 보니 그리워 못 견디겠는 쪽은 폐하이신 모양입니다. 듣자하니 폐하께서는 남몰래 그녀를 찾아간 적이 있다지요? 역시 살려두신 데에는 다 그만한 목적이 있었던 게지요.”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이 반역자 놈을 당장 끌어내어 참수하라!”

    바깥에는 구염락이 서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서숭산은 아직 황제를 자극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여인을 가로챈 황제를 여전히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천하의 서숭산이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배신당해 사랑하는 여인을 놓치다니!

    “어찌 그리 역정을 내십니까? 그 여인의 능력이 비범하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소인은 저와 여인까지 나누어 갖길 좋아하는 형제에게 기꺼이 여인을 내어드린 것뿐입니다. 애석하게도 천한 신분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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