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90)화 (190/449)

제190화

태후 밑에서 수십 년간 관직을 이어온 권 노야는 그녀의 방식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주도권을 잡은 태후는 권 씨 가문을 욕보이며 황실의 호의를 감사히 받도록 종용할 것이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황후가 나선 이상, 이제 태후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권 노야는 딸을 그저 권력을 위한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실에 머무는 딸아이에게 실질적인 지위를 주고 싶었다.

황실에서는 권 노야의 종자를 빼앗아갔다. 가져간 종자에 얼마만큼의 물을 줄 지는 전적으로 그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문제는 약속했던 한 바가지의 물이 지금은 고작 한 방울로 변했다는 것이다.

태후는 권 노야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이들을 이끌고 조석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피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조옥언과 약조한 것이 있었다. 그나마 태후가 중재인이 되었을 때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한다면 권 씨 가문도 태후 앞에서 크게 반발하지는 못할 것이다.

“태자비는 아니 되오. 다만 양원이라면 무리가 없겠군.”

황후가 불같이 화를 냈다. 만일 태후가 아니었다면 그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온 그들은 체면을 불사하고 싸웠을 것이다.

권여아는 높은 신분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황후인 자신 곁에서 몇 년 동안 철저히 교육을 받은 아이였다.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권여아는 최소한 양제(良娣, 태자의 첩 중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여인)는 되어야 마땅했다. 장서열과 동일한 지위를 주겠다는 건 황후인 자신의 체면을 짓밟는 처사였다.

태후 역시 불쾌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터무니없는 소리!”

태후는 권 씨 가문에서 또 다시 황후가 나오는 걸 원치 않았지만 어쨌든 황제가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권 씨 가문과 척을 진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황제가 허울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수녀 선발이 얼마 남지 않았소. 태자가 아직 어리고 또한 지금은 나랏일에 집중해야 할 시기이니 태자비를 봉해야 한다면 최소한 내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오. 황후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수녀 선발 때 짐이 친히 정2품에 봉하겠소.”

후궁은 시켜 주지만 태자비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황후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권 노야는 침묵을 지켰다. 애초에 기대도 없던 싸움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런 권 노야를 지켜보는 태후는 황제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꾸 일을 만드는 게야! 권 씨 가문에서 이 정도까지 물러섰으면 적당히 타협을 해야지! 권 노야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늘!’

태후는 아들이 이처럼 분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순간 태후의 머릿속에 조옥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또 그 아이가…….’

이쯤 되자 태후 또한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옥언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 씨 가문은 달랐다. 지금 이들은 그저 마음이 좋아서 계속해 양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상, 됐으니 그만하세요.”

황제는 돌아가는 판을 읽지 못했다. 결국 태후가 나섰다.

“이 늙은이의 이름을 걸고 권여아를 종2품 양제로 봉한다. 그리고 황상, 훗날 그 아이를 황귀비(皇贵妃)로 봉합시다.”

다시 입을 열려던 황제가 태후의 날카로운 눈길에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어마마마. 하지만 양제는 정식 비빈이나 마찬가지니, 정식으로 수녀 선발을 거…….”

태후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채 말을 잇지 못한 황제가 힘겹게 말을 바꿨다.

“선발은 거치지 않는 것으로 하고, 내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입궁하도록 하지요.”

권 노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오히려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줄 것이다. 게다가 이미 딸아이가 황궁에서 수년을 보낸 이상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와 평생 끼고 살 작정으로 딸을 내어 달라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딸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황상, 입궁이라니요. 그 아이는 줄곧 궁에 있었지 않소!”

황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장서열과 권여아가 함께 저군전에 머물게 될 사태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의 명분은 태자의 정식 비빈을 혼례는커녕 작은 술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애매모호하게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이러한 노력으로 부디 조옥언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싶었다. 수녀 선발 후 권여아를 들이겠다는 말은 그녀가 최소한 일 년 반 이후에나 입궁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비록 조옥언과 약조한 삼 년보다 짧았지만 황제는 그나마 그간 태자비도, 장서열보다 높은 품계의 후궁도 없었다는 사실이 조옥언의 화를 어느 정도 잠재워 줄 거라 여겼다.

물론 태후는 황제와 생각이 달랐다. 권 씨 가문은 명망 높은 세도가로 반절 이상의 관원들이 이들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때에 권 노야의 마음을 달래기는커녕 권여아에게 억지로 양원 신분을 강요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온화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던 태후가 주름진 손으로 황후의 등을 토닥이며 자애롭게 말했다.

“황후, 여아를 궁에 두고 싶으시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황후는 당연히 권여아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녀는 태자가 아직 어릴 때, 그리고 다른 여인이 아직 태자의 마음을 빼앗기 전에 두 아이가 서로 좋은 감정을 갖길 바랐다.

눈물을 훔치며 몰래 황제를 힐끗 쳐다본 황후가 짐짓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어마마마. 신첩은…….”

그러나 돌연 권 노야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절을 올렸다.

“태후마마. 소신의 딸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궁에서 자랐습니다. 저와 제 안사람은 이를 크나큰 복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감사하게도 딸아이가 귀한 신분을 얻었으니, 소신은 딸아이가 훗날 태후마마와 황후마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도록 우선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 엄격히 규율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즉시 앞으로 나선 황제가 권 노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대의 청을 윤허하오.”

이제 서숭산(西崇山, 서북장군의 본명)이 돌아온들 조옥언 앞에서 황제가 망신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태후는 조용히 염주알을 굴리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그녀는 자신을 기만한 이 불효자를 반드시 혼쭐내리라 다짐했다.

황후는 당장이라도 권여아를 내쫓지 못해 안달이 난 황제를 보며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들이 태자의 지위를 상실하자 결국 모후인 자신 또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조카딸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게 되었다. 침묵을 지키는 오라버니를 보자 황후는 갑자기 울고 싶지 않아졌다. 그녀는 권 씨 가문의 체면을 지켜야 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타협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여아가 저군전에 있지 못할 이유가 고작 혼례 때문이라면 대체 장서열은 어찌하여 궁을 활보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말은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어차피 꺼낸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권여아는 고개를 숙였다. 황실에서 그녀는 단지 말 잘 듣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종2품 양제. 비록 태자비는 아니었지만 태자의 후궁 중 가장 높은 지위였다. 그녀는 자신의 출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권여아는 황실에서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인을 태자비로 세우는지, 또한 장서열이 무슨 수로 자신에게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을지 똑똑히 지켜보기로 했다. 황실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결국 지위였다.

권 노야는 무거운 마음으로 딸을 데리고 나왔다. 침묵에 길들여진 그는 딸에게 채 물건을 챙길 시간조차 주지 않고 곧장 그녀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황후가 그 뒤를 쫓았지만 결국 그녀는 권여아에게 옷 한 벌 챙겨 주지 못했다. 홀로 권여아의 물건들을 끌어안은 그녀가 한참을 흐느꼈다. 그녀는 군왕이 되어 출궁한 구염단신을 몹시도 다시 궁에 들이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이를 오해한 구염락이 아들의 목숨을 해할까 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황후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녀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녀를 데리고 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황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홀가분함을 느꼈다. 폭군이나 다름없는 조옥언이 내건 조건은 오직 단 하나였다. 만일 그마저도 지키지 못했다면 연경에 쳐들어온 서숭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권 노야의 발걸음은 몹시 급박했다. 그는 타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측비(侧妃)를 약속했다면 그 또한 태자비 자리를 넘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염락이 태자가 된 후 황제는 지금껏 권여아를 태자비로 묵인하다 갑작스레 말을 바꿨다.

교양과 학식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권 노야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구염 왕조를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을 만큼 강한 분노를 느꼈다.

권여아는 아버지의 곁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는 아버지를 겁에 질린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권 노부인은 딸이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권여아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한참을 슬퍼했다. 그녀의 억울함과 괴로움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권여아는 황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매사에 신중을 기했다. 그녀는 인시(寅时, 새벽3시~5시)에 일어나 약을 달였고, 술시(戌时, 밤7시~9시)가 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녀는 사소한 일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혹시라도 남에게 비난 받는 일이 없도록 무슨 일이든 두 배 세 배로 노력했다.

권여아는 마침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짓누르던 큰 돌덩이가 사라지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어머니의 품에 안겨 마음껏 응석을 부렸다.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서 시선을 뗀 권서함은 아버지를 바라본 후 그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권 노야는 안 좋은 기분을 감추려는 듯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그는 주방에 일러 놀란 권여아를 진정시킬 탕을 끓이게 하고, 부인에게 딸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라 권했다. 그리고 권서함을 서재로 불렀다.

서재는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길게 늘어선 서적들은 대나무의 그윽한 향기가 섞인 묵향을 발산했다. 잡다한 물건 없이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권서함은 침착한 얼굴로 아래에 앉았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기운이 서재의 무거운 분위기를 가라앉혀 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버지, 궁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0