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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2)화 (192/449)

제192화

서숭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흩어져 사라졌다.

“너 설마 아직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냐? 잊지 마라. 과거 혼인을 빙자해 널 배신한 게 누구인지.”

“옛말은 할 필요 없고. 지금 네 모습을 좀 봐. 과거에 내가 널 좋아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널 따르는 그 수많은 미인들과 다툴 생각은 추호도 없어!”

“…….”

“게다가 네가 풍윤과 뭐가 다르지? 나는 둘 중 더 대단한 사내를 선택했을 뿐이야. 풍윤의 곁이라면 최소한 역겨운 여자들을 다 만난 뒤에 절이라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널 선택했다면 난 너의 그 대단한 여인들과 싸운 뒤 네 어머니의 시중까지 들어야 했겠지.”

서숭산은 말문이 막혔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해!”

“풍윤도 그랬지.”

서숭산이 순간 세월의 피로가 쌓인 얼굴로 얼른 화제를 바꿨다.

“어디 가는 길이지? 오랜 친구를 바람맞힐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조옥언은 그나마 그가 눈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사돈댁.”

“나도 가겠어.”

조옥언이 웃기다는 듯 서숭산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서 뭘 하려고? 왜, 내 며느리를 빼앗아서 네 아들과 맺어 주기라도 하려고? 세월이 그토록 많이 흘렀는데도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정말 그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게 네가 맞아?”

당시 조옥언이 서숭산을 상대해 주지 않은 이유는 충분했다. 과거 그는 연경의 악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귀족 자제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결점을 다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오늘날 폭군으로 불리는 당자의 명성은 신분과 능력, 그리고 막무가내인 점까지 모두 새 발의 피였다.

하지만 조옥언은 과거 자신에게 가장 잘해준 이가 서숭산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서숭산을 보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딸아이가 입궁을 했다던데.”

조옥언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서숭산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서숭산은 억울했다. 이는 그저 조옥언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이 상한 듯 보이자 그가 얼른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화가 나는군. 널 보려고 특별히 연경까지 행차했는데 조금도 감동하지 않다니.”

조옥언 역시 화가 났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넌 황제의 명을 어기고 연경에 들어왔어!”

“지금 내 걱정을 해 주는 건가?”

서숭산이 거드름을 피우며 몸을 마차 벽에 기댔다.

“만일 그때 풍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풍윤이 없었대도 넌 아니야.”

그녀의 말에 서숭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연경에 돌아온 이유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을 무척이나 홀대하고 있었다.

‘못된 성질머리 좀 고칠 것이지!’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그는 높은 신분 외에 조옥언에게 내세울 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나름대로 거의 성공할 뻔한 일을 풍윤이 다 망쳤다고 생각했다.

사실 조옥언은 상냥한 여인도, 심지어 현모양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 시절 서숭산의 전부였다. 아직도 그는 어여쁜 소녀가 오라버니 뒤에 서서 자신을 몰래 훔쳐보던 그 깜찍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서숭산의 세상은 달라졌다.

서숭산은 조옥언을 사랑했다. 그조차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기운이 솟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확실히 그녀는 과거보다 더욱 까다로워졌다.

“난 참 운도 없구나.”

이미 그의 나이는 지천명(知天命, 50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와 자신이 조옥언과 무엇을 하고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잘 되어 봐야 세속에 물든 요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조옥언이 서숭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지위와 능력은 여전히 대단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조옥언을 대할 때만큼은 절대 복종하고 순종했다.

그러나 조옥언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서숭산을 쫓아낼 것이다.

* * *

황제는 밀실에서 현일이 전하는 비밀 보고를 듣고 있었다. 밀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감히 그자를 연경에 들여보냈느냐! 당장 조옥언을 궁으로 들라 하라!”

밀실 한편을 조용히 지키고 선 진 공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명은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했다.

조옥언을 궁으로 불러오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그 이유가 사적인 원한 때문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 서북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것도 아니므로 딱히 그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었다.

황제는 마치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분노했다. 장신성이 거들떠볼 가치도 없는 자라면 서숭산은 그의 입맛을 떨어뜨리는 자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과 조옥언 사이에 끼어들던 천하의 나쁜 놈이었다.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 버렸건만 다시 돌아오다니!’

자기도 모르게 구석으로 몸을 웅크린 진 공공은 존재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같은 시각, 구염락 역시 서숭산이 연경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손 공공은 조용하고 공손한 태도로 아래쪽에 서 있었다. 그는 과거 서숭산의 부하였지만 지금은 태자에게 충성을 다했다.

구염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 눈앞의 업무를 처리했다.

* * *

약연(若然, 구염락의 어머니)은 국암사 후원에 있었다. 어린 비구니의 말에 밭에 물을 주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반짝 빛냈다가 이내 다시 원래의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얼굴 양 옆으로 거칠게 자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왔군요…….”

바가지를 꽉 움켜쥔 약연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곧 하인을 시켜 불을 때고 물을 끓이라고 명했다.

그녀는 깨끗이 씻고자 했다. 오늘밤, 구염락을 위해서라도 그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약연은 옛날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붙잡을 생각이었다.

약연의 유약한 얼굴에 결연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서숭산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몸이 아직도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 * *

날은 점점 빠르게 저물어갔다. 술시(戌时, 저녁 7시~9시)가 되기도 전, 이미 어두워진 궁 안에는 각양각색의 등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연경의 거리를 수놓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장서열은 처소에서 몇몇 궁녀와 함께 엽자패(叶子牌, 이파리처럼 길쭉한 모양의 종이패로 하는 놀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놀이에 쉽게 빠져들어 오래도록 즐기곤 했다. 농교와 완정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물론 화 마마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장서열이 즐거워하는 데다 태자의 성격을 아는 탓에 감히 뭐라고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후에 태자의 열렬한 마음이 좀 식는다면 양원에게 늙은 여인들이나 좋아하는 놀이를 삼가도록 충언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이도 어린데 나비를 잡거나 수를 놓는 취미를 가지면 좀 좋을까.’

장서열은 세 판의 놀이 끝에 은자 한 냥을 따냈다. 그녀는 이기는 것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실컷 놀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그녀를 상대하는 궁녀들은 눈치가 남달랐기에 크게 이기거나 지는 일 없이 적당한 재미를 유지했다. 덕분에 장서열은 이틀 만에 놀이에 중독되고 말았다.

그때 구염락이 들어왔다. 그러나 장서열은 그를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뒤 계속해 패를 만졌다. 구염락은 다른 이들을 향해 예를 차리지 말라고 손짓한 뒤 잠시 장서열의 뒤에 섰다.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줄곧 마음을 졸이던 화 마마는 태자에게 전혀 나무랄 뜻이 없어 보이자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금서가 다가와 화 마마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화 마마의 안색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짧은 순간 화 마마는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 고했다.

“마마, 금용이 뵙기를 청한다고 합니다.”

일순간 소리자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태자는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소리자는 머리를 숙인 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여전히 패에 집중하며 장서열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만나지 않겠다고 전해라.”

놀란 화 마마는 자기도 모르게 장서열의 뒤에 선 태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화 마마는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장서열에게 태자가 앞에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고 충고하고 싶었지만 또 괜히 나섰다가 태자에게 괜한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금용 때문에 자신이 소리자의 눈 밖에 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화 마마는 순간 소리자가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금용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눈치가 있는 한 누구든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금용은 욕심이 많았다.

화 마마는 어쩔 수 없이 금용을 물러나게 했다.

다음날, 구염락은 장서열의 살뜰한 시중을 받으며 자복궁을 나섰다. 그러나 막 입구를 나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금용이 보였다. 순간 구염락의 눈가에 냉기가 흘렀다.

구염락을 본 금용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얼른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는 눈물과 함께 사모하는 빛이 역력했다. 가히 모든 사내들을 넘어가게 할 만큼 가여운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게 구염락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전하… 제가 근래에 몸이 아파 곁에서 전하를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앞으로 나선 소리자가 초조하게 말했다.

“밤새도록 꿇어앉아 있었던 게냐? 아직 몸의 상처도 다 나질 않았는데 어째서……!”

소리자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금용이 스스로를 소중히 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게 속이 상했다.

“전하, 부디 금용을 돌려보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바닥에 꿇어앉은 금용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구염락이 소리자를 쳐다보았다.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장 양원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네가 나서는 것이냐?”

말을 마친 구염락은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금용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태자와 금용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던 소리자는 이미 멀어진 태자를 바라본 뒤 이를 악물고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한편, 화 마마의 귀에 밤새도록 꿇어앉은 금용이 그 상태로 태자를 만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야간 경비를 선 궁인들을 따끔하게 혼냈다. 곤장을 맞은 농일(弄一)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금… 금용이 마마께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멍청한 것! 그래도 무조건 내게 알렸어야지!”

화 마마는 계속해 농일을 때렸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했다. 이어 그녀는 서둘러 이 일을 이제 막 잠에서 깬 장서열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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