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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91)화 (191/449)
  • 제191화

    한숨을 쉰 권 노야는 아들을 보면서 한결 위안을 얻었다. 그의 속을 썩이지 않는 건 언제나 권서함뿐이었다. 비록 혼사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긴 했으나 어차피 그건 아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편안한 노년을, 그리고 아이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황제는 마치 역신(疫神, 재앙을 몰고오는 신)을 내쫓듯 권여아를 쫓아 버렸다. 제아무리 너그러운 사람이라 해도 노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자 모양 서진(書鎭,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두는 물건)을 꽉 움켜쥔 그가 별안간 이를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권서함은 처음과 같이 고요한 태도를 유지했다.

    장서열은 궁에 들어갔고, 권여아는 궁을 나왔다. 오늘 아버지가 입궁한 까닭은 황실과 합의를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권 씨 가문에게 불리한 조건이었으리라.

    권 노야는 아들을 보며 점차 냉정을 되찾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궁에서 있었던 일을 아들에게 낱낱이 들려주었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말을 마친 권 노야가 다시 책상 위에 있던 붓과 묵을 쓸어 버렸다. 바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권서함은 아버지의 언사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태자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으란 말이냐? 우리가 밖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 다 가문의 평안을 위해서다! 그런데 보아라. 네 누이동생이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권서함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태자는 쉬운 상대가 아니고, 곧 황제가 됩니다.”

    사촌인 구염단신이 태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암암리에 그를 배척하여 황제로서 실권을 잃게 하거나, 대충 사탕을 쥐여 주고 게으른 황제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권여아가 황자를 낳는다면 제거해도 무방했다.

    황실에서 먼저 도리를 지키지 않으니 그들로서도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이 없었다. 권서함이 말했다.

    “단지 폐하 때문이라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마치 오늘의 정무를 보고하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권 노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이번에 정말로 도를 넘었다.”

    “아버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난 이미 늙어 이 정도 수모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네 누이동생은 대체 뭘 잘못했단 말이냐! 만약 황제가 그리 막무가내로 나오지 않았다면 나도 신하된 도리로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오늘 황제의 그 태도를 보아라! 네 사촌 형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오늘날까지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그’를 의심하지 않은 줄 아느냐? 하지만 황제는 그 일을 그저 우연한 사고로 여기고 죄를 묻지도 않았지. 제대로 원인조차 밝혀 내지 못한 까닭은 다 그 때문이다!

    …됐다. 내가 괜한 푸념을 늘어놓았구나. 난 이제 늙어 힘이 없으니 이제는 네가 누이동생의 의지처가 되어 주어야 한다.”

    “태자는 그리 분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권 노야가 신음을 흘렸다. 아들의 말에 그가 힘없이 답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래도 장 씨 계집은 태자에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야. 앞으로 여아가 궁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면 그 아이와 충돌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

    “자주 여아를 찾아가 위로해 주거라. 만사에 인내하고 장서열은 멀리하라고 해라. 지금으로선 그저 충왕부가 들고 일어나 소란을 피우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구나. 그 계집의 지위가 영원히 양원에 머물도록 말이야.”

    그러나 권서함의 머릿속에는 미소를 머금은 장서열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색 치마를 걸친 그녀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상상 속 도도한 자태가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그를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장서열을 영원히 4품 양원에 머무르게 한다는 건 치열한 궁중에서 곤경에 빠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권서함은 처음으로 누이동생을 위하지 않고 물러섰다. 장서열이 누이동생의 강적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녀를 함정에 빠뜨릴 수 없었다.

    권 노야는 아들의 묵묵부답에도 개의치 않고 덧붙여 말했다.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거라. 분명 네 누이동생에게 힘을 실어줄 방법이 있을 게다.”

    권서함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장서열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인이 나타날 겁니다.”

    “…….”

    “설마 누이동생에게 걸림돌이 되는 여인을 모조리 제거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여아는 이미 궁에서 여러 해를 지냈습니다. 소자는 우선 저희가 여아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 노야는 아들이 장서열을 거론하며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자 속으로 안도했다.

    “초혜전에서 네가 장서열과 사이가 좋았다지?”

    권서함이 솔직히 말했다.

    “서열 아가씨는 쉽게 호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귀족 아가씨 특유의 못된 버릇이 없지요.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하고,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납니다. 다만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남의 오해를 사기에 쉽습니다.”

    권 노야는 특히 아들의 마지막 말이 흡족했다. 아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아이인 것도 그랬지만 그는 혹시라도 딸 여아가 아무 잘못 없이 장서열에게 미움을 사지는 않을까 우려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장서열에게 결점이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장서열이 만씨 가문의 여식과 가깝다고 했던가…….’

    * * *

    높고 상쾌한 가을 하늘 아래 맑은 물이 흘렀다. 연경은 그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장엄하고 광활했다. 서숭산은 대군을 성 밖에 머무르게 한 뒤, 심복을 데리고 먼저 연경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든 서숭산의 얼굴은 세상의 온갖 풍파와 함께 냉랭한 한기를 담고 있었다. 비록 젊은 시절 넘치던 패기는 사라져 있었지만 거만해 보일 정도로 건장한 체격은 여전히 굳세고 단단했다.

    오랜 세월 변방에서 전투를 치르며 그의 성격은 더욱 냉엄해져 있었다. 그의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이라면 그가 과거 연경을 제패했던 서숭산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기에 바쁘던 소년은 어느덧 예리한 검이 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은 뭇 사람들을 압도하는 그의 기세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장군.”

    성문을 통과한 서숭산은 두 시진이 다 지나도록 태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산처럼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감히 그의 주변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덕분에 행인이 오고 가는 성문 입구의 풍경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곁에 선 부장(副将)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군은 고집스런 구석이 있었다. 특히 아주 사소한 일에서 더욱 그랬다.

    그는 장군이 도대체 왜 밥을 먹기 전에 밥그릇에 담긴 밥을 모조리 탁자 위에 쏟아 버리는지 알 수 없었고, 출정 전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왜 그리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부장은 대체 장군이 연경의 성문 앞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장군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 역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문득 정교한 마차 하나가 근처에 멈춰 섰다. 휘장이 걷힌 마차 안에는 세월의 변화와 함께 기품과 영명함이 더해진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것도 잠시, 그녀가 표정을 찡그리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당신… 정말 돌아왔군!”

    그녀가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안 씻고 다니는 고질병은 아직도 고치지 못했어!”

    성을 낸 여인이 즉시 휘장을 내렸다.

    “어서 가자. 냄새가 나 죽겠구나!”

    여인은 서숭산보다 더욱 깊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차는 채 웃어 보이지도 못한 풍채 좋은 장군을 버리고 순식간에 떠나 버렸다.

    “조옥언! 오해야!”

    서숭산이 뻣뻣하게 경직된 얼굴로 서둘러 외쳤다.

    “세월이 이렇게 지났는데 아직도 성미가 그 모양이야? 그러니까 이혼을 해… 뭐야, 정말 떠났어?”

    깜짝 놀란 서숭산이 냅다 마차의 뒤를 쫓았다. 늘그막에도 그는 여전히 쫓아가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철이 들기 전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조옥언은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운 조 씨 가문의 아가씨, 그리고 서숭산은 그녀의 뒤를 쫓다 꼭 욕을 얻어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년이었다.

    사실 조옥언은 서숭산을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풍윤을 놀리기 위해 그가 필요했던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나 있었다.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조옥언에게 때아닌 사랑 놀음을 할 정신은 없었다.

    오늘은 조옥언이 예비 사돈을 만나 장서전의 혼인 날짜를 상의하기로 한 날이었다. 만일 문지기가 놀랄 만한 서신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숭산은 예전부터 조옥언의 뒤를 쫓는 데 익숙했지만 마차의 뒤를 쫓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오랜 세월 심신을 갈고닦는 데 전념해 온 그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오려 했다.

    그러나 변함없이 오만한 조옥언의 얼굴을 본 순간, 서숭산은 왠지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군말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초월적인 힘으로 달리는 마차에 올라탄 그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옥언, 어때? 나이가 들었어도 이 몸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지?”

    서숭산이 정말로 달리는 마차에 올라탔다는 사실에 조옥언은 경악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보였다.

    그간 서숭산은 한시도 조옥언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조옥언의 습관과 언행을 아예 책자로 만들어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이를 매일 꺼내어 보면서 그녀가 풍윤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비웃고 또 비웃었다.

    서숭산이 조옥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옥언을 보자마자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침착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마냥 그녀를 놀리고 싶었다.

    “듣자하니 이혼을 했다지? 정말 재미있군. 이 몸은 역시 네 성질을 견뎌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애당초 나와 혼인해서 아들 여덟을 낳았다면 난 네가 날 때려 죽인대도 절대 이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 성격 좋은 남자까지 등을 돌리게 하다니, 과연 넌 예나 지금이나 연경 여인들의 귀감이다.”

    기가 찬 조옥언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예 대꾸하지 않았다.

    “왜 이리 재미없게 변했지?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형제 사이인데.”

    서숭산은 감격한 나머지 조옥언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려 했다. 여전히 하늘이 편애하는 이 여인은 피부가 여리고 부드러운 것조차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조옥언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연경에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셈이야? 당장 꺼져! 널 구한답시고 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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